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79화 (279/293)

<-- 279 회: 7-28 -->

“…정말 유천주님께서 유타루체의 수호룡이 되신다고 하셨습니까?”

반우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믿기지 않습니까?”

단태는 빙긋 웃었다.

“…그, 그런 전례가 없으니까요.”

대답이 궁색하다는 건, 반우현이 더 잘 알았다.

“전례가 없으면, 만들면 됩니다.”

“…….”

두려움도, 불안도 느껴지지 않는 단태의 표정과 태도에서 반우현은 깊은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아직도 눈앞의 사내에게서 그 작고 허약한 종자를 볼 수 있었다.

이 자의 힘은… 이 호수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을 용에게 있었다. 그 용만 사라진다면 당장이라도 짓밟아 버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속마음을 드러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반우현은 몰랐다. 단태의 눈이 얼마나 예리한가를.

심장 박동, 눈동자의 떨림, 손가락에서 시작해서 손목과 팔뚝으로 이어지는 긴장감, 미세한 호흡의 변화 등 반우현 자신도 알 수 없는 것들을 단태는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반우현은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촌 형님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설희 때문에 찾으러 갔는데 일언지하에 모른다고 하셨더군요.”

“그때는……”

“형님은 그 일을 잊지 않으실 겁니다. 겉으로는 성품도 좋아 보이지만 한 번 마음에 각인된 건 가볍게 넘기지 않는 분이거든요.”

“무슨 뜻이죠?”

“계승자라고 해서 당연히 시장 자리에 오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당신에게 좋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단태는 몸을 돌려 호수를 향해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그 행동에 노발대발 화가 난 반우현은 물론 나머지 사람들은 깜짝 놀라 단태 쪽으로 다가왔다.

그때, 유천주가 수면을 뚫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하늘로 올라갔다가 흩어지며 떨어졌는데, 그 중 일부가 비처럼 대마선 위를 뿌렸다.

겁을 집어먹은 사람들은 단태를 따라 무릎을 꿇고 조아렸다. 단태의 동작이 그들에겐 따라야 할, 지켜야 할 모범으로 보였다. 삽시간에 배에 탄 사람들이 엎드리자 서 있던 반우현, 백율운현 등도 주위를 살피며 몸을 숙였다. 괜히 서 있다가 유천주의 분노를 살 필요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자세로 단태는 마법을 펼쳤다.

‘대천성’이었다.

위엄이 깃든 묵직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전성을 용족 특유의 방식으로 응용한 대천성은 마치 귀 바로 옆에서 천둥이 터지는 듯한 충격을 사람들에게 가했다. 담이 약한 요리사와 하녀 몇 명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렸고, 나머지도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나 유천주는 그대들 인간을 위하여 호수를 개방하였노라. 그러니 그대들은 나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라.”

대천성으로 천둥처럼 말한 단태는 자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엎드린 채 소리쳤다. 대부분, 이 굉음 같은 목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공포를 이기고 고개를 들어 거대한 날개를 휘저으며 하늘에 떠 있는 용을 쳐다본 건, 반우현뿐이었다. 시야의 절반을 차지한 거대한 용을 본 순간, 가슴 안쪽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가문 대대로 맡은 시장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유천주는… 단호한 결심조차 부질없게 만드는 존재였다. 날갯짓으로 생긴 바람에 대마선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대들이 나를 존중한다면 나 역시 그대들을 존중할 것이다. 그대들이 나를 무시한다면 나 역시 그대들을 무시하고 이 땅에서 몰아낼 것이다. 그대들의 행동에 그대들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잊지 마라. 앞으로 나는 대리인을 통하여 그대들에게 나의 뜻을 전할 것이다. 나의 말이 곧 대리인의 말임을 명심하여라.”

“알겠습니다!”

있는 힘껏 외치는 사람들.

“그대들을 지켜보겠노라.”

무룡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대마선 상공에서 떠 있다가 단태의 지시를 받고 다시 호수 아래로 잠수했다.

그 출렁임에 대마선이 침몰할 듯 기울었다. 돛대 꼭대기 망대에 있던 뱃사람이 호수로 추락했다. 갑판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뒤로 미끄러졌고, 탁자 위에 올려놓은 산해진미는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무게 중심을 뒤로 옮긴 단태는 손을 뻗어 ‘탄양극수’를 펼쳤다.

거대한 물기둥이 회오리를 치며 올라와 대마선의 측면을 밀었다. 삐거덕 대마선을 이루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신음을 흘렸으나 배는 쪼개지지 않았다.

죽었다가 되살아난 사람들이 환호했다.

숨을 헐떡이면서, 단태는 속으로 생각했다.

‘못된 용 같으니라고. 감히 장난을 쳐?’

분노보다는 어이없음에 가까웠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용 주제에 놀아주지 않는다고 주인의 신발을 물어다가 땅에 파묻는 개처럼 행동하다니.

사람들은 의심을 던져버렸다.

호수는 이제 안전했다.

단태는 달라진 분위기를 느꼈다.

그와 동시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다가오기는커녕 이쪽을 쳐다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마치 몸이 투명해져서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 오만한 반우현도, 기회만 생기면 말을 걸어 어떻게든 이익을 보려고 했던 백율운현도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유천주의 등장이 그만큼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유타루체를 위해서, 백중파를 위해서, 어머니와 설희를 위해서는 이보다 더 좋은 결과는 없겠지만, 단태는… 마음이 무거웠다. 백중파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사람들은 일중, 묘홍과 문제를 의논하지 단태를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백중파 전체의 역량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어야 단태에게로 보고되었다.

대마선이 호수를 크게 한 바퀴 선회한 후 유타루체로 돌아가는 동안, 단태는 망대에 올라가 있었다. 높고 좁은 그곳이라면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쓸쓸했다. 사방이 모두 호수인 그곳에서… 단태는 고독이라는 감정에 취했다.

자기가 백중이며, 유천주는 죽었고 무룡만 남았다는 진실을 모두에게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말해버릴까?

그러면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질까?

안 된다는 점은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았다. 이미 죽은 유천주의 이름으로 도시와 계약을 맺은 이유는 유천주의 영향력을 통해 그 계약이 지속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제 와서 유천주는 죽었다고 말하면 그동안의 고생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 터였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어머니라면… 이해할까?

아니라는 답이 튀어나왔다. 세상 누구도 이해 못함을 단태는 잘 알았다. 물고기의 마음은 물고기만 안다. 인간은 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용도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용이자 인간만이… 용과 인간의 마음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왜 용이면서 인간이 되었을까?

처음부터 의도하지는 않았다. 계획은 말도 안 된다.

대마선이 방책 안쪽의 선착장에 도착하자, 단태는 탁탁 돛대 위를 달리다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의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에 빛바랜 주황색 지붕에 내려선 그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렸다. 이제 백중파의 위상은 누구도 흔들지 못할 만큼 견고해졌다. 시장이라고 해도, 유력 가문이라고 해도 용이 뒤에 버티고 있는 조직을 건드릴 수는 없다.

목표가 이루어진 셈이 아닌가.

왜 기쁘지 않을까?

왜…… 씁쓸할까?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평년보다 월등히 많은 곡식을 거둬들였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혼자 그 곡식을 먹어치워야 하는 남자라면 이런 기분을 알까? 그런 사람이라면 왜 그토록 열심히 일을 했을까 곱씹지 않을까?

종탑 위로 올라간 그는 수정구를 꺼내어 손을 대고 마력을 주입했다. 처음엔 연결이 되지 않았다. 혹시 까다로운 수정구 사용법을 잊거나, 주머니에 넣어서 준 마력석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할 무렵, 세 번째 시도 만에 수정구의 표면에 위연미의 얼굴이 나타났다.

“거긴 어때?”

단태가 물었다.

“…심상찮아.”

“혹시, 설희에게 일이 생긴 거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군가 설희를 건드리려 한다면 당장 무룡의 등에 올라타고 날아가서 황제를 죽일 수도 있음을 그 순간 단태는 깨달았다.

“그건 아니야. 여긴 유염상 동쪽 여상림이라는 커다란 숲인데, 황제는 이곳에 머물고 있어. 용금탄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유는?”

유염상은 여러 개의 강과 길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 용금탄과 유타루체 중간에 자리 잡은 도시였다.

“무언가 분주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인데, 설희 곁을 떠날 수가 없어서 알아보기가 곤란해.”

“…그래?”

“며칠 전에는 커다란 용 몇 마리가 북쪽에서 왔어. 오늘은 동쪽에서 왔고. 내가 본 용만 줄잡아 스무 마리는 될 거야.”

“용이?”

단태는 황제의 뜻을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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