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93화 (293/293)

<-- 293 회: 7-42 -->

- 드디어 나를 불렀군. 마지막 소원을 말하라.

‘단태를 지켜주십시오.’

명국영은 망설이지 않았다.

-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죽어도 좋은가?

‘죽어도 좋은 목숨은 세상에 없습니다. 허나, 인간이라는 종족 전체를 구할 거인은 한 사람 뿐이니까요.’

명국영은 자신 있게 말했다. 옳은 길을 걷고 있다는 직감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믿음이 현실을 창조한다. 의지가 세상을 구축한다. 하나의 결정이 변화를 일구어낸다.

그는 단태의 의도를 알았던 것이다.

단태는…… 현실에 모습을 드러낸 광릉, 전설의 거인이었다.

- 좋다.

수탄왕령 특유의 무거운 느낌이 사라졌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맹렬한 소리에 사람들을 화들짝 놀랐다.

명국영은 녹슨 창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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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존계에 묶인 단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 어느 때보다 잘 알았다. 그의 의식이 여기저기 옮겨 다녔던 것이다. 그는 륜사의 일부가 되어 암탄주와 싸웠고, 남몰래 찾기도 했던 아버지의 초췌한 얼굴을 보았다. 두려움에 떨다가 광릉 이야기를 하던 명국영의 결정을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시청 안으로 들어와 살아 있는 생명을 깡그리 없애버리려는 충동으로 그득한 망인들의 내면과 연결되었다. 깊고 넓고 거대한 구덩이가 그들에게 갈증을 강요했다. 텅 빈 공간이 그들에게 파괴적 충동으로 몰고 갔다.

그들은… 의지가 없는… 본능에 따르는 짐승이었다.

망인은… 기본적으로 설고의 동족, 그 시꺼먼 거미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인간이었던 경험의 일부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흐릿한 자각만 내면 깊숙이 남아 있었다.

마침내 방벽이 뚫렸다. 거대한 망인의 탑이 시청으로 기울어지며 단번에 방어 체계를 무너뜨린 것이다. 비명과 고통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할 수만 있었다면 결존계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어머니와 재회한 지 얼마 못 되어 아버지는 어머니와 설희에게 달려드는 망인을 가로막다가 목숨을 잃었다. 륜사는 여화를 지키기 위해 인간의 한계를 돌파했으며, 명국영은 철무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벌써 죽고 말았을 터였다. 반우현, 백율운현 등은 어떻게든 맡은 구역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티는 중이었는데, 일중이 시청 전체를 통솔하며 적절한 명령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죽음의 왕이 다가오고 있었다.

단태는 누천파의 시선으로 결존계 중심부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몸을 볼 수 있었다.

망인들이 결존계를 무너뜨리려고 몸을 날렸다. 불꽃이 튀며 몸이 부서져도 망인들은 개의치 않았다. 유천주의 명령에 결존계로 뛰어든 거미들 같았다.

결존계가 흔들렸다.

시간이 부족했다.

이렇게 끝이 나는 걸까?

그때, 거대한 물기둥이 나타나 망인들을 결존계로부터 몰아냈다. 수탄왕령이었다. 그러나 마력 공급 없이 아레마고와의 약속만으로 소환에 응한 수탄왕령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누천파는 조직적으로 망인을 움직여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맑고 높은 소리가 들렸다.

공작처럼 크고 화려한 새가 날아와 결존계 위를 맴돌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기이한 선율에 망인들은 처음으로 고통스러워하며 물러섰다. 누천파도 예외는 아니었다. 새를 잡아서 죽이려고 망인들이 몸을 날렸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누천파는 후퇴했고, 망인들도 물러섰다.

곡조가 바뀌었다.

광활한 바다가 밀어내는 파도에 깃든 힘, 대지에 주름이 잡히게 해 산맥을 만든 그 힘, 해가 규칙적으로 뜨고 지도록 만드는 그 거대한 힘의 일부가 노래에 담겨 있었다.

그 힘이 결존계로 스며들었다.

결존계 내부의 시간만 빠르게 흘렀다. 두 배, 세 배…… 열 배, 스무 배…… 그 이상으로 빨리.

단태는 눈을 떴다.

결존계는…… 완성되었다. 그의 머릿속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망인들과의 연결이 담겨 있었다. 몸을 일으킨 그는 진홍색의 란조를 쳐다보았다.

“전설이 사실이었구나.”

“나는 약속을 지켰다.”

란조가 말했다.

“그래.”

“서둘러.”

란조의 재촉에 단태는 눈을 감고 그 연결망에 집중하며 입을 열었다.

“그만!”

그 목소리에 깃든 의지가 빛처럼 빠르게 사방으로, 도시로, 제국 전체로 퍼져나갔다.

주인이 바뀐 불사의 군대는 얌전한 양떼로 변했다. 부러진 창을 들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려던 명국영 앞에서, 여화를 보호하느라 왼쪽 팔이 물어뜯긴 륜사 앞에서, 언젠가 재앙이 끝나기를 바라며 다가오는 망인에게 낫과 곡괭이를 휘두르는 평범한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서 있는 일중과 철무 앞에서.

단태는 그들을 불렀다.

사혈지로.

시청으로 들어왔던 망인들은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도시를 점령했던 불사의 군대는 북상하기 시작했다.

결존계를 빠져나온 단태는 극심한 갈증에 느꼈다. 물로는 진정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동반한 충동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하둔에 많은 마력을 쏟아 부었는데도 그 충동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영원한 불꽃처럼 내면에서 타오를 것만 같았다.

충동이 커질수록 하둔으로 내면의 흐름을 느리게 만들었다. 하루는 한 달이 되었다. 하루는 1년이 되었다. 하루는…… 10년이 되었다. 하루는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가운데, 혼자만 깨어 있는 시간.

충동과 싸우기 위해 버텨내야 하는 끔찍한 시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커지는 시간.

단태는 완전한 적막에 빠져 있었다. 그에겐… 영원이라는 시간이 앞에 놓여 있었다. 세상을 유린한 망인들이 뿜어내는 그 극심한 갈증을 잠재우려면 영원이라는 말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울고 싶었다.

어머니와 설희, 그가 아끼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결정이었지만, 혼자 짊어지기엔 너무나 무거운 형벌이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이 지옥이었다. 그는 지옥의 군주였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용도 아니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 시간 마법을 뚫고 누군가가 다가왔다. 단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둔의 범위 안에서 움직일 수 있지?

그 노인이었다.

아레마고였다.

“수고했다.”

“…어떻게?”

단태는 자신이 말을 할 수 있음에 깜짝 놀랐다. 하둔은 시간의 감옥으로 움직일 수 없는데.

“내가 시간에 살짝 장난을 쳤단다.”

노인은 빙긋 웃었다.

그 표정에 단태는 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끝났습니다.”

“끝? 아니, 시작이란다.”

“…….”

단태는 영원한 지옥의 시작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겐 이제부터 시작이다. 넌 인간인 동시에 용이며, 또한 인간도, 용도 아니란다. 잊지 마라.”

아레마고는 손을 흔들며 천천히 사라졌다.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은데.

무엇보다, 왜 시작이라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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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청이 완공되었다.

5년에 걸친 대공사를 끝마친 순간 한없이 기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섭섭한 마음이 컸다. 용케 살아남은 학자들에 의해 ‘망인의 변’이라 명명된 그 사건 이후, 우여곡절 끝에 유타루체의 시장 자리에 오른 명국영은 그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물의 도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만큼 엉망진창이었는데, 그 때문에 차별적 요소를 최대한 줄이고 기능을 중심으로 도시 구획을 정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중앙탑 꼭대기에 선 명국영은 어두컴컴한 호수에서 한창 작업 중인 어선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수십 척이 여기저기 흩어져 잡아오는 물고기는 도시를 빠르게 살찌우는 영양분 중 하나였다. 망인은 규모가 큰 도시와 마을을 휩쓸었을 뿐 산자락이나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는 사람들은 망인의 존재조차 모르고 지나갔고, 그 덕분에 유타루체의 인구는 10만을 넘길 수 있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도시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명국영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누군지 알아맞혔다.

“어서 오게.”

“시장 따위가 마둔수탑의 탑주님을 오라 가라 하다니!”

륜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탑을 버리고 황제와 함께 계림으로 피신한 누마탄은 공식적으로 마둔수탑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를 륜사가 맡은 지 4년이 지났다. 륜사의 실력과 명성을 듣고 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고 있었다.

“제수씨는 잘 있겠지?”

“형수님은 잘 있지.”

“예정일이 언제지?”

“내년 봄.”

“얼마 안 남았군.”

“자네도 이제 좋은 여자 만나서 정착해야지.”

륜사는 진심이었다. 여화와 평생을 같이 하기로 결심한 이후, 삶이 달라졌다. 망자의 변으로 깊이 변한 그는 책임감으로 또 한 번 내면이 바뀌었다. 이래서 결혼을 해야 한다고 어르신들이 신신당부했나 싶었다.

“글쎄…….”

명국영은 얼버무렸다.

“그건 그렇고.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시장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면서. 사실인가?”

“맞아.”

“안 돼!”

“이미 결정했네.”

명국영은 단호했다. 시장에게 걸 맞는 위엄이 은연중 드러났다.

“…그래도 여기 있을 거지?”

“그건 생각 중이네.”

“따로 갈 데도 없잖나?”

“그건 그렇지.”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뭔가?”

“내 아들의 스승이 되어주게.”

“아들?”

“곧 태어날 아들.”

“아들인지, 딸인지 어떻게 아는가?”

“아들이야. 분명해. 태동이 예사롭지 않거든.”

륜사는 얼굴 전체로 웃고 있었다.

그런 륜사가 부럽기도 했지만 명국영은 행복해질 수 있는 순간마다 바늘에 찔린 것 같은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단태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두 분이 여기 계셨군요.”

백중파의 지도자로서 도시 재건에 큰 몫을 감당한 일중이 웃으며 다가왔다.

“자네, 약속했네. 나중에 보세.”

륜사는 눈치 빠르게 옥상을 벗어났다.

잠시 입에 올릴 말을 고르기 위해 신중히 생각에 잠긴 명국영은 일중을 바라보았다.

“시장 자리를 맡아주게.”

“…….”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어. 그러니 사양 말게. 자네만한 적임자는 제국 전체에서도 찾을 수 없네.”

“…전 생각도 못했습니다.”

“11인위원회도, 시민도 자네를 시장으로 받아들일 거야. 그동안 보여준 게 있으니까.”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아니, 그럴 수 없어. 선택권도 자네에겐 없네. 이건 부탁을 가장한 명령이니까.”

명국영은 학자답게 일중이 시장을 맡아야 하는 이유를 순식간에 일곱 가지나 말했고, 일중이 거절하는 핑계를 조목조목 따져서 부숴버렸다. 입으로 하는 싸움은 천하제일이라는 명국영 앞에 일중은 오래지 않아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시장을 맡기로 승낙한 것이다.

시청을 벗어난 명국영은 취영루에 들러 단태의 어머니와 설희를 잠시 만났다. 용봉고에 정식으로 입회한 설희는 요리에 재능이 있음이 드러났다. 설희가 직접 만드는 음식에는 묘한 손맛이 느껴져 좋았다. 용금탄으로 올라간 소영을 볼 수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대신 이야기를 나눌 벗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한 일 년 됐지?”

철무는 명국영이 따라준 술잔을 단번에 마셨다.

두 사람은 침묵과 대화를 능숙하게 즐기며 술을 마셨다. 때로는 혼자 이야기 했고, 때로는 혼자 마셨으며, 가끔은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아직도 밤에 잠을 못 이루나?”

“…….”

명국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넨 참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로군. 다른 사람들은 그 아이를 잊어버리고 잘도 사는데 말이야.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고.”

“…내가 예민한 거지.”

“그 아이, 잘 지내겠지?”

“…아마도.”

명국영은 눈물을 흘릴 뻔했다. 술기운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쌓이는 슬픔의 무게는 이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웠다.

그날, 명국영은 정신을 잃도록 술을 마시는 바람에 취영루에서 하룻밤을 잘 수밖에 없었다. 목이 말라 어스름한 빛이 창문으로 파고드는 새벽에 일어난 그는 방안에 선 형체를 보고는 소름이 돋았다. 사람의 윤곽인데, 어깨에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누구냐?”

“스승님.”

“…….”

명국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이 순간이 혹시 꿈이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다. 침대에서 나온 그는 피부가 거무스름한 단태를 볼 수 있었다. 어깨에는 백관조의 틀을 깨고 화관조로 성장한 란조가 앉아 있었다.

“스승님이 필요해서 찾아왔습니다.”

“…내, 내가?”

“새로운 삶이 스승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여전히 세상을 바꾸고 싶으시죠? 그러면 저를 따라오십시오.”

“너를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단태는 대답 대신 바람처럼 다가와 명국영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명국영은…… 많은 것을 듣고, 볼 수 있었다. 믿기지 않는 장면들이 거기 있었다.

단태가 손목을 놓자, 명국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용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냐?”

“스승님께서 원하신다면, 가능합니다. 지금의 제겐 그런 능력이 있으니까요. 세상은 용족을 원합니다. 균형을 위해서 용족이 필요합니다. 저 혼자 세상 전체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찾아왔으니까, 스승님도 아까 일중처럼 거절할 자유는 없습니다.”

“…뭐?”

명국영은 단태가 일중과의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가슴이 후련했다.

“한 가지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잠룡의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용족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데, 현재 세상에 용은 저 혼자뿐이니 제가 명룡으로서 스승님을 가르쳐야 합니다. 스승과 제자가 뒤바뀐다는 거지요. 혹독해서 후회할지도 모릅니다만, 스승님께는 선택의 자유가 없습니다. 전 스승님을 잘 아니까요.”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말하는 단태.

“…달라지지 않았구나.”

명국영은 안심이었다. 단태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 바뀌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다.

“가시죠.”

“그래.”

명국영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단태 옆에 섰다. 단태에게서 흘러나온 검고 윤기가 흐르는 기운이 명국영을 둘러싼 순간, 두 사람은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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