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84화 (284/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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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 묘홍, 종보예 등이 달려와 폐허에 달려들었다. 거중기가 동원되었다. 일중과 묘홍의 지시 아래,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구조 작업에 배치되었다. 열정만큼 중요한 질서가 회복되자 작업 속도는 빨라졌다. 그러나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들의 머릿속에는 ‘끝났다’는 생각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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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별로에서 시작된 감기 증상은 삽시간에 도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열과 기침, 가래를 동반한 감기로 인해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지만 짧으면 이삼일, 길어도 보름이면 나아야 정상인 감기 증세는 심해졌다. 결국 첫눈이 내리는 날, 독감으로 유난히 피리 불기를 좋아하던 한 소녀가 영원히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세 사람이 병원 침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흘째 되는 날, 스물다섯 명이 고통을 호소하다 죽었으며, 환자를 치료하던 의사까지 같은 증상으로 쓰러졌다.

사망자가 나온 지 열흘이 지나서야 병원, 의사들의 면허 등을 관리하는 동업조합 의방이 공식적으로 감기와 유사한 질병의 이름을 ‘흑액병’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흑액병은 초기 증상은 감기와 비슷해서 분간이 어렵지만, 목이 붓고 붉은 반점이 생기며 머리가 빠지면서 야위어 가는 후반부는 가공할 치사율을 자랑했다. 의방은 쉬쉬했지만 사람들 사이로 흑액병의 치사율이 3할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일단 병에 걸리면 열에 셋은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흑액병은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20만 대군과 하늘을 채운 용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타루체를 제외한 육성시가 원군을 보냈고, 팔마탑의 마법사들이 대가 참가했으며, 수백 마리의 용이 하늘을 맴도는 거대한 군대와 관련된 소식들이 물의 도시를 뒤흔들고 있었다.

차가운 빗줄기가 후드득 도시의 지붕을 때리는 가운데, 양지란은 손톱이 부러졌다는 사실도 잊은 채 커다란 돌덩이를 옮기려 애를 썼다. 소학당에 파묻힌 단태를 구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가오는 전쟁의 소문 때문이었다. 공포가 그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튀어나온 돌조각에 부딪힌 손톱이 위로 고개를 쳐드는 순간, 양지란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빗물에 섞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흠뻑 젖은 몸에서는 허연 김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이를 악문 그녀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돌을 옮기고… 흙을 파냈다.

사람들이 곁에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서.

우산이 비를 막았다.

고개를 든 양지란은 눈에 힘을 준 후에야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언니.”

“장주님.”

양지란은 얼마 전에 용봉고 전체의 수장 자리에 오른 소영을 쳐다보았다.

“…….”

소영은 속이 탔다. 아들은 이미 죽었다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건, 자신이 이곳으로 온 까닭 때문이었다.

양지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뒤틀린 근육과 관절 때문에 신음을 몇 번이나 억눌러야 했다. 그녀는 소영을 바라보았다. 소영의 눈에서 복잡한 심사를 읽어낼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중요한 일을 잊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저 양지란, 오늘 부로 용봉고를 떠나겠습니다. 용봉고를 위함이니,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장주를 향한 예를 갖춘 양지란은 다시 몸을 돌려 한때는 거대한 건물이었던 잔해 쪽으로 걸어가 작업을 재개했다. 한 사람의 힘으로 해낼 수 없는 일인데도,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되찾은 아들인데, 어떻게 만난 아들인데. 흙과 돌을 옮기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을 떠날 수는 없으리라.

우산을 버린 소영은 양지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빗물처럼 흘렀다. 할머니와 의논했다. 주위 지혜로운 사람들과도 의견을 나누었다.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상황은 급박하게 바뀌고 있었다.

하늘을 찔렀던 백중파의 사기는 소학당 폭발 사건을 정점으로 눈에 띄게 꺾였다. 황제의 목표가 백중파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반역을 꾀한다는 죄목으로 백중파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물의 도시를 폐허로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을 황제는 숨기지 않았다.

이익을 위해 백중파와 손을 잡거나 가까이 했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꾸었다. 백중파는 순식간에 고립되었을 뿐 아니라, 돈을 아끼지 않고 도왔던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했고… 급기야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다.

12인위원회는 간단히 11인위원회로 복귀했고, 각 가문은 백중파와 관련이 없음을 천명했다. 황제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용봉고도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양지란이 용봉고에서 나가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의견을 종합하여 결정을 내린 소영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사람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버리지 않는 조직의 수장이 되고 싶었다.

소영은 현실 앞에 순수한 마음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용봉고에 속한 사람들, 괴롭힘을 당해 집을 버리고 달아난 여인들을 위해서 저 불쌍한 언니를 내쫓을 수밖에 없었다.

마차 타기를 거부한 소영이 비를 맞으며 돌아간 후, 일중이 양지란 옆으로 걸어와 말없이 구조 작업에 동참했다.

양지란은 그를 보지도 않았다.

“아드님은……”

일중은 입을 열었지만 뜨거운 감정이 북받쳐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에게 백중은… 단태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자,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었다. 그런 존재가 이토록 허망하게 가버리다니.

양지란은 일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을 위해 슬퍼하는 사람, 이런 상황에서도 찾아와서 곁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아드님은,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분께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일중은 단태가 곧 백중이라는 사실을 멍한 시선의 여인에게 알렸다.

“…그랬었군요.”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에요. 그저 내가 알던 아이, 힘이 들어도 꾹 참고 뭐든 하려 했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최근에 깨달았지요. 내 품안의 아들은 이제 없구나, 싶었거든요.”

두 사람은 단태와 관련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슬픔이라는 감정 안쪽으로 웃음, 놀람, 흐뭇함이 스며들었다. 더 풍요로운 감정이 두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한 사람이 다가와 일중에게 시간이 되었다고 알렸다.

“…처리할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습니다.”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요.”

“또 오겠습니다.”

일중은 모퉁이를 돈 후에야 대기하던 마차에 올라탔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누르느라 입술이 씰룩거렸다. 아버지의 죽음만큼이나 그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슬픔이었다.

백중거에 도착한 그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백중파가 둘로 갈라졌다는 증거였다. 백중이 모습을 감춘 이후, 이번 소학당 폭발 사건 후에도 백중이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수뇌부에 속한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던 것이다.

회의실로 들어선 일중은 감정을 가라앉히며 자리에 앉았다.

“파주께선 어디 계십니까?”

왕우파를 이끌다가 백중파로 들어와 그 능력을 발휘한 덕분에 승승장구한 묘홍의 말투는 거칠었다.

“저도 모릅니다.”

일중은 단태가 백중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게 말이 됩니까?”

비난이 담긴 질문.

“파주께서는 필요한 말씀만 하십니다.”

일중을 향한 날 선 비판이 쏟아졌다. 욕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묘홍은 막지 않았다. 백중파를 오늘의 거대 조직을 키워낸 일등 공신이 일중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눈앞의 위기에 다들 헐뜯기에 바빴다.

몸을 일으킨 묘홍이 손을 들자, 사람들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파주께서 언제 돌아오실까요?”

“모릅니다.”

“허, 재미있군요. 백중파가 최대 위기에 봉착한 지금, 파주께서는 어디 계시는지도 모르다니요. 이러니 파주께서 백중파를 버렸다는 소문이 퍼지는 겁니다.”

“…….”

일중도 그 소문을 알고 있었다. 더 많은 것을 알았다. 소문의 진원지가 바로 묘홍이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백중파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끈끈한 형제애 같던 관계는 금세 사라졌다. 불만을 품고 난동을 부리던 광월이 죽은 이후로 내부 투쟁은 심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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