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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4화 (4/150)

4화

칼은 끈질기게 레아 공주를 찾아가 마침내 그전까지의 행동들을 용서받았다.

왕자님은 말씀하셨다.

〈누님이 내 목숨줄이야. 너도 누님께 성심성의껏 잘하도록 해. 알았지?〉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왕자님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나저나 요즘 서민 취향으로 노선을 튼 왕자님은 오늘 저녁 연회에도 수수한 차림을 고집하시려나.

왕자님을 직접 치장하는 즐거움 하나를 빼앗긴 건 못내 아쉽다. 마르코가 푹 한숨을 쉬었으나 소년의 입꼬리는 잔잔히 올라갔다.

* * *

꼭 참석해야 하는 연회라더니, 젠장.

저만치서 왕이라도 된 듯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키치너 재상을 보니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

재상의 첫아들이 결혼을 한다는데 그 피로연을 왜 자기 집이 아닌 왕성에서 하는 건지 모르겠다.

투실투실하고 기름기 많은 다른 귀족들 사이에서 허리가 꼿꼿하고 나이에 비해 균형 잡힌 몸을 한 재상은 까마귀 사이 고고한 학 같았다.

왕좌에 늘어진 왕보다 더 왕 같은 자태 아니냐.

거기다 왕비는 재상의 옆에서 같이 축하를 받고 있었다. 둘이 모종의 관계라는 것에 내 왼쪽 새끼손가락 손톱을 건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왠지 모르게 재상은 처음부터 불쾌했다.

고압적인 말투며, 무표정을 가장해도 상대를 업신여기는 걸 숨기지 못하는 눈빛이 나를 볼 때마다 번들거리는 게 싫었다.

내가 칼 린드버그가 된 이후.

기억을 잃었다는 걸, 정확히 사람이 바뀌었다는 걸 들키기 싫은 것과 어떻게 해야 죽음을 피하며, 자유롭게 살 것인지를 궁리하느라 방에 칩거한 지 어느새 두어 달이 지나고 있었다.

그나마 누이인 레아 린드버그를 만나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하는 큰 행사나 지방 귀족까지 참석하는 연회, 혹은 왕의 부름까지 피할 수 없긴 해도 말이다.

정말, 이게 창살 없는 감옥이지. 빨리 어떻게 하지 않으면 미치기 딱 좋을 환경이다.

목이 꽉 죄는 옷을 늘이며 귀족 청년들을 피해 레아의 옆에 딱 붙었다.

전에 없이 좋아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사람들이 수군댔지만 그건 안중 밖이었다.

“밖에서 너무 친한 척하지 말렴.”

레아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작게 속삭였다.

“저도 그냥 피신 온 거예요. 저쪽은 숨이 막혀서요.”

“하긴 저 악취가 보통 악취가 아니지. 게으름과 탐욕의 냄새.”

레아는 백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음소리를 냈지만 그녀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아 귀족들은 그녀가 웃는 줄도 몰랐을 거다.

난 차마 따라 웃을 수 없어 그녀에게 조금 가까이 붙었다.

우리 둘은 테라스와 가까운 벽에 딱 붙어서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자연 바람을 쐤다.

저의 눈동자 색과 딱 같은 심플한 사파이어 목걸이를 찬 레아는 정말 여신 그 자체였다.

프릴이 덕지덕지 붙어 촌스럽고 무거운 드레스도 그녀의 미모를 망치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이 소설 속 여주인공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호들갑을 떨며 왕자를 두둔하는 부모의 태도와 덤덤하지만 어두운 표정의 공주를 처음 대면했을 때 칼 린드버그가 어떻게 악역이 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온갖 혜택의 중심에서 싸가지가 바가지로 자란 왕자가 학대나 다름없는 형태로 공주를 괴롭혀 왔다는 거다.

왕자에게만 관심이 쏠린 부모는 그것을 방관했고 그것은 계속 공주에게 트라우마를 안겼겠지.

내가 칼 린드버그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더한 짓도 하지 않았을까.

칼 린드버그가 그녀의 남동생이니까 가장 마지막까지 악역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 거다.

착한 여주인공은 아무리 싫은 놈이어도 차마 직접 처단하긴 어려웠을 테니.

그녀가 여주인공이든 아니든, 나는 칼 린드버그가 된 죄로 그녀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욕심이 지나쳐서 그녀의 유일한 취미인 승마를 빼앗고, 오랜 친구 같은 말까지 효수당하게 한 죄. 비록 내가 한 일은 아니었어도 모른 체하며 넘어갈 수는 없었다.

처음, 대뜸 찾아가 사과를 건네는 내게 그녀도 그녀의 시녀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낙마 후에 기억이 오락가락한다는 설명을 덧붙이자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그 후로 자주 이야기를 나누게 된 우리는 한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없으니 몰래 만나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내 동생 재영이와 나이도 같고 어딘가 닮은 느낌이 들어 금방 누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사려 깊고 영민했다. 기억을 잃은 나를 배려해서인지 과거의 칼 린드버그의 잘못을 구태여 꼬집지 않는 점이 특히 그랬다.

정의로운 주인공이 아름다운 공주를 만나 어찌저찌 사랑에 빠지고 나서 그 후에도 나쁜 짓을 일삼는 칼 린드버그를 처단한다. 과연 순정 만화 마니아인 전재영이 좋아할 만한 스토리라 생각했다.

드디어 악역인 칼 린드버그가 죽고 나서 두 주인공이 꽁냥꽁냥 해피한 모습을 보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소설의 완결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이 시점에 뭔 휴재야! 행복한 거 더 보여 달라고!〉

절규와도 닮았던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귀에 맴맴 맴돌았다.

“뭘 그렇게 빤히 보니?”

“누님이 오늘따라 더 꽃 같아서요.”

“칭찬하는 방법이 구식이구나. 나는 꽃보단 검이 되고 싶은 사람이야.”

그럼에도 싱긋 웃는 레아의 올라간 입꼬리가 꼭 재영이를 빼다 박았다.

떨어져 있던 시기가 길기도 했고, 재회하고도 바쁘기만 한 오빠 때문에 살갑게 지내는 법을 잊었지만 실없는 농담에는 무안하지 않게 웃어 주던 내 세상의 전부.

그 소원 오빠가 대신 이루어 주마.

막막하고 삭막한 새 인생에 새 목표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나는 오랜 괴롭힘에 지친 그녀의 소원으로 이 소설 속에 떨어진 것이 아닐까?

아니면 재영이의 유언을 이루어 주라고 보내진 걸까?

그렇게 완벽하다는 주인공, 그 옆에 이렇게 멋진 히로인을 놓고. 박수 치며 퇴장하는 것.

그게 사실 이 세계가 내게 바라는 역할은 아닐까.

그 순간엔 사람들이 내뿜는 연초 향이나 돈 냄새보다 레아의 몸에서 나는 레몬그라스 향만 코끝에 맴돌았다.

불안정한 마음을 다독이고 확신을 심어 주는 향이다.

결국 나는 확신했다.

뭘 확신했냐고?

여주인공이 레아 린드버그가 아니라 해도, 남주인공인 아드리안 헤네켄이 내 누이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 * *

레아 린드버그와 가까워진 이후 나는 차곡차곡 계획을 짰다.

무슨 계획이냐. 이름하여 저승 탈출, 아니 ‘소설 탈출 넘버 원.’이라는 계획이다.

주인공이 날 죽이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기보다는, 먼저 이 지긋지긋한 린드버그 성을 뜨고 싶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의 외관이나 매 끼니 차려 나오는 진수성찬보다 도무지 성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꾀죄죄한 사용인들의 차림새와 어두운 표정, 푹 꺼진 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날이 쌀쌀해질 무렵엔 제대로 된 갑옷도 없이 구리판을 덧댄 가죽 제복 하나로 사철을 버티는 경비병들이 곳곳에서 불을 때는 연기가 올라왔다.

그들이 문을 열면 복잡한 문양을 가진 마차에서 돼지 같은 귀족들이 내린다.

귀족 뒤에서 부복하고 있는 그들의 표정이 꼭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차마 표출할 수 없는 분노를 불씨처럼 가슴에 지니고 알아서 꺼질 때까지 소모하며 살아가는 인생 위에 내가 있다.

그 사실이 매일 마음을 갉아먹었다.

놀랍게도 왕족의 성 밖 외출은 국법으로 금지당했다.

왕족이 성을 떠날 땐, 죽거나, 결혼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모두 지긋지긋했다.

무작정 도망을 친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수많은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 나갈 자신도 없었을뿐더러 양심의 가책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홀라당 도망가 버리면 남은 누이는 어떻게 하는가.

레아 공주를 노리는 늙어빠진 귀족들이 이때다, 하고 들고 일어나겠지.

제국과의 혼담도 오가는 마당에 귀족들은 공주가 헤네켄의 황후가 되는 걸 막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

미친놈들 천지구나.

거지 같은 나라 꼴을 어떻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치 참여권 없음, 아는 것 없음. 도와줄 충실한 시종은 아직 어린 마르코뿐이라 성공 불가능.

총체적 난국이었다.

결국 뇌세포를 갈고 갈아서 쥐어 짜낸 계책은…….

담대함 한 스푼과 무모함 두 스푼을 넣어 남자 주인공을 끌어들이는 것뿐이었다.

* * *

“지, 진짜 왔어요!”

문을 발칵 열고 들어온 마르코가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와 달리 레아는 미동도 없이 체스의 말을 옮겼다.

“더블 어택.”

그녀의 하얀 나이트가 검은 킹 코앞에 와 있다.

“기억이 오락가락한다는 게 사실이구나. 다른 건 다 몰랐던 주제에 체스는 우아함의 극치라며 열심히 배웠던 것 같은데.”

가느다란 손가락이 세 말을 한 번에 쥐고 체스판 위에서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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