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72화 (272/293)

<-- 272 회: 7-21 -->

위연미는 팔과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침착해야 한다.

이곳에서 죽기 싫다면.

그녀는 마둔수탑의 계승자에 대해 아는 내용을 모조리 떠올렸다. 비춘방이 쓴 <유타루체의 속살>에는 누천파는 물론 누가의 비극이 기록되어 있었다. 누천파가 어떻게 계승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을 기억해내자 위연미가 집중적으로 읽었던 유타루체의 역사 혹은 다양한 기록, 반우현 곁에 있다가 듣게 된 대화 중에서 관련 내용이 이리저리 연결되어 하나의 실체를 이루었다.

위연미는 고개를 들어 사내를 쳐다보았다.

“반우현 님이 가만히 있지 않으실 거예요.”

일단 누천파도 어찌할 수 없는 반우현의 이름에 기대를 걸었다.

“요즘 하녀들이 자주 실종되잖아. 한 명 더 사라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안 그래?”

“…….”

직감이 옳았다.

“널 오랫동안 지켜봤다. 오늘 이 순간을 위해 내가 얼마나 참고 또 참았는지 넌 절대 알 수 없을 걸. 태어나서 이처럼 자제력을 발휘한 적은 없어. 정말이야.”

“누현파 님의 장례식에서도 자제력을 발휘하셨잖아요.”

“…뭐라고 했지?”

누천파는 귀를 의심했다.

“죽은 형 앞에서 눈물 한 번 보이지 않은 동생의 인내심이야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이 계집년이!”

누천파의 손바닥이 위연미의 뺨을 후려갈겼다. 철썩, 따귀 소리가 메아리쳤다.

고개가 한쪽으로 젖혀진 채로 위연미가 말했다.

“형이 사라진 게 얼마나 기뻤으면 눈물을 흘리지 못했을까요?”

누천파는 위연미의 멱살을 잡았다. 이글거리는 눈이 다가와 위연미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어디에선가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 위연미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스멀스멀 피어나는 공포는 그녀가 홀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짙었다.

“반우현 그 잡년이 무슨 말을 한 거지?”

누천파는 오해했다.

“…계승자라는 자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형을 죽음으로 내몰 만큼 매력적이라고 하셨어요.”

위연미는 그 오해를 바로잡을 마음이 없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면, 시간이라도 벌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내, 내가 형을 죽였다?”

“아닌가요?”

“…하하하하.”

누천파는 미친 듯이 웃었다. 이보다 더 웃기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한 사람 같았다. 몸 깊은 곳에서 광소를 끌어낸 그는 갑자기 웃음을 그치며 위연미를 쏘아보았다.

분노로 평정을 잃은 그가 다가온 순간, 위연미는 배에 힘을 주고 기다란 다리를 위로 들어올렸다. 최대한 높이 들린 다리가 아래로 내려오며 퍽퍽, 누천파의 정수리와 어깨를 때렸다. 누천파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뒤로 넘어졌다.

가죽 끈에 매달린 채 출렁거리는 위연미는 소리를 질렀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러나 창고 밖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손목이 끊어져 나갈 듯한 고통에 얼굴을 찡그린 위연미는 쓰러진 누천파의 얼굴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던 피부는… 어느새 쪼그라들었고, 이마와 턱에도 줄이 졌다. 머리카락마저 하얗게 변해 돌아가신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누천파는 천천히 일어섰다.

“꽤 아팠다.”

“…….”

“이자까지 쳐서 갚아줄 테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

누천파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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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마둔수탑 입구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마음 같아서는 출입하는 사람을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하는 저 까칠한 수련사를 날려버리고 위연미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일만 복잡하게 꼬일 터였다. 마둔수탑과 싸우게 된다면, 그동안 힘겹게 쌓아올린 협력 관계는 박살나고 말 터였다.

그에게 위연미는 특별했다. 위연미를 무사히 구해내면 설희의 안전도 보장될 것만 같았다. 근거가 미약한 맹신임을 알지만, 무시할 수 없었다. 긴장으로 어찌나 힘을 줬는지 주머니에 넣은 채로 잡고 있던 수정구가 깨질 것만 같았다.

꽤 시간을 들여 누천파를 끌어내릴 계획을 고민했었다. 백중파가 나서서 마둔수탑을 직접적으로 흔들지 않고, 마둔수탑으로부터 적개심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누천파라는 인간을 조용히 제거하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뇌 끝에 누천파가 써먹었던 방법에서 답을 찾았다. 륜사를 마탑에서 쫓아낸 그 방법이라면 혼란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누천파를 제거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누천파의 아버지, 마둔수탑의 탑주 누마탄이 진실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진실을 외면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누마탄은 현재 수도 용금탄에 있었다.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탑을 이끄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최종 판단을 맡길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이 순간, 단태는 스스로 유보했던 그 계획을 실행하리라 마음먹었다. 사람 목숨을 구하려면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제발 늦지 않았기를, 그는 빌고 또 빌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데, 위로 이어진 계단을 딛고 낯익은 사람이 달려왔다.

창수였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탄면을 벗어 원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던 단태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입구 당번인 수련사와 짧게 이야기를 나눈 창수가 단태에게로 다가왔다.

“…누구시죠?”

의혹과 경계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야, 나. 모르겠어? 단태야.”

엄포윤의 수련사였다가 지난 번 일로 기율옥에 갇혀 고초를 당했지만 무죄가 입증되어 풀려나 대기 중이던 창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단태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입을 쩌억 벌렸다. 눈에 확 띌 만큼 잘 생긴 얼굴에 익숙한 이목구비가 숨어 있었다.

“……정말, 너냐?”

“급한 일이야. 날 탑 안으로 데려가줘. 부탁이야.”

“…알았어.”

창수는 입구를 지키는 수련사에게 이야기를 해서 단태를 통과시켰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는데, 단태는 이미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지 계단을 딛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승강기보다도 빨랐다.

“어딜 가는 거야?”

창수는 급히 단태를 뒤쫓았다.

단태는 근력, 민첩성을 증가시키는 몇 가지 마법을 몸에 걸어 속도를 높였다. 순식간에 20층에 도착한 그는 과거 탑주실이었던 곳으로 달렸다.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여화 누나!”

“누구……?”

“나야, 단태. 그보다 누천파는 어디 있어?”

“…….”

여화의 얼굴에 미심쩍어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가 이내 경악으로 바뀌었다.

단태는 여화를 내버려두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텅 빈 방을 휙 둘러본 그가 밖으로 나오자 이제야 정신을 차린 여화가 다가왔다.

“너, 정말 단태니?”

“누천파는 어디 있어?”

“어떻게 된 거야? 명 선생님이 얼마나 네 걱정을 많이 한 줄 알아?”

“누천파는?”

단태는 여화의 손목을 꽉 잡으며 낮고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재회의 기쁨을 만끽할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그제야 여화도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침 일찍 탑에 마법 재료를 공급하는 약재상 몇 군데 들렀다가 조금 전에 돌아왔어. 그래서 부탑주님은 못 봤는데. 무슨 일이야?”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단태는 즉시 바람의 정령을 불러내어 누천파를, 위연미를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비천단령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탑을 훑기 시작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놀랐지만 여화는 단태가 바람의 정령을 소환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실내에 기이한 감촉의 바람이 분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창수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두 사람에게 설명할 여유가 없었던 단태는 다시 계단으로 내려가며 비천단령이 누천파를 찾지 않았을까 살펴보았다. 20층, 19층, 18층…… 모두 허탕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누천파가 죽음의 마법을 익혔음을 알았는데도 마둔수탑을 건드리면 상황이 복잡해진다는 이유 때문에 그저 멀리서 지켜봤을 뿐 지금까지 내버려둔 결정을 후회했다.

그때, 누천파가 어디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수백 명의 마법사, 수련사, 종자들이 북적거리는 이 탑에서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는 조용한 장소가 필요하다면… 지하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 종자로 생활을 했었기에 떠오른 직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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