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77화 (277/293)

<-- 277 회: 7-26 -->

“말씀하십시오.”

“…자네는 두 번이나 나를 놀라게 했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네 뒤에 유천주가 있다면서?”

“모르시는 게 없으십니다, 탑주.”

“…정말인가?”

“3년 전에 유천주 님의 발톱 사이에 낀 채로 유타루체를 떠났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절 마둔수탑의 용마로 인정하신다면 딱히 뭘 할 생각은 없습니다.”

“인정할 수 없다면?”

“유천주 님이 움직이시겠지요.”

“…….”

“뭐, 협박은 아닙니다.”

단태는 쾌감을 느꼈다. 종자 시절에는 우러러보기도 어려운 높이에 있던 사람이었다.

“알겠네.”

누마탄은 결단이 빠른 사람이었다.

“감사합니다.”

연결을 끊은 단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백중파를 향한 외부의 위협이 사라진 상황에서 백중의 비중을 줄이고, 단태로서의 삶을 시작한 건 철저히 계획에 의한 행동이었다. 누명은 백율운현 덕분에 이미 벗었다. 단태로서의 삶을 회복한다면, 엄마와 설희를…… 마음껏 만날 수 있으리라.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단태는 창수를 발견했다.

“무슨 일이야?”

“어떤 분이 널, 아니 용마님을 찾으십니다.”

창수는 즉시 말투를 고쳤다.

그 변화에 단태는 서글펐다. 또한 마음 한쪽이 텅 빈 느낌이었다. 마둔수탑을 장악하려면 창수와 격 없이 지내면 곤란하다. 과거의 단태, 체구가 조그만 종자로서의 그를 아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불 보듯 뻔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잃어야 하는 법인가보다.

입구로 내려간 단태는 얼어붙었다.

거기… 엄마가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단태는 엄마를 향해 뛰었다.

이 순간만큼은 결존계니, 백중파니, 마둔수탑이니 따위를 다 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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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탄주는 숨을 헐떡거렸다.

겨우 방어마법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천륜방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사혈지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탑 지하 7층까지 내려오면서 다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느릿느릿 생기를 품은 대상을 찾아서 영원히 돌아다니는 시체들은 무섭지 않았다. 불쑥 나타나 죽음의 마법을 펼치는 말라깽이 마법사들도 뼈를 적당히 쪼개면 귀찮게 하지 않는다.

문제는 무인이라 불리는 인간들이었다.

몸이 완전한 상태였다면 빠르고 지독하게 끈질긴 놈들을 가볍게 밟아줄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몇 명을 상대했다가 수십 명이 에워싸는 바람에 죽을 뻔한 이후, 암탄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돌파를 감행했고, 여기저기 다치긴 했지만 드디어 천륜방에 들어선 것이다.

시간은 세상을 갉아먹는다.

무려 1200여 년 전에 이곳이 왔었다. 인간이 어처구니없는 짓으로 만들어낸 죽음의 땅이 확장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려고 모인 용들 중에서 암탄주는 가장 어렸다. 곁에서 지켜봤다. 용들이 어떻게 사혈지라 불리게 된 땅에 죽음의 기운을 가둬놓았는지를.

이제 그 기운을 풀어놓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일단 장벽이 무너지면 사혈지로 들어왔다가 갇혀버린 ‘것’들이 일제히 뛰쳐나갈 것이다. 그것들은 세상을 사혈지 입구에 자리 잡은 마을 망단처럼 만들어버릴 것이다. 법이 없는 세상, 자연스레 무법이 판을 치는 세상, 강자가 약자를 집어삼키는 세상에서 인간은 고통과 무기력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물론 사혈지의 개방으로 인간은 파멸하지 않을 것이다. 사혈지는…… 징조에 불과했다.

흐릿해지는 기억을 더듬어 천륜방의 해제 방법을 떠올린 암탄주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실수하지 않도록 애를 쓰며 광범위 마법 방어진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꼬박 사흘이 걸린 후에야 대지가 흔들리며 울음을 토해냈다. 쿠쿠쿵 진동과 함께 탑에서 뻗어나가던 거대한 기운이 끊겼다.

변화는 즉각적이었다.

높은 장벽은… 와르르 무너졌다. 1200여 년이나 지탱하느라 노화된 부분을 마법진이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 굉음에 망반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차렸지만, 해일처럼 밀려오는 망인들의 돌진에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시체들이 망반을 덮쳤다.

1200 년이나 굶주린 망인들이 조그만 마을에 만족할 리는 없다.

망인들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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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구운 금룡어 한 마리가 커다란 상 중앙에 떡 자리 잡았고, 주위로 먹음직스런 요리가 둘러싸고 있었다. 금룡어라면 질리도록 먹었지만 단태는 어머니가 직접 차린 밥상을 쳐다보며 침을 삼켰다. 이렇게 배가 고픈지 미처 몰랐었다. 사흘은 굶은 사람처럼 상을 비운 후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맛있어.”

“더 줄까?”

“아니. 배 터질 것 같아.”

단태는 볼록 튀어나온 배를 두드렸다.

과일, 따뜻한 차가 화과자와 함께 나왔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사과를 깎고, 향이 좋은 차를 따라주었다.

“…널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구나.”

“울지 마.”

“그래, 안 울어야지. 이렇게 기쁜 날, 울긴 왜 울어.”

어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애써 웃었지만, 설희 생각에 눈물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나 잘 아는 단태는 설희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어머니의 손에서 반쯤 껍질이 깎인 사과가 툭 떨어져 단태 앞으로 굴러왔다. 단태는 가볍고 예리한 바람으로 단번에 사과 껍질을 벗겨냈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솜씨에 감탄할 여유가 없었다.

“…정말 폐하 곁에 있는 그 공녀님이 설희란 말이니?”

“걱정 마. 설희는 잘 있으니까.”

“나, 난 그것도 모르고.”

어머니는 또 울었다.

단태는 소화도 식힐 겸 어머니를 방에 두고 밖으로 나왔다. 술과 분 냄새로 진동하는 평소의 취영루와 달리 오늘은… 고즈넉했다. 모자를 위해 오늘은 손님을 받지 않기로 한 것이다.

운하를 내려다볼 수 있는 뒤뜰은 또 다른 정취가 배어 있었다. 추위를 무서워하지 않는 푸르른 잎사귀를 힘차게 달고 있는 나무들 덕분이었다. 기암괴석 사이에 자리 잡은 그 강인한 나무들은 다가오는 겨울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온천 덕분이에요.”

단태는 천천히 몸을 돌려 조그만 샘 곁에 있다가 다가오는 소영을 쳐다보았다.

“그렇습니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물이 가진 힘이 이곳을 지켜주고 있으니까요.”

“그동안 어머니를 돌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단태는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처음엔 그랬지만, 지금은 오히려 언니가 도움을 주고 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단 사흘 만에 유타루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됐어요.”

“그런가요?”

“당신을 보러 이곳으로 어떤 사람들이 찾아왔는지, 직접 보세요.”

소영은 손으로 뒤뜰로 들어서는 오솔길을 가리켰다. 도시의 계승자 반우현, 백율가의 실질적 지도자 백율운현을 비롯해 유력 가문의 가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다시 만났네.”

반우현은 일부러 반가운 척했다. 3년 전 세관국장 평굉의 저택에서 열린 연회에 함께 갔을 때처럼 격의 없이 대했으나, 단태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시장이 소리 마법사를 고용하여 일부러 도시를 망가뜨리려 한다는 진실을 알고서도 반우현은 뒤로 물러섰던 것이다.

“우린 구면이지?”

백율운현이 반우현을 가로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고의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오해야, 오해. 난 아무것도 몰랐어.”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백율운현은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단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소영이 마련한 커다란 방으로 들어선 단태는 기다란 탁자 양쪽에 자리를 잡은 권력자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절대 권력이라 할 수 있는 유천주가 왜 단태라는 대리인을 도시로 보냈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급히 이곳으로 찾아왔다. 이들을 움직인 건, 가문 대대로 누렸던 특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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