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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2화 (2/150)

2화

* * *

중학생이 될 무렵부터 부모가 없었다는 것 빼고는 평범한 인생이었다.

그간의 세월이 꿈인 듯,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요절한 내가 이곳에서 눈을 뜬 건 꼬박 반년 전의 일이었다.

죽기 직전 차가운 바닥에 볼을 붙이고 누워 헐떡거리던 것이 아직도 생생했다.

‘살면서 그다지 착한 일을 하진 않았지만, 나쁜 짓도 하지 않았으니 지옥만은 피해다오.’ 하고 짧은 기도를 했는데, 깨어난 곳은 지옥도, 천국도 아니었지만 썩 내키는 곳도 아니었다.

멋지게 꾸미려고 애를 썼으나 화려함이 지나쳐 조잡하기만 한 공간은 이질적인 꿈과도 같았다.

급히 몸을 일으키니 허리와 엉덩이가 빠질 것처럼 아팠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냐, 하면서 허리를 문질러 보는데 허여멀겋고 작은 손이 먼저 보였다.

헉, 하고 숨을 참으며 얼굴을 더듬으니 치렁치렁한 금발 머리가 잡히고 오밀조밀 말랑한 이목구비가 느껴졌다.

“뭐, 뭐지?”

늘어진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보았다.

두피가 당겨지며 통증이 느껴진다. 내 몸에 붙어 있는 것이 맞았다.

이번엔, 양 뺨을 세게 때렸다. 고전적이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힘이 없는 손바닥이 얼굴에 닿자 그럭저럭 알싸한 통증도 느껴진다.

동시에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왕자님!”

화려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후줄근한 차림새를 한 빼빼 마른 소년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이내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눈물을 좍좍 뽑아내기 시작했다.

“칼 왕자님, 왕자님. 죽으면 안 돼요.”

빨간 머리에 귀여운 주근깨가, 할머니 집의 못난이 인형을 연상시키는 소년, 그가 마르코였다.

그리고 옆엔 털이 이리저리 엉킨 누렁이 한 마리, 아니, 엘리자벳도 있었다.

마르코는 나를 ‘칼 린드버그 왕자’라고 불렀고,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기억을 뒤지며 동생과의 추억 한 자락을 잡아냈다.

〈너 뭘 그렇게 재밌게 보냐?〉

〈지금 중요한 순간이니까 말 걸지 마.〉

〈뭔데?〉

〈드디어 칼 린드버그가 뒈졌거든.〉

죽었거든, 도 아니고 뒈졌다니.

어린 여동생이 어디 가서 부모 없는 티 내지 말란 소리 들을까 봐 걱정한 나는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었다.

평소 같았으면 오빠나 잘하라며 앙칼지게 대꾸했을 동생은 흥, 콧방귀를 한번 뀌었을 뿐 또 보던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시원하게 화장실도 한 번 다녀온 다음 만면에 웃음을 띠며 혼자 나불나불 소설 내용을 설명했다.

주로 그녀가 싫어하던 ‘칼 린드버그’라는 캐릭터가 얼마나 못된 놈이었는지, 주인공이 얼마나 멋지게 그를 처단했는지 설명했다.

솔직한 말로 소설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사춘기다 뭐다, 살갑지 않았던 동생이 오빠한테 말을 걸어 줬다는 사실 하나로 귀 기울여 들었다.

“칼 린드버그…….”

내가 작게 읊조리자, 마르코가 어헝, 소리를 내며 엎드려 울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죽었다 깨어나니 소설 속이라니, 사고의 충격으로 미쳐 버린 게 분명했다.

기억을 더듬어 소설의 내용이라도 기억해 보려 했지만 뿌옇게 안개가 낀 머리는 이름 몇 개만 뱉어 낸 뒤엔 잠잠해져 버렸다.

장르가.

판타지, 로맨틱, 아니, 판타지 로맨스?

뭐 그런 거였던 것 같은데.

잘생긴 외모의 주인공이 있었던 것 같고. 역경을 딛고 사랑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아, 등장인물 이름이 묘하게 술을 연상시킨다는 점도 있었다.

내가 읽던 소설도 아니고 여동생이 읽던 소설 속. 그중에서도 주인공을 더럽게 오랫동안 괴롭히며 고구마 구간을 늘리는 데 일조한 사람?

그것이 내가 몸을 차지한 ‘칼 린드버그’라는 것만이 유일하게 정확한 사실이었다.

* * *

어쨌든 그랬다.

하필 주인공도 아니고, 주인공을 괴롭히던 악당이 되어 버린 건지.

작고 말라서 힘도 잘 못 쓸 것 같은 유약한 인상의 왕자가 무슨 악당 같은 짓을 했을까.

“나, 지금 몇 살이야?”

열다섯? 열여섯?

“……얼마 전 성년이 되셨잖아요.”

이게?

전의 나를 생각해 보자.

20살이면 군에 입대했을 때인데 팔뚝이 이거에 두 배는 되었었다.

왕자가 아니라 공주에 가까운 외형도 그렇고.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침대 위에 앉아 몸을 더듬으며 한참 넋을 빼고 있으니 마르코는 코를 훌쩍거리며, 내가 말에서 떨어진 것은 자신의 불찰이므로 자신을 죽이라고 소리쳤다.

칼 린드버그가 말에서 떨어졌었나 보구나.

안타깝게도 네 주인은 죽어 버린 것 같다.

마르코의 빼빼 마른 모습이나 분위기를 보건대 썩 좋은 주인도 아니었을 것 같지만, 마르코가 하도 울고불고 그래서 안타까워진 내가 혀를 쯧 찼다.

“죽이는 걸로는 성에 안 차서 그러셔요? 그렇담 제 등을 치세요!”

얘 왜 이래?

당황스러움을 감추기도 전, 마르코가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심지어 아직도 핏자국이 선명한 채찍까지 손수 내밀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뒤돌아선 아이의 벗은 등에는 무수히 많은 생채기가 있었던 것이다.

하루 이틀 맞아서 생긴 상처가 아니었다.

오래된 상처부터 새로 생긴 상처까지 나무의 나이테처럼 선명한 세월의 자국을 그렸다.

이 빌어먹을 왕자는 도대체 뭐하던 놈일까?

“그만해, 난 널 때리지도 죽이지도 않을 거야.”

침대에서 내려오자 꼬리뼈가 지끈지끈 아팠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멍이 들었을 거다.

아구구 소리를 내며 채찍은 침대 아래 깊숙한 곳에 치우고 거울 앞에 서서 ‘칼 린드버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혹시나 해서 바지 앞섶도 더듬었다.

마르코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져 갔다.

“왕자님, 화가 단단히 나셨군요.”

덩달아 사색이 된 개가 끼잉끼잉 소리를 내며 발치에 엎드려 눈치를 봤다.

대 환장이었다.

“그러니까, 마르코? 나는 화난 게 아니야.”

일부러 부드러운 말투로 얘기했지만 한 소년과 개 하나는 아예 얼음이 되어 버렸다.

“와, 왕자님께서, 제, 이, 이름을.”

이름이 아니면 뭐라고 불렀는데?

휙 고개를 돌려 마르코를 쳐다보자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

심지어 덩치가 산만 한 개 한 마리까지 그러고 있으니 안 그래도 바닥난 어이가 아예 상실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니, 사람은 그렇다 치고 강아지인 너까지 왜 그러는데?

마르코의 눈물이 비처럼 내려 바닥에 점을 찍고 결국 호흡이 곤란한 듯 가쁜 숨을 내쉬기 시작해서 이러다 정말 일을 치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만!”

내가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마르코는 딸꾹질을 하며 울음을 그쳤다.

“엉덩이가 좀 아픈 것 빼고는 괜찮으니 울지 마. 응?”

마르코를 달래고 개를 쓰다듬다가 갑자기 몸에 힘이 빠져 비틀거렸다.

“괜찮은 게 아니잖아요. 왕자님. 지금 당장 의원을 불러올게요.”

“아냐, 의원보다 지금은 네 도움이 필요해.”

방을 뛰쳐나가려는 마르코의 손을 급하게 움켜쥐자 마르코가 갑자기 얼굴을 화악 붉혔다.

“와, 왕자님이, 제, 소, 손을.”

경기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던 마르코는 내가 간절한 마음으로 양쪽 어깨를 붙들자 아예 딱딱하게 굳었다.

혼자서 붉어졌다가 순식간에 시퍼레지는 마르코의 얼굴을 보며 내 머리는 힘차게 돌아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시작부터 난관인 이 시간을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인지 말이다.

꿈인 것 같으니까 일단 창밖으로 뛰어내려 봐? 그럼 꿈에서 깰지도 모르지. 하며 공기가 안 통할 것처럼 꽉 닫힌 창을 힐금 쳐다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관두자, 이 몸이 죽어도 문제고 다치기라도 하면 애먼 마르코에게 트라우마를 안길 거다.

여기서 ‘나는 정황상 소설 속에 들어온 바깥세상 사람인데 그게 하필 악역이라 말미엔 끔살을 당하거든.’이라고 해 봐야 이 녀석은 나를 도울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을 거듭하는 찰나에 엘리자벳이 턱을 축축하도록 핥았다.

일부러인 듯 마르코와 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통에 쥐고 있던 소년의 어깨를 놓았다.

마르코는 얼떨떨한 얼굴로 제 어깨를 더듬으며 나를 응시했다.

난 큼, 하고 헛기침을 한 후 그럴싸, 하진 않지만 통상적으로 많이 써먹는 병 하나를 들먹였다.

“저기, 내가 아무래도 말에서 떨어지며 기억을 잃은 것 같아.”

그것 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마르코가 더듬더듬 “기억상실증이 왔다는 말씀이세요?”라고 대답했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상실증. 인간에게 그런 병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마르코도 내가 다른 세상에서 영혼만 여기로 넘어왔다는 것을 감히 상상도 못 하겠지만 일단 일이 커지는 건 싫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허리춤에서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거슬리기 짝이 없었고 두피가 무거워서 두통을 유발했기 때문에 대충 움켜쥐고 숭덩숭덩 잘라 냈더니 마르코는 또 짧은 비명을 지르며 제가 하겠다고 나섰다.

마르코는 상당히 재주가 좋았다. 예전 어느 만화에서 나오는 캐릭터처럼 똑 단발이었던 머리가 제법 보기 좋게 바뀌었다.

머리에 손을 대는 것도 황송하다며 연신 굽신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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