<-- 269 회: 7-18 -->
“수도방위군, 동천태군, 서천태군 그리고 남천태군의 일부가 이곳으로 오고 있네.”
“…….”
명국영의 눈이 흔들렸다.
“삼삼오오 흩어져 장사꾼으로 위장을 했으니 아직 그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오래지 않아 유타루체 앞에 20만 대군이 모여들 걸세. 정벌군으로서 말이야. 재미있어. 그 아이의 충고 덕분에 북방의 위험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대규모 정벌군을 일으키진 못했을 거야.”
황제는 쿡쿡 웃었다.
“…꼭 그렇게 하셔야겠습니까?”
“자네는 꼭 그렇게 해야겠나?”
“…폐하?”
“자네가 그 아이를 제자로 삼고 아낀다는 사실은 황마사로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네. 허나, 자넨 황정어사야. 황제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황정어사란 말일세. 오늘 자넨 숱한 고문을 받고 사지가 찢어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발언을 세 번이나 했네. 내 앞에서. 자네가 가진 비범한 재주를 아까워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암행은 있지도 않았을 거야.”
어느새 근위기사단이 다가와 명국영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을 힐끔 쳐다본 명국영은 선택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린 그는 광장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백중가’를 부르고 있었다. 백중 찬양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숭배의 내용을 담은 그 노래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황제를 위한 노래도 있다.
다만 백성들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운가청이라는 중앙관청에 소속된 악공, 가수 들이 황제를 위하여 곡을 만들고 가사를 붙인 것이었다. 돈을 받기 때문에, 관리로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황제를 위한 노래를 만드는 그들에게서 진심을 기대할 수는 없다.
명국영은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은 단태라는 나무가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거름이 될 터였다.
황제의 뜻을 알게 된 단태는 어떤 방법을 취할까? 시청과 11인위원회와 상대할 때와 그리 다르진 않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단태가 이끄는 백중파는 황제를 능가하는 거목으로 우뚝 설 테고, 사람들은 단태를 진정한 황제로 인정할 날이 반드시 오고 말 것이다.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은… 유천주에게서 배웠을 그 마법이었다.
진정한 통치는 힘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명국영은 믿었다. 마법은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보다는 힘에 가까웠다. 마법사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부하지만 힘을 숭상하는 태도는 용병이나 무사와 다를 바가 없다. 그저 강해지는 데 똑똑한 머리가 필요할 뿐이었다.
단태가 그 마법에 의지할수록, 그 마법을 통하여 사람들의 동의를 이끌어낼수록, 백중파가 일궈내는 기적은 점점 황제를 비롯하여 기존 세력의 지배와 비슷해지리라. 또한 힘에 의한 통치는 결국 피를 흘리는 냉혹한 지배로 귀결되고 말 터였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단태에게 아직 가르칠 게 남았으니까. 무엇보다 인간을 멸하려는 암탄주의 계략을 두고 갈 순 없지. 마법을 익힌 적도 없는 내가 대마법사 아레마고 덕분에 수탄왕령과 계약을 맺었던 일은… 모두 암탄주와 관련이 있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아레마고는 나를 통하여 암탄주의 음모를 막으려는 거야.’
살아남아야 할 두 개의 이유를 찾아낸 명국영은 선택을 강요하는 황제를 응시했다.
“폐하,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해보게.”
황제는 ‘마지막’이라는 표현에서 명국영이 택할 길을 짐작했다. 뛰어난 자일수록 한 번 정한 뜻을 꺾지 않음을 그는 잘 알았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명국영 같은 자를 단태처럼 어리석은 놈에게 빼앗겼다니.
“군왕은 바다이며, 바다여야 합니다.”
“<무무비경>인가?”
“그렇사옵니다. 군왕은 바다처럼 모든 물을 받아들이기에 군왕이라고 무무는 말했사옵니다. 단태는… 유달리 맑고 깨끗하며 커다란 빙하 같은 인물이옵니다. 웬만한 호수나 강은 막아버릴 만큼 거대한 그 빙하를 오직 바다만이 수용할 수 있음을 잊지 마옵소서. 섬 혹은 대륙이라고 해도 될 빙하를 받아들인다면 세상이 폐하를 진정한 군왕으로 인정할 것이옵니다.”
“…….”
황제는 그 말이 예리한 바늘처럼 가슴 안쪽을 찌른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어떻게든 단태를, 백중파를 껴안고자 방법을 찾고 또 찾았다.
결론은… 열등감이었다.
자신은 단태처럼 할 수 없다는 처절한 깨달음은 황제가 될 운명으로 태어나 황제로서의 삶을 위해 최고의 스승으로부터 군왕의 도리를 배워서 익힌 그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무너뜨렸다. 자신이 황제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은 이성적인 태도마저 집어삼켰다.
단태야말로 황제로 태어난 인물이었다. 하늘이 황제로 점을 찍은 인물이었다. 백중파를 깊이 파고들수록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조직을 만들 수도, 운영할 수도 없음은 분명해졌다. 흉내조차 낼 수 없으리라.
둘 중 하나였다.
단태에게 황제 자리를 내어주거나.
단태를 죽이거나.
첫 번째 선택은 자신을 부정한다.
두 번째 선택은 하늘의 뜻을 부정한다.
황제는 자신을 부정하느니 하늘의 뜻을 짓밟기로 마음먹었고, 그 결심으로 인해 오늘의 암행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충심이 담긴 명국영의 고언에 마음이 흔들렸다.
혹시 명국영처럼 뛰어난 인물이 곁을 지킨다면 단태를 품을 수 있지 않을까? 단태를 품는다면… 태평성대라는 꿈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대가 그를 가리켜 성군으로 추앙할 것이다. 황제로서의 꿈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희미한 가능성에 제국의 운명을 거는 어리석은 도박을 거부했다. 명국영은 변하지 않았다. <제국의 빛과 그늘>을 썼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명국영 자체가 바로 그 책이었다. 이상론을 설파하되 거기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는다.
단태라는 이상적인 목표는… 현실로 존재한다.
다만, 황제로서 자신은 그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다.
그러니…… 목표를 무너뜨리는 수밖에.
“죽여라.”
황제가 명령을 내렸다.
수십 개의 칼이 빛을 반짝이며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그 중 하나가 명국영의 목을 베려는 순간, 일렁이는 물의 막이 명국영을 에워쌌고, 칼을 튕겨냈다. 근위기사들은 본능적으로 황제를 둘러쌌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기습을 대비한 것이다.
푸르스름한 물의 막이 점점 짙어졌다.
그러다…… 거품이 터지듯 물의 막이 흘러내렸는데, 명국영은 사라지고 없었다.
황제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낮게 깔려 도시를 덮고 있었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하늘은 자신을 세상에 내고, 또 단태라는 아이를 세상으로 보냈을까? 단태가 제국을 운영한다면 용령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제국으로 우뚝 설 것이다. 기적이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갈 테고, 백성의 삶 역시 완전히 달라지리라.
그걸 알면서도 황제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황위는 그에게 전부였다. 제국은 그의 선조가 일으켜 세웠고, 아버지가 그에게 물려준 유산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유산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놈에게 공짜로 갖다 바칠 수는 없다.
“유타루체를 떠난다.”
“네, 폐하!”
황제는 몸을 돌려 광장을 빠져나갔고, 근위기사단이 뒤를 따랐다.
@
군라중망을 통하여 명국영의 소재 파악에 안간힘을 다 썼지만, 단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군라중망은 거의 모든 것을 듣고 보는 기억, 감정, 경험의 거대한 그물망이지만 단태가 원하는 부분을 즉시 찾을 수 있는 체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무작위로 연결되는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었다.
명국영 걱정에 한 숨도 자지 못한 단태는 지금 어떻게 하면 이웃집 여자를 침대에 눕힐까 고민하는 남자의 감정을 더듬고 있었다. 근거는 없지만, 군라중망은 원하는 것에 집착할수록 그 부분을 보여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황제는 유타루체를 떠났다.
그와 동시에 명국영은… 실종되었다.
사흘 만에 단태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그가 광장 근처에서 수탄왕령의 기운에 놀라워했던 무렵, 황제가 근위기사단을 대동하고 광장에 와 있었다. 암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