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86화 (286/293)

<-- 286 회: 7-35 -->

“폐하, 북쪽이 시끄럽사옵니다.”

승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혈지 문제요?”

“그렇사옵니다.”

“귀를 열고 듣겠소.”

의외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남쪽을 집중하느라 북쪽에 터진 재앙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고심한 끝에 황제는 군사 5만을 북쪽으로 보내 세상을 어지럽히는 괴물을 처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사혈지 인근 도시에서 보내는 지원군과 합치면 어렵지 않게 망인이라 불리는 괴물을 없애고 평온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황제는 비위나 맞추는 무리에게서 벗어나 외딴 천막으로 찾아갔다. 혼자 있던 륜사가 황제를 보고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황마사, 뭐하고 계셨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쁜 일이 생겨서 찾아왔소.”

황제는 그 서신을 륜사에게 건넸다.

금세 읽어버린 륜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둔수탑에서 평생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륜사에게 유타루체는 고향이었다. 거기 사람들을 무려 10만 명이나 한꺼번에 죽이겠다는 반우현의 결정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소?”

“…백중파의 수뇌부만 잡아들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 황마사는 마법만 열심히 익히느라 세상을 모르는 모양이오. 세상은 거대한 몸이나 다를 바가 없소. 상처가 입어 곪으면 철저하게 긁어낸 후에 약을 발라서 치료하지 않소? 마찬가지라오. 백중파는… 유타루체는… 일종의 상처이자, 고름이오. 난 제국이라는 거대한 몸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오.”

“…….”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륜사는 할 말을 잃었다.

“맞소. 난 10만이 아니라, 유타루체를 없애버릴 생각이오. 철저하게. 그래야 재발하지 않을 테니 말이오.”

황제는 서신을 찢었다.

천천히, 확실하게.

륜사는 아무 말도 못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왜 수십만 명이 우글거리며 살아가는 도시를 없애야 하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역린이 뭔지 아시오?”

황제가 물었다.

“전설에 따르면, 용의 목에 돋아난 특별한 비늘로 건드리는 사람에게 분노를 쏟는다고 합니다만.”

“백중파는 내 역린을 건드렸소.”

황제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만 들려준 채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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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윤성보다는 청마주라 불리기를 원하는 사내는 용혈막 앞에 섰다. 손을 뻗어 마력을 쏟아내며 외치자 시뻘건 불덩이가 용혈막을 두드렸다. 보이지 않는 막을 뒤흔든 불덩이는 터지며 벽과 천장을 태웠다. 숨을 헐떡이던 그가 뒤로 물러나자, 영고주가 용혈막을 공격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돌아가며 용혈막을 깨뜨리려고 애를 썼다.

예명주가 파형추를 펼쳐 용혈막을 뒤흔든 순간, 충격파가 퍼져나가 그들을 쓰러뜨렸다.

“…깨진 거지?”

세탐주가 말했다.

몸을 일으킨 청무주는 돌멩이를 주워 앞으로 던졌다. 가루가 되어야 할 돌멩이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땅바닥에 떨어지며 청명한 소리를 냈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인간의 몸이 가진 한계 너머까지 밀어붙인 결과였다.

과거, 용이었다가 인간의 몸을 취한 존재들은 용혈막이 사라진 통로를 걸었다. 저주에 걸린 유천주처럼 용혈막도 약해졌을 거라는 암탄주의 말은 옳았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마법을 퍼부었다고 해도 용혈막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제법 잘 만들었네.”

영고주가 용혈의 바닥과 벽, 천장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들에게 유천주는 잠룡이라는 과정도 마치지 못하고 쫓겨난 멍청한 용이었다. 용족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져서도 안 되는 용이었다. 그런 유천주에게 이렇게나 멀쩡한 용혈이 있다니.

“녀석의 하족은 뭘까?”

예명주의 질문에 청무주가 답했다.

“지렁이.”

그들은 깔깔 웃었다.

웃음은 팔짱을 낀 사람을 발견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곧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너는?”

청무주였다.

“일단, 환영한다는 말을 해야겠지? 인사는 했다 치고. 당신들, 정체가 뭐야?”

“유천주는 어디 있지?”

세탐주가 물었다.

“대답을 하지 않겠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태는 움직이고 있었다. 동시에 정령왕을 둘이나 소환하고도 죽지 않은 그는 이전보다 강해졌다. 청무주 등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들 사이로 파고든 단태는 팔, 다리를 빠르고 정확하게 원하는 부위에 꽂아 넣었다. 용이었다가 인간이 된 그들은 각각 옆구리, 명치, 허벅지, 어깨에서 몸 전체로 퍼지는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어, 넌…… 부윤성이지?”

단태는 벽에 처박혀 신음을 흘리는 사내 앞에 섰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일중의 기억에서 본 그 녀석이었다. 승상을 뒤에서 조종하던 녀석이 왜 용혈로 내려왔을까? 여기까지 어떻게 올 수 있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청무주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 빠른 속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이 녀석이 소요왕령, 수탄왕령을 소환했을까? 두 정령왕이 인간족을 위해 끼어든 게 아니란 말인가?

그때, 깡마른 형상이 빠르게 다가왔다. 단태를 스친 그 시체 같은 녀석은 영고주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었다. 피가 흘러나오자 녀석은 더 광분했다. 단태가 달려가 녀석의 머리통을 걷어차지 않았다면 영고주는 피를 빨려 죽고 말았을 터였다.

목이 돌아간 녀석이 벽을 더듬으며 일어섰다. 가고자 하는 방향과 실제 몸이 움직이는 방향이 다르다는 사실에, 녀석은 익숙한 듯 두 손으로 귀 옆을 감싸고 우두둑 돌려버렸다. 힘이 과해서 지나치게 목이 돌아가는 바람에 정신을 집중하여 진지하게 목을 돌리는 행동이 무서우면서도 웃겼다.

그러나 머리를 제대로 맞춘 놈은 단태를 향해 달려들었다. 단태가 뻗은 양손에서 뻗어 나온 바람의 칼이 팔, 다리를 잘라버리자 놈의 몸은 다섯 조각으로 분리되어 땅바닥에 흩어졌다. 그런데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팔, 다리, 몸통은 버둥거리며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말 끈질겨.”

고개를 흔들며 몸통을 저 먼 곳으로 차버린 단태는 반쯤 정신을 잃은 영고주의 목을 살폈다. 다행히 중요한 혈관이 다치진 않은 듯했다.

영고주를 업은 단태가 청무주 등을 바라보았다.

“따라올 수 있지?”

“…그, 그래.”

“뒤처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놈들은 죽지 않아. 열 조각으로 잘라봤는데도 결국 다시 붙더라고.”

단태는 주혈로 향했고, 청무주와 세탐주, 예명주는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단태 뒤를 따랐다.

여기저기서 그 미라 같은 놈들이 튀어나왔다. 그럴 때마다 영고주를 업은 채로 단태가 두 조각, 혹은 세 조각으로 잘라버렸다. 바람이나 물로 만들어진 예리한 칼은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주혈의 벽에 손을 대고 용혈막을 생성시킨 단태는 마법으로 필요한 치료를 쉽게 끝마쳤다. 말린 수초를 조그만 화로에 던져 넣은 그는 맞은편에 서서 눈치를 보는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자, 이제 말해봐. 정체가 뭐야?”

“…….”

청무주 등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당신들을 저 밖으로 쫓을 수도 있어. 그러면 어떻게 될까? 놈들이 당신들을 무지 좋아할 걸.”

“이곳에 있을 보물 때문에 온 것이오.”

청무주가 말했다.

“보물? 왜?”

“…황제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요.”

“그래? 자세히 말해봐.”

단태는 최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원했고, 청무주는 그런 단태를 속이기 위해 사실과 거짓을 섞었다. 주혈 밖으로 나가 망인 하나를 잡아와 마법의 줄로 묶은 채 약점을 찾기 위해 몸 곳곳을 잘라보면서도 단태는 청무주의 설명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세탐주, 예명주는 단태가 하는 일을 지켜보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잠깐.”

“…왜 그러시오?”

“용태학 출신 서생이라고 했지? 마법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그렇소만.”

“그렇다면 마법사를 만난 적도 없나? 천마의 경지에 다다른 대마법사 말이야.”

“…그렇소.”

단태는 단검을 망인의 왼쪽 눈에 꽂은 후, 청무주를 노려봤다. 일중은 저 부윤성이 음마성 율암을 만나는 장면을 지켜보다가 화를 입었었다. 놈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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