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75화 (275/293)

<-- 275 회: 7-24 -->

단태는 그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어떤 조건, 환경이 그를 이토록 단단하게 만들었을까? 그 어떤 사람도 감히 예측할 수 없는 시련, 고통, 절망이 그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으리라.

어느새 위연미는 소학당 앞에 와 있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글을 배우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중파 덕분에 많은 이들이 혜택을 보고 있었다. 소학당은 단적인 예에 지나지 않았다. 백중파가 지원하는 병원은 적은 액수만 받고 치료를 해주었다.

소학당을 올려다보면서 위연미는 결정을 내렸다. 노예로 전락한 건, 그녀의 의지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스스로 위험천만한 임무를 받아들였다. 백중파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을 위해서, 엄마를 위해서, 그리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지만, 오늘 만난 엄마에게 이 사정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그때, 위연미는 단태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설희는… 그의 동생이었다. 오빠로서 당당히 나설 수 없기에 멀리서 지켜봤을 그 마음은 어땠을까? 단태는 설희 앞에 나설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리라.

“엄마도 날 이해하실 거야.”

위연미는 딸을 기다리고 있을 엄마를 만나러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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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에서 위연미를 배웅한 단태는 그 길로 마둔수탑으로 향했다. 할 일이 있어서였다. 오랜만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선착장에 기다리던 나룻배에 올랐다. 그를 본 늙은 사공이 껄껄 웃었다.

“또 보는구먼.”

“아, 만추 어르신이군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구먼.”

사공은 깜짝 놀라 단태를 쳐다보았다. 잘 생긴 청년이어서 금세 기억이 났는데, 상대방도 이름을 잊지 않았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단태입니다.”

“어딜 가는 겐가?”

“마둔수탑으로 가니까 입구까지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툭툭 힘줄이 불거진 팔로 단단한 노를 저어 배를 앞으로 밀어내는 사공에게서 시선을 옮긴 단태는 좌우로 지나가는 건물, 그 사이의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노는 아이들,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을 쳐다보았다. 유타루체를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늘어난 덕분에 도시는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어이쿠, 또 저 녀석들이군.”

사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단태는 운하 가운데를 통나무로 막고 통행세를 받은 후에야 배를 통과시키는 사내들을 발견했다. 사공들의 동업조합인 선도단에서 나온 패거리였다. 그들은 시청의 허락을 받아 운하 통과세를 거두었는데, 그들에게 돌아갈 몫을 확보하느라 세금의 두 배나 돈을 강탈하고 있었다.

늙은 사공을 대신하여 통행세를 낸 단태를 눈여겨 본 사내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더 내라는 뜻이었다.

“…뭐죠?”

“통행세가 올랐어.”

“…….”

“싫으면 멀리 돌아가 가던가?”

“얼마입니까?”

사내는 단태가 낸 돈의 열 배를 요구했다.

“경비대를 부르겠습니다.”

“그래? 맘대로 해.”

사내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경비대와 암묵적으로 이야기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한 시라도 빨리 마둔수탑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에 단태는 그 돈을 치렀고, 사공은 미안한 표정으로 있는 힘껏 배를 몰았다.

“저놈들, 안 건드리는 게 좋아. 백중파 놈들이거든.”

“…백중파라구요?”

“없이 살던 놈이 위로 올라가면 더 한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은 게지. 백중파 때문에 이 짓도 못해먹겠어.”

“그 정도입니까?”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나?”

“…….”

단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중파가 다양한 동업조합의 요직을 차지하고 권력을 남용한다는 소문을 듣긴 했으나 이렇게 엉망일 줄은 몰랐다. 그럼에도 백중거로 달려가고픈 마음을 억눌렀다. 일중에게 백중파를 맡겼으니 이 문제도 그가 처리하도록 기다릴 생각이었다.

마둔수탑 근처 선착장에 도착한 사공에게 두둑한 삯을 지급한 단태는 어깨를 펴고 광장으로 올라섰다. 벌써 몇 번이나 와봤지만 매번 다른 기분이었다. 오늘은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걷고 싶었다. 분수대를 스치듯 지나간 그는 마둔수탑의 입구를 통과했다. 단태를 알아본 수련사 덕분이었다.

주위가 고요해졌다.

오가던 사람들은 단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계단을 딛고 천천히 올라갔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귀로 흘러들었다. 누천파를 기율옥으로 보내버린 사람이라느니, 3년 만에 굉장한 마법사가 되어 돌아왔다느니 단태와 관련된 소문이 주를 이루었다. 단태와 백중파의 관련성을 언급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20층으로 올라온 단태는 따라오는 사람들의 수를 귀로 알 수 있었다. 수백 명이 계단을 채우고 올라오는 중이었다. 눈과 귀는 많을수록 좋은 법. 일부러 느릿느릿 부탑주실로 걸어갔다.

반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너, 너는?”

배망식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종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태에게 얻어맞아 정신까지 잃었던 그는 당고의 부름을 받아 용금탄의 마둔수탑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수련사를 거쳐 타마가 되었다. 누천파가 기율옥에 갇히는 바람에 자연스레 부탑주실을 차지한 당고의 보주관은 돈덕실이지만, 돈덕실이 자리를 비울 때면 배망식이 부탑주실 앞을 지켰던 것이다.

“당고 님은 계시지?”

“…뭐, 뭘 하는 거야?”

문을 열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배망식의 손길을 부드럽게 피한 단태는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기다란 의자에 허연 몸과 구릿빛 몸이 얽혀 있었다.

배망식만큼이나 당황한 단태는 문을 닫을 생각 자체를 못했고, 그 때문에 단태를 따라서 올라온 사람들 중 다수가 그 장면을 보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배망식이 단태를 앞으로 밀고 들어가 안쪽에서 문을 닫았지만, 이미 늦었다.

당고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급히 옷을 챙겨 입었다. 몸이 건장한 노예는 이미 옷을 챙겨 옆으로 비켜섰다.

“아, 실례했습니다.”

단태는 웃으며 말했다.

“…뭐냐?”

“약속을 지키려 왔지요.”

“약속?”

“원래는 십년 후에 보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요.”

“…뭐라구?”

그제야 당고는 단태가 말한 약속이 무엇인지 깨닫고 안 그래도 수치와 분노로 달아오른 얼굴이 터질 듯 일그러졌다. 륜사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을 때, 저 건방진 종자 녀석이 살려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당고의 삶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직접 복수하겠다는 꼬맹이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자존심에 남긴 깊은 상처는… 아직도 아팠다. 안 그래도 기회를 봐서 처리하려고 했건만.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죽여 버리겠다.”

당고는 소매 자락을 날리며 다가왔지만, 히죽 웃은 단태가 뒤로 물러나며 문을 열어버리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당고에게로 쏟아졌던 것이다.

“광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당당하게 인사를 한 단태가 나가자 사람들은 둘로 나누어졌다. 미리 언질을 받은 창수가 떠든 덕분에 마법사, 수련사, 종자 들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다. 멀어지는 단태를 쫓았던 그들의 눈은 이제 당고에게로 모여들었다. 당고로서는 발을 뺄 수가 없었다.

“흥.”

당고는 독한 마음을 품고 승강기로 걸어갔다. 마법으로 구경꾼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싶지만, 오히려 생각을 바꾸었다. 비록 종자에 불과하지만 혼자 힘으로 누천파의 정체를 밝혀낸 단태를 공식적인 자리에서 무참하게 꺾어버린다면 아무도 없는 마둔수탑의 부탑주 자리를 어부지리로 차지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

소문이 퍼져 광장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원형의 공간을 둘러싸고 있었다. 단태는 그 공간 중앙에 서서 다가오는 당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고는 사람 죽이기에 좋은 날씨라고 생각했다.

“세 번의 공격을 받아주마.”

선배로서, 용마로서 베푸는 마지막 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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