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74화 (274/293)

<-- 274 회: 7-23 -->

“여기서 기다려.”

단태는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위연미는 일부러 어깨를 폈다. 단태를 만난 이후,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던 것이다. 반우현 앞에서도 공손할 뿐 기가 죽지 않았는데, 단태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때, 단태가 낯이 익은 여자와 함께 다가왔다.

위연미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손이 떨렸다.

“…엄마?”

“……연미, 맞지?”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들을 보며 콧날이 시큰해진 단태는 자리를 피했다. 두 사람이 마음껏 회포를 풀 시간을 준 것이다. 모퉁이를 돌면서 언젠가 자신에게도 저런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위연미는 4년 만에 재회한 엄마에게서 언니의 죽음을 들었다. 유곽에 팔린 언니는… 삶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엄마도 단태를 통해 그 사실을 들은 모양인 듯 아직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런 엄마가 소학당으로 와서 글을 배운 건, 두 번 다시 글을 읽지 못한다는 이유로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글을 몰랐기에 자신은 물론 두 딸까지 노예로 넘긴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분 덕분이야. 그분이 날 구해주셨어. 백중 어르신이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지도 몰라.”

“…나도 그래.”

위연미는 단태를 통해 백중파를 이끄는 사람이 반우현으로부터 노예 문서를 사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학당 근처에 마련된 집으로 함께 간 위연미는 엄마가 해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뒤에야 밖에서 기다리는 단태를 발견했다.

“어려운 부탁이 있어.”

“뭔데?”

“엄마와 날 구해준 그분을 만나고 싶어.”

“…그래?”

“들어줄 수 있어?”

“따라와.”

“지금?”

“그래, 지금.”

단태의 얼굴이 깃든 필요 이상의 긴장감을 눈치 챘지만 위연미는 그 이유를 몰랐고, 당장은 관심이 없었다. 백중파를 이끄는 기적 같은 사내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까닭이다. 황제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을 뿐 아니라, 단신으로 만든 조직을 기반으로 12인위원회의 일원이 된 백중은 가히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상아별로 중앙 광장으로 들어선 위연미는 단태로부터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

광장을 둘러보는데, 점잖고 예의 바르나 힘을 숨긴 사내가 다가왔다.

“아가씨가 위연미 씨 맞습니까?”

“…그런데요.”

“파주께서 부르십니다.”

“…….”

위연미는 깜짝 놀랐다. 이토록 빨리 만날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당황한 얼굴로 그 남자를 따라갔는데, 그녀를 향한 시선이 제법 따가웠다. 술렁이는 분위기를 뚫고 위로 올라가 단단하나 수수한 형태의 문 앞에 섰다. 그 사내가 문을 두드렸다.

“위연미 씨를 모셔왔습니다.”

“들여보내.”

그 말에 사내는 문을 열었고, 위연미는 떠밀리듯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은 뒤에서 닫혔다.

휘장이 쳐진 창가에 선 사내의 등을 볼 수 있었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 사람이… 백중파라는 조직으로 유타루체를 바꿔놓은 장본인이었다. 그런 사람과 한 방에 같이 있다니! 소문의 내용이 절반만 맞다고 해도 백중은 <무무비경>이 말하는 군왕에 어울리는 인물이리라.

사내가 돌아섰다.

평범한 얼굴에 깃든 위엄은… 범상치 않았다.

“먼저 사과드립니다.”

“…사과라니요?”

“깜짝 놀라게 될 테니까요.”

“……네?”

고개를 갸웃거린 위연미는 백중이라는 사내가 얼굴을 뜯어내는 장면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 기이한 막이 떨어져 나가자,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놀랐지?”

“…….”

다리에 힘이 풀린 위연미는 주저앉았다.

단태는 다시 탄면으로 얼굴을 바꾸었다. 백중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는 위연미를 일으켜 세웠다.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 믿기 어려울 것 같아서.”

“…저, 정말, 너야?”

“다시 한 번 보여줘?”

“…아, 아니.”

위연미는 겨우 의자에 앉았다. 풀린 몸이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흘러내릴까 걱정스러웠다.

단태는 기다렸다. 인내는 그에게 익숙한 덕목이었다. 그보다 내면의 충동과의 싸움에 능숙한 사람은 없으리라.

위연미는 예상보다 일찍 평정을 되찾았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단태는 적잖이 놀랐다. 위연미의 정신이 지닌 회복력은 가히 감탄스러웠다. 그녀라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세상이 날 노예라고 판단해도, 스스로는 노예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기에 나름대로 제법 괜찮은 인물이라고 자처할 수 있었는데, 왜 네 앞에서는 기가 죽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어떻게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는지는 묻지 않을게. 중요한 건, 왜 내게 네 비밀을 알려주는지, 바로 그 점이니까.”

단태는 박수를 칠 뻔했다. 그가 4년 동안 성장한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위연미 역시 달라져 있었다.

“부탁 때문이야.”

“…부탁?”

위연미는 믿기 어려웠다. 명령 하나면 수만 명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텐데, 이제 막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힘없는 여자에게 할 부탁이 그에게 있을까?

“설희에게 가줘.”

“…….”

“어려운 부탁이란 거, 알아. 거절해도 돼. 거절할 수 없다면, 그건 부탁이 아니니까.”

“…이유를 알려줄 수 있어?”

“황제는 내가 누군지 조사하고 있어. 오래지 않아 설희와 나의 관계는 물론 과거까지 황제의 귀에 들어갈 거야. 진실을 알면 황제는 설희를 가만 두지 않겠지. 난 믿을 만한 사람이 설희 곁에 있기를 원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인물은 너 뿐이고.”

“그래?”

위연미는 그 말에 뛸 듯이 기뻤다. 백중파를 이끄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다니.

“위험한 일이야. 적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황제는 나를, 백중파를, 그리고 유타루체를 없애기로 결정한 모양이야.”

“…무슨 말이야?”

“적지 않은 병사들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어. 은밀하게 말이야. 아직은 그 움직임을 포착하기 어려워 병력의 규모를 예상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10만은 넘을 거야. 용금탄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염상 근처의 들판에 근위기사단과 함께 머무는 이유도 군대 때문일 거야.”

“구, 군대가 유타루체를 공격한다고? 그게 말이 돼?”

단태는 황제가 왜 백중파를 없애려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위연미라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과연 위연미는 빠르게 백중파의 파급력을 알아차렸고, 황제가 그럴 수밖에 없음 또한 납득했다. 상황을 파악한 그녀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단태의 요구는 위연미의 생각을 뛰어넘었다. 단태는 위연미가 하녀로서 설희에게 가주기를 원한 게 아니었다. 설희의 하녀로 위장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염탐꾼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난 평범한 하녀였어. 내가 거기 가서 뭘 할 수 있겠어?”

“반우현이 널 신뢰해서 일을 맡겼다는 걸 알아.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일이 잘못되면, 유타루체는 잿더미가 될 거야. 나와 관련이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죽어. 황제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죽여 버릴 테니까. 이건 너 자신을 위한, 이제 막 찾은 네 어머니를 위한 일이기도 해.”

“…….”

“여전히 이건 부탁이야. 싫으면 안 해도 돼. 생각을 여유를 하루 밖에 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일까지는 어느 쪽이든 알려줘. 그래야 나도 계획을 세울 수 있으니까.”

“…알았어.”

백중거 밖으로 나온 위연미는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걸었다. 엄마와의 재회가 주는 기쁨은 이미 사라졌다. 쫓아오는 여우에게서 겨우 벗어난 토끼가 늑대 무리에 둘러싸인 것처럼, 그녀는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리고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꽉 막혀오는 그런 상황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단태의 태도가 그녀에겐 불가사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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