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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비천단령들을 지하로 보낸 단태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주머니에 넣어둔 수정구를 꺼내 마력을 주입하고 근엄한 얼굴을 떠올렸다. 단태가 지하로 들어설 무렵, 진동하던 수정구가 조용해지며 점잖게 늙어가는 마법사가 나타났다.
“허가 받지 않은 수정구를 사용하다니, 그대는 누군가?”
누마탄이 물었다.
“이곳은 유타루체의 마둔수탑입니다. 계승자 누천파에 대해 전할 말씀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단태는 상대가 연결을 끊지 않기를 바랐다. 그때, 비천단령 중 하나가 누천파, 위연미가 있는 창고의 위치를 알려왔다.
“그대가 누구냐고 물었다.”
“저는 부탑주 륜사의 종자이자, 이곳의 종자장이었던 단태입니다.”
“…….”
조그만 수정구의 표면을 통해서도 누마탄의 복잡한 심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시간이 없더라도 만드셔야 할 겁니다. 지금부터 보고 듣게 될 광경을 놓치면 평생 후회하실 테니까요. 어쩌면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리는 속도 그대로 어깨로 창고의 문을 박살낸 단태는 입구 왼쪽에 쌓인 나무 상자 위에 수정구를 내려놓은 다음, 허공에 매달린 위연미의 허벅지를 물어뜯고 피를 마시는 누천파에게로 돌진했다. 깜짝 놀란 누천파가 뒤로 물러서기도 전에, 단태는 무릎으로 피로 얼룩진 누천파의 입을 강타했다. 입술이 찢어졌고 앞니가 부러졌다.
누천파는 늑대처럼 울부짖으며 단태에게 달려들었다. 옆으로 피해버린 단태는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누천파를 두들겼다. 복부, 가슴, 어깨, 허벅지, 무릎 그리고 발목까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을 난타했다. 몽둥이 찜질에 당한 개가 낑낑거리며 구석으로 피하는 것처럼 누천파는 물러섰다. 싸워서 이길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단태의 지시에 비천단령이 반쯤 의식을 잃은 위연미를 묶은 가죽 끈을 잘랐다. 바닥에 부딪혀 다치지 않도록 위연미를 안아서 눕힌 그는 속도를 높여 눈치를 보다가 살금살금 달아나려는 누천파 앞을 가로막았다. 노화로 추해진 얼굴을 드러낸 그는 사납게 으르렁거렸지만 덤비지는 않았다.
“…누구냐?”
“왜 이렇게 됐지? 내가 아는 누천파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마탑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 하는 사람이었는데. 왜 죽음의 마법에 손을 댄 거지? 왜 그런 거지?”
몸을 흠칫 떤 누천파는 그제야 마법으로 노화를 숨겼다. 귀공자 분위기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긴장한 늑대처럼 구부정했던 등이 펴지자 훤칠한 사내의 모습이 돌아왔다.
“누구냐고 물었다.”
“단태.”
“…단태?”
눈살을 찌푸리며 그 이름과 관련된 기억을 더듬던 누천파는 저 매끈한 놈에게서 재수 없는 륜사의 종자 얼굴을 발견했다. 3년 전쯤 유천주가 도시로 날아와 깽판을 쳤을 때, 죽었다고 알려진 그 종자 놈이었다! 분노가 맹렬한 화염처럼 치솟았다.
감히!
“엄포윤의 죽음도 당신 솜씨지?”
단태가 물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여긴 마둔수탑이야. 난 이 탑의 부탑주고. 죽음의 마법이라니! 말도 안 돼. 엄포윤은 우연히 골동품상에서 발견한 망려환을……”
단태는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움직였다. 단숨에 거리를 줄여 누천파 앞에 다다른 그는 놀란 누천파의 오른손을 잡고 손가락 두 개를 비틀어 거기 있던 거무스름한 반지 두 개를 빼냈다. 누천파가 정신을 차렸을 때, 단태는 이미 원래 서 있던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것 말이지? 한데, 왜 두 개일까?”
한 쌍의 망려환이 단태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누천파는 두 손을 뻗어 패혈운을 쏟아냈다. 시커먼 구름이 단태를 향해 몰려왔다. 검은 안개는 크게 원을 그리며 단태와 누워 있는 위연미를 향해 범위를 좁혔다. 패혈운에 닿은 낡은 바닥이 녹아내려, 버팀목과 가로대가 어둠을 배경으로 얽히고설킨 아래쪽의 구조물이 드러났다. 그 때문에 단태가 딛고 선 마루가 거세게 흔들렸다.
우지끈, 버팀목이 부러졌다.
누천파는 무너진 마루 위로 패혈운을 덮어버렸다. 머리카락 하나,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을 심산이었다. 패혈운에 닿아도 녹지 않는 망려환은 나중에 내려가서 찾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패혈운은 사납게 웅웅 소리를 내는 풍갑을 에워쌀 뿐 뚫지 못하고 있었다. 맹렬하게 회전하는 풍갑은 허공에 둥실 떠 있었고, 그 안에 위연미를 두 팔로 안은 단태가 서 있었다.
“어, 어떻게……?”
누천파는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창수와 여화를 비롯해 마둔수탑의 마법사들이 부서진 창고의 입구로 몰려들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재빨리 패혈운을 회수한 누천파는 악을 쓰기 시작했다.
“저 놈을 잡아! 어서! 죽음의 마법사야! 잡으라니까!”
“…….”
아무도 누천파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기율실장 유조침이었다. 손에 마쇄를 든 그는 누천파 앞에 섰다.
“저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뭐?”
누천파는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탑주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타, 탑주님? 아버지로부터?”
“그렇습니다.”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유조침의 대답에 누천파는 고개를 홱 돌려 단태를 찾았다.
어느새 바닥이 무너진 구덩이에서 벗어나 입구 근처의 마루바닥으로 이동한 단태는 창고 안으로 들어설 때 나무 상자에 올려둔 수정구를 집어 들어 누천파를 향해 흔들고 있었다.
누천파는 그 수정구의 표면에 자신이 그토록 비난하면서도 무서워했던 아버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전전긍긍하며 숨기려 했던 진실이 탄로나고 말았다!
그런데 왜 이리 속이 후련할까?
족쇄에서 풀린 기분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조침이 다가와 마쇄를 채웠다. 기율실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여 끌려가기 직전, 몸을 비틀어 자기 뜻을 드러낸 누천파는 단태 앞에 서서 속삭였다.
“이게 끝일까?”
“…….”
단태는 히죽 웃는 누천파를 쳐다봤다. 마둔수탑과 갈등을 빚더라도 저자를 죽여 없애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근거가 없기에 지워버렸건만.
왠지 실수를 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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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문서를 불태움으로써 자유로워진 위연미는 단태의 안내를 받아 백중파 곳곳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상상조차 뛰어넘는 백중파의 규모, 산하에 갖춰진 다양한 조직들, 한눈에 봐도 뛰어난 인물들이 한결같이 보여주는 백중파를 향한 충성심은 <무무비경>, <역사> 등 뛰어난 고전을 곱씹음으로 얻은 그녀의 잔잔한 마음까지 뒤흔들기 충분했다.
“여긴, 소학당이야.”
단태는 무지개 형태의 문으로 위연미를 안내했다.
뜰 중앙에 우뚝 선 한 마리 말이 위연미의 눈길을 끌었다. 청동을 부어서 만든 그 말은 앞발을 치켜든 채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만 같았다. 아이들이 저 말처럼 뛰어난 기상을 지니기 바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단태의 설명도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위연미는 그 말 청동상에 빠져들었다.
정신을 차린 위연미는 단태를 쳐다보았다.
“너도 백중파의 일원이야?”
“음, 가깝다고 할 수 있어.”
“날 왜 여기로 데려온 건데?”
“그냥 따라오기나 해.”
단태는 웃으며 그녀를 소학당 이층으로 데려갔다. 글을 읽는 아이들의 소리가 복도로 흘러나왔다.
“소문을 듣기는 했어. 여기, 공짜로 글을 알려준다면서? 진짜야?”
“당연하지.”
자부심 넘치는 말투로 대답한 단태는 위연미를 소학당 안쪽으로 이끌었다. 맑고 활력이 넘치는 아이들의 목소리와는 다른, 거칠고 묵직하면서도 삶의 연륜이 묻어나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