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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부탁합니다.”
“…제가 오히려 부탁을 드려야 할 입장이군요.”
유마찬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귀한 아들을 납치한 백중파를 무너뜨리겠다는 결심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상대는 천마다. 그것도 출신을 알 수 없는 마법사. 맞서서 부딪힌다면 깨질 쪽은 조그만 가문에 불과한 유가일 것이다.
-유천주님께서 소가주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곧 돌아올 소가주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위대한 존재께서 백중파 뒤에 있다는 겁니까?”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요?”
단태는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유마찬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백중파에 대한 판단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 쉽게 흔들어 무너뜨릴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도시를 폐허로 만들 수 있는 유천주만으로도 백중파는 유타루체를 장악할 수 있으리라.
같은 이야기를 들은 명연철도 평정을 잃어 비틀거리며 방을 떠났다.
“축하해요.”
백율운현이 다가와 손을 내밀자, 단태가 맞잡았다.
묘한 쾌감이 몸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와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가 세운 백중파는 유타루체의 지도층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누구도 백중파를 함부로 건들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백중파 뒤에 유천주가 있음을 은근슬쩍 알렸으니, 간이 배밖에 나오지 않고서는 백중파를 위협하지 못하리라.
생각보다 빨리 그 진실을 알린 건, 황제 때문이었다. 제국의 주인이라 하더라도 용과 관련이 있는 조직, 혹은 개인을 섣불리 공격하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설희의 신분이 탄로되더라도 유천주와의 희미한 관계로 인해 극형은 면하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그 결정을 내리는데 적잖은 부분을 차지했다. 실종된 명국영의 안전도 그가 고려한 부분 중 하나였다.
북쪽의 통로를 걸어 밖으로 나온 단태는 볼일을 위해 시청으로 방향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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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우현은 두 장의 노예 문서를 만지작거렸다. 구멍 난 시청 재정을 위해 백만 마전이라는 거금과 맞바꾸기로 결정했지만, 왠지 헐값으로 보물을 넘기는 기분이었다. 백만 마전을 내놓을 수 있다면 천만 마전도 뜯어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야. 과욕은 금물이다.
그랬다가 유천주와 관련이 있는 백중파와 척진다면 시청은 뿌리째 흔들리고 말 것이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다. 일개 폭력조직의 뒤에 용이 있다니. 그러나 백율운현이 직접 유천주를 보았다는 말에 반우현은 할 말을 잃었었다.
격무로 지쳐 몸살로 몸져누운 아버지를 대신하여 시장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그녀는 똑똑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백중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처음 광장에서 악수할 때와 달리 기이한 전율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후, 백중은 본론으로 직행했다.
“노예 문서를 받으러 왔습니다.”
“성격이 급하시네요.”
“가족과 관련된 일이라서요.”
“위연미의 노예 문서는 왜 달라고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깔끔한 게 좋지 않습니까?”
“그도 그렇겠네요.”
반우현은 낡은 문서 두 장을 건넸다.
노예 매매 문서를 받아서 꼼꼼히 확인한 백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으로 접어 품안에 넣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당현추는 어디 있죠?”
“호수 아래 용혈에 있습니다.”
“…….”
백중파가 당현추를 빼돌렸다고 내심 생각했건만, 의외의 대답에 반우현은 당황하고 말았다.
“방단의 수장이자 현 백율가를 이끄는 백율운현도 한동안 용혈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물론 유천주님이 직접 움직이셨습니다.”
“…사실인가요?”
알고 있었음에도 반우현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전에 돌아온 백율청현, 명종태, 유무영 모두 거기 있었으니, 곧 제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될 겁니다.”
이웃과 오늘 날씨가 어떻게 될지 이야기를 하는 듯한 백중의 태도와 달리 반우현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천주가 이런 식으로 도시 내부에 개입을 한다면 시청은 특히 시장은 유명무실한 지위로 전락할 터였다. 누구도 유천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니, 실질적으로 유천주… 혹은 유천주의 뜻을 전하는 자가 시장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질 테니까.
용의 유산을 받았기에 용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깊이 파헤쳤던 반우현은 단 한 번도 용이 도시로 나와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미친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유천주의 성향을 바꾸었을까? 수천 년 동안 변함이 없었던 용족의 방식이 왜 달라졌을까?
저주 때문에?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위대한 존재께서 왜 유타루체에 이토록 관심이 많은지 알고 있습니까?”
반우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도 모릅니다.”
“네?”
“다만, 그 대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게 누구죠?”
“단태.”
“…단태?”
“대략 3년 전쯤에 죽었다고 알려진 설희의 오빠 단태는 유천주님의 대리인으로 유타루체에 들어와 있습니다.”
“…….”
반우현은 머릿속에서 종이 뎅뎅 울리는 것만 같았다. 설희에게 백중 같은 친척이 있으며, 백중파 배후에 용이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려워 겨우 받아들였는데, 죽은 단태가 버젓이 살아 있으며 유천주의 대리인으로 도시에 들어와 있다는 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위연미는 어디 있습니까?”
“심부름 보냈으니, 곧 돌아올 거예요.”
“군강검에는 없던데, 어디로 보낸 겁니까?”
“마둔수탑에요.”
“…혹시 누천파가 불렀습니까?”
“네.”
“이런!”
몸을 벌떡 일으킨 백중은 집무실 밖 복도로 나가려다 몸을 돌려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연 그가 뛰어내리자 반우현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추락하는 백중을 내려다보았다.
팔, 다리를 편 채로 떨어지던 백중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몸이 쏙 들어갈 만큼 커다란 물방울이 백중을 삼켰고, 그 물방울은 지면에 닿아 수직 방향으로 눌려 오그라졌지만 원래 모양으로 회복되었다. 물방울을 터트리고 나온 백중은 마둔수탑이 우뚝 선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봐도 놀랄 만한 속도였다.
“…마, 마법인가?”
곧 반우현은 믿기 어려운 그 광경을 잊고 유천주와 단태라는 새로운 변수가 도시에 미칠 영향력과 변화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청과 마둔수탑의 갈등으로 재판까지 받았던 단태에게 시청은 부정적인 조직으로 비칠 게 뻔했다. 시청의 필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어떻게든 단태의 마음을 이쪽으로 돌려야 한다. 그제야 반우현은 백만 마전에 팔아넘긴 두 장의 노예 문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 문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면 협상에서 비책으로 사용할 수 있을 텐데.
바로 그 때문에 백중이 백만 마전이라는 거금으로 그 문서를 사들인 것이리라.
“가만히 당할 수는 없어.”
반우현은 집무실 밖으로, 백중과 달리 복도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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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위연미는 몽롱한 기분 속으로 파고드는 끔찍한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두질로 부드럽게, 그만큼 강인하게 만든 가죽 끈이 손목을 옥죄며 몸을 공중에 매달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그 가죽 끈의 끝이 천장에 매달려 있으며, 발버둥을 쳐도 달아날 수 없으리라 직감했다.
기억을 더듬었다.
왜 이 축축하고 싸늘한 곳에 매달려 있을까?
몸부림을 쳐봤다. 질긴 가죽 끈은 위연미의 몸을 너끈히 버텨냈다. 그저 허공에서 몸만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꽤 넓은 곳이었다. 나무 상자들이 쌓여 있는 지하 창고 같았다. 마루는 낡았지만 튼튼해 보였다. 위연미는 참혹한 결론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녀의 삶은 고단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했다. 특히 위연미처럼 젊고 아름다운 하녀라면 어떻게든 해보려는 작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반우현의 수행 하녀가 된 이후, 웬만한 사내는 접근할 수 없게 되었지만 위연미는 만약의 사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자물쇠 풀리는 소리.
삐거덕 오래된 경첩 돌아가는 소리.
사람의 무게를 못 이겨 삐걱거리는 바닥의 소리.
위연미는 사람들에게서 칭송을 받는 마둔수탑의 부탑주이자 계승자를 보자마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이 다가와 있었다. 저 사내가 바로 죽음이었다.
그저 강렬한 직감에 불과하지만, 하녀들 사이에 퍼져 있는 괴담의 진원지가 저 남자라고 확신했다. 인적이 드문 좁은 골목으로 다녀야 하는 하녀를 잡아다가 피를 빨고 살을 먹는 악마가 유타루체에 나타났다고 하녀들은 입방아를 찧었다. 실종된 하녀들이 멋진 남자와 함께 도시를 떠났다는 경비대의 수사 결과를 비꼰 것이다.
“왜, 비명을 지르지 않지?”
나긋나긋하면서도 송곳처럼 예리한 목소리가 넓은 창고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