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다음은 대낮인데도 한밤중처럼 어두컴컴한 방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두꺼운 커튼을 걷는 것이었다.
내 손에 먼지가 묻는다며 마르코가 만류했지만 길고 무거운 커튼을 정리하는 건 두 사람의 힘으로도 버거웠다.
“왕자님은 햇볕이 피부를 상하게 한다고 싫어하셨어요.”
기억상실증에 걸린 왕자가 안타까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마르코는 설명을 덧붙였다.
별로 좋은 주종관계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저렇게 맹목적인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총 네 곳의 창문 커튼을 전부 걷어 놓고 나니 온몸의 힘이 빠져 한참 주저앉아 있어야 했다.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파란 핏줄이 다 비치는 창백한 팔뚝을 보다가 혀를 찼다.
근력이라곤 약에 쓰려 해도 없을 몸은 한 나라의 왕자라기에는 너무 비루했다.
선천적으로 무슨 병이 있어 그런 건지 물었더니 마르코는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병이 아니라, 식사량이 적어서 그래요. 하루에 한 번 채식 위주의 식단을 고집하셨어요.”
어쩐지. 기운이 없고 머리카락이 푸석푸석하더라니.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게 말이 되냐?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영양소와 열량이라는 게 있는데.”
마르코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그게 제법 제 나이대의 소년 같아 귀여웠다.
“열량이나 영양소 같은 건 모르겠고, 배부른 느낌이 싫다고 하셔서…….”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배부른 느낌이 뭐? 다이어트 비디오를 줄기차게 찍어 대는 모델들도 하루 세끼는 챙긴다.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배꼽에 살이 찌면 아이가 잘 안 생긴대요. 그리고 근육이 붙으면 인기가 없어진다고 하셨고요.”
입술 끝이 바르르 떨렸다.
왕자는 마르코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학대하고 있었다.
남녀 불문 비만이 불임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잘 알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이 악역을 처단하기 전에 이 몸이 영양실조로 죽는 건 막아야 했다.
* * *
동생, 전재영이 일러스트를 핥을 것처럼 굴 때, 액정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놈에게 목매단다고 한심하다고 했던가.
근데 이젠 내가 그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여기 온 뒤로는 자주 꿈을 꾸곤 했다.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 헤네켄 황태자의 칼 아래에서 몸부림치는 장면을.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하며 거울에 비친 날 살폈다.
전형적인 서양인 아이돌 얼굴이다.
금발에 파란 눈, 90년대 빌보드차트 상위권에 머무를 것 같은 외모는 확실히 미남이었지만, 비쩍 마른 몸과 아직도 심술이 붙어 있는 듯한 미간의 주름 때문에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한쪽 손을 들어서 목을 쓰다듬었다.
거울 속 청년이 우울한 눈빛으로 제 목을 쓰다듬는다.
손길이 닿은 곳이 찌릿하고 정전기가 올랐다.
이제는 내가 칼 린드버그고, 칼 린드버그가 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을 지킨답시고 연애도 결혼도 포기하고 악바리처럼 살던 전우영은 진짜 죽고 없어졌다.
“왕자님? 머리가 아프세요? 역시 의사를 부를까요.”
“아니, 좀 떠올려야 하는 일이 있어서.”
“억지로 기억을 찾으려 하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떠오를지도 모르니까요.”
안타까움이 듬뿍 담긴 마르코의 걱정에 나는 비실거리며 웃기만 했다.
칼 린드버그의 기억 따위는 안 떠올라도 된다.
내가 꼭 떠올려야 하는 건 따로 있다.
언제, 어떻게, 왜, 칼 린드버그는 죽느냐는 거지.
“아드리안 헤네켄은 어떤 사람이야?”
“저도 그분에 대해서는 소문만 들었지만 극우성 알파시래요. 왕자님도 다 잊어버렸지만 그분의 이름만큼은 기억할 만큼 몰두해 계셨죠.”
알파? 포식자 우두머리 말하는 건가.
남주인공을 지칭하는 간지러운 칭호에 헛웃음만 나왔다.
“내가 그 사람을 또 만날 기회가 있을까?”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 새 삶을 영위하면 더 좋고. 기대를 담아 물었지만 마르코는 그런 내 기대를 박살 냈다.
“헤네켄과 린드버그는 떼어 내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다른 분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조만간 국혼을 논의한다고도 했고요. 그 때문에라도 보게 되지 않을까요?”
“국혼? 황태자가 아직 혼자야?”
마르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인공은 아직 안 나타난 모양이었다.
나는 그때 좀 더 꼬치꼬치 물었어야 했다.
* * *
“왕자님, 점심을 가져왔습니다.”
웨건을 밀며 들어오던 마르코는 바닥에 엎드려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칼의 머리카락이 눈이 부셔서 눈을 가늘게 했다.
목이 느슨한 셔츠에 헐렁한 바지를 입고 종이에서 엎드린 채 눈을 떼지 않던 칼은 별안간 이상한 포즈를 취했다.
양 팔꿈치를 땅에 대고 발끝을 세워 버티는 동작이었는데, 칼은 그 동작에 조리장과 똑같은 이름을 붙였다.
‘프, 프랑크랬나.’
마르코는 웨건을 테이블까지 끌어와 조용히 식사를 옮겼다.
저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요즘 체력 단련에 열심인 칼이었으니, 몸에 해가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처음엔 보기에 괴로웠던 마르코가 만류도 해 봤다. 그러나 칼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마르코도 이젠 방해하길 포기했다.
끙, 하는 신음 소리를 내며 악바리처럼 버텨 내던 칼은 결국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지고 나서야 헐떡거리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아, 하아. 왔어?”
“네,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10초 정도 는 것 같군요.”
“그렇지? 눈에 띄게 늘고 있어. 젊은 게 좋긴 좋다니까.”
발긋한 볼을 볼록 부풀리며 좋아하는 왕자님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마르코는 갑자기 가슴이 간질거려서 “이제 그만 식사하세요.” 하고 고개를 돌렸다.
매 끼니 고기와 채소를 골고루 먹고 있는 칼은 전에 비하면 제법 통통해졌다.
여전히 가느다라니 통통하단 말은 어폐가 있고 전보다 단단해졌다고 해야 하나?
여하간 훨씬 보기 좋았다.
“오늘 저녁 연회에는 무조건 참석하셔야 해요.”
달콤한 특제 소스를 바른 메추리를 헤치던 칼이 얼굴을 와그작 구겼다.
‘어지간히 싫으신가 보다.’
예전에는 연회라면 아침부터 서두르곤 했었는데, 마르코는 변모한 왕자님이 어색했지만 싫지 않았다.
“나라 꼴이 이 모양인데 연회는 무슨 놈의 연회냐.”
“린드버그는 늘 이 꼴이었는데요.”
“그게 문제란다. 마르코. 문제로 삼으면 문제라지만 문제로 삼지 않으면 그대로 망할 때까지 기다리는 꼴이라고.”
마치 주문처럼 들리는 말에 마르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칼이 가슴을 탁탁 쳐 댔다.
“인구의 반 이상이 소작농인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 어마어마한 세금은 뭐야? 마치 법 테두리 안에서는 뭘 할 생각을 말라고 엄포를 놓는 것 같잖아. 출산율만큼 사망률이 높아서 되겠냐? 응?”
왕자님은 밥을 먹다 말고 언성을 높였다.
“수도와 국경 지역의 어마어마한 범죄율을 봐. 그것도 다 도둑, 소매치기야. 그래 봐야 거지들이 서로 주머니 터는 격이라는 게 더 슬퍼. 이왕지사 모여서 살찐 귀족 창고를 터는 게 낫지.”
실제로 궁에 들어오기 전까지 동네에서 소문난 소매치기 꼬마였던 마르코가 찔끔했다가 뒤에 가서 화들짝 놀랐다.
귀족의 창고를 털라니. 왕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칼은 누누이 ‘푸른 피’를 강조하지 않았던가.
“예에? 그랬다간 싹 다 죽을 텐데요. 누가 목숨을 걸고 그런 짓을 해요?”
왕족, 귀족을 아우르는 린드버그의 노블리스들과 평민은 종족 자체가 다르다고 칼은 매일 세뇌하듯 말하곤 했다.
지금의 칼은 아니지만 하여간 그랬었는데.
“그것부터 뜯어고쳐야 해. 누구 마음대로 자율 심판권을 주냐. 나라 꼴이 이 모양인 게 다 귀족이나 왕족 잘못인데, 그건 누가 심판해 주냐고. 아으, 나는 왕잔데 왜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없어!”
왕자가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가 주먹이 아픈 듯 호호 입김을 불었다.
“더 열받는 게 뭔지 알아? 이게 전부 외부의 자료라는 거야. 하루에도 수십이 굶어 죽는다는데 린드버그는 자체적으로 하는 일이 뭐야? 다들 놀고먹는 데 혈안이 되어 가지고는. 망할 나라의 표본이 뭔지 알아? 먼저 모범이 되어야 할 공직자가 부패하는 거야.”
열받은 칼이 냉수를 들이켜며 식사와 전투라도 치르는 듯 우걱우걱 밥을 씹어 삼키는 것을 지켜보던 마르코는 조용히 일어섰다.
“왕자님이 식사를 하시는 동안, 저는 엘리자벳을 산책시키고 올게요.”
‘산책’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팔짝 뛰며 좋아하는 엘리자벳을 잠시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왕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삭막한 정원을 걸으면서 마르코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끔 히스테리를 부리긴 해도 매사 우아하고 깔끔하던 칼은 이제 부정부패 타도와 체력은 곧 국력이라는 그냥 보통의 청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요즘의 칼은 꼭 길거리를 배회하던 시절 대장 형님을 상기시켰다.
조금 껄렁하고, 살짝 욱하고, 동생들을 잘 챙기지만 귀족 혐오가 극에 달한 나머지 진짜로 쳐들어갔다가 행방불명된.
“끼잉?”
네가 하는 불손한 생각을 그치라는 듯 엘리자벳이 줄을 잡아당겼다.
물론 싫다는 건 아니었다. 매질을 안 하고 물건을 집어 던지지 않는 왕자님이 좀 어색해서 그렇지.
게다가 레아 공주와의 사이도 무척이나 좋아졌으니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