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 *
말이 계속 하늘을 날면 어쩌나 했지만 말들은 날다가도 땅을 달리기를 반복했다.
고삐 주변으로 형형색색의 보석이 장식되어 있는데, 그것이 마정석이라는 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말이 솟구칠 때마다 먹먹해지는 귀를 뚫으려 침을 삼켜 댔다.
승마복을 차려입은 레아가 시녀를 뒤에 태우고 황태자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고 그 뒤에는 엘리자벳을 끌어안은 마르코가, 그리고 벨프리와 다른 기사들이 쫓아왔다.
“걱정은 린드버그에 놔두시죠!”
“예?”
“지금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린드버그가 이 일을 문제 삼을까 봐.”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상황에서도 황태자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고막에 닿았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걸 어떻게 모르냐는 듯 황태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도는 저희도 생각하고 움직이니까요. 왕자와 공주는 린드버그의 폭동을 피해 우선적으로 헤네켄에 몸을 의탁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조치해 두었으니 쓸데없이 불안해하지 말란 말이에요.”
“예에?”
무슨 조치? 어떻게 했다는 말이야?
“아니면, 뭐 다른 속셈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황태자의 음성은 적당히 낮아 듣기 좋았다.
내가 생각해도 다른 속셈이 있지 않고서야 갑자기 편지로 ‘일단 우릴 데려가 주세요.’ 따위의 요청은 하지 않을 것 같지만, 의뭉스럽게 굴어 괜한 의심은 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닙니다! 진짜 도와달라고 부른 게 맞아요.”
천천히 말을 하강시키면서 금방이라도 나를 떨굴 것처럼 굴길래 도리질을 치며 황태자의 허리를 꼭 붙들었다.
“그럼 다행입니다.”
한참을 날다, 뛰다를 반복하던 말은 린드버그 왕도에서 약간 떨어진 숲에 일제히 내렸다.
땅에 발을 딛고 선 말들이 푸르르, 하고 투레질을 했다.
“여기서부턴 마법진을 타고 헤네켄으로 이동할 거예요.”
“마법진, 이게 마법진이군요.”
복잡한 수식이 새겨진 바위가 빙 둘린 공터에 린드버그의 병사들 대여섯이 군기가 바짝 잡힌 모양으로 지키고 섰다.
“협정 때문에 함부로 발동시키는 것이 금지되어 있긴 하지만, 타국의 침범을 쉽게 허용할 수 있다는 맹점이 여전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린드버그의 방비는 너무 허술하군요.”
검이 무거워 보일 만큼 마른 병사들의 상태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정말 공감합니다.
무거워 보이는 갑옷을 걸치고서도 힘든 내색 하나 없는 헤네켄의 기사들에 비하면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다.
황태자는 갑자기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린드버그 귀족 중, 국방비로 사용되는 예산을 훔쳐먹는 쥐새끼가 있는 게 분명해요.”
그것도 매우 공감합니다.
귓가에 닿는 입김이 간지러워 귓불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자 황태자가 큭, 하고 웃었다.
벨프리는 기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 고삐를 쥐고 진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도 황태자를 따라 안으로 이동하면서 수식이 새겨진 바위를 찬찬히 살폈다.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문! 열두 수식을 전부 발동시킬 마력을 가진 자만이 이 문을 열 수 있음.
“뭐야, 이게.”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람?
사실 마법 수식을 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때는 믿을 수 없어 외면하긴 했지만. 역시 맞았다.
이 세상의 마법 수식은, ‘한글’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국 사람이 쓴 소설이다 이건가? 반갑기는 하다만 차원문 이름이 왜 이러냐고.
“마법 수식을 해독할 수 있습니까?”
은근한 어조로 황태자가 물어 왔다.
놀랍게도 나는 그 순간, 그의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겨진 의심을 읽을 수 있었다.
나이도 어린 게 제왕의 기질을 타고났다 이건가, 웃을 때를 제외하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를 표정을 기본으로 깔고 있었는데.
뭔지 모를 느낌이 ‘나는 지금 널 의심하고 있으니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혼나’ 하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음, 아뇨?”
일단 잡아뗐다.
여기서 쓰는 언어와 한글은 엄연히 다른 것. 마법을 쓰지도 못하는 주제에 수식을 읽을 수 있다고 하면 이상해 보일 게 뻔하니까.
“역시, 그렇군요.”
은근히 무시하는 말투에 열은 좀 받았지만 난 헤헤, 하고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황태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쪽 입꼬리를 쭉 끌어당겨 웃으며 말했다.
“원래 천재와 미친놈은 손바닥과 손등 정도의 차이랍니다. 왕자가 그간 미친놈 행세를 하면서 천재성을 감추고 있었던 건 아닌지 궁금해서요.”
황태자는 칼 린드버그 왕자를 ‘미친놈’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구나.
그런데도 와 줘서 고맙다.
“그랬다고 하면 믿어 주십니까?”
괜스레 너스레를 떨어 보았으나 황태자는 금세 바늘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차가운 얼굴을 해 보였다.
“아뇨, 엄밀히 따지면 왕자는 미친놈이 아니라 천방지축이었으니까요.”
칼 린드버그의 망나니 짓은 헤네켄에도 소문이 파다하게 난 것이 분명했다.
다 사춘기가 심하게 온 탓이라 얼버무렸다.
칼 린드버그가 망나니가 된 건 다 부모 교육의 부재 때문이라고. 이제라도 정신 차렸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러나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상황이 별로 안 좋았다.
벨프리가 뒤에서 “빨리 진이나 발동시키십쇼.” 하고 퉁명스레 말했다.
아까 성에서 깍듯하고 예의 바르던 청년은 린드버그 성을 빠져나오자마자 이상하리만치 격이 없어졌다.
깍듯했던 건 다른 린드버그의 일원이 있는 앞에서 주군을 망신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가.
벨프리가 틱틱거려도 황태자는 꼼짝도 안 했다.
“지금 하려고 했어. 그렇게 재촉 안 해도 된다.”
“성을 떠난 지 벌써 2시간이 지났다고요. 키치너가 제 말 엉덩이를 피가 나도록 때리며 달려오고 있을 거란 말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벨프리가 기사들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나와 황태자, 그리고 레아와 벨프리를 둘러 벽을 만들었다.
주변의 다른 병사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듣게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벨프리는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3시간이 지나면 폭동을 일으키던 것들이 다시 철수하기로 했다니까요. 그 전에 왕자님이 잡혀 버리면 죽도 빵도 안 된다고요.”
“잠깐만요, 폭동을 진짜 일으켰단 말입니까?”
당황을 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린드버그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겠는가.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 급급한 사람들이라, 삽자루 하나도 들 힘이 없어서 여태 가만히 있었던 건데.
내가 소설 속 두 주인공을 만나게 해 주거나 말거나 귀족을 제외한 린드버그 사람들은 피 한 방울 흘려선 안 됐다.
그래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한 건데.
폭동을 부추겼다는 말이야?
“진짜 폭동이 아닙니다.”
벨프리가 주머니에서 외알 안경을 꺼내 한쪽 눈에 꼈다.
아까 주인공으로 오해한 것이 무색하게, 전형적인 지능형 캐릭터처럼 보였다.
총천연색의 머리카락에 은줄을 매단 모노클까지 더해지자 내 안의 흑염룡이 꿈틀대는 것만 같다.
그게 아니라 걱정이 앞서서 배 안쪽이 꿈틀거리는 거였지만.
“진짜 폭동이 아니면요? 제가 편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가능한 한 시민들, 아니 평범한 사람들의 피해는 축소하고 싶은데요?”
당황스러워서 평민이라는 단어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벨프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폭동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은 훈련받은 정예 병사입니다. 그들이 하는 건 낫을 들고 성벽을 두드리며 아우성을 치거나 지나가는 마차를 습격하는 정도입니다. 사람은 다치게 하지 않지만 약간의 재산 피해를 줄 겁니다. 북쪽을 제외하고 동, 서, 남으로 동시에 행동을 개시하기로 해 놨습니다.”
북쪽은 왕도와 가까운 데다가 우리가 이동을 하는 길목이라 놔두었다고 했다.
그들의 철두철미함에 되레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언제, 그런 걸 다 준비했답니까?”
동시에 린드버그 내에 그런 일을 벌일 만한 헤네켄의 병력이 잠입했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스파이를 수십, 아니 수백을 꽂아 넣은 셈이니까.
파병도 아니고.
레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군사 기밀을 발설해 대는 벨프리의 자신감에 위축되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어요. 앞으로 더 큰 일을 해치울 건데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으면 어떻게 해요. 나한테 편지를 쓴 그 왕자가 본인은 맞습니까?”
황태자가 쏘아붙였고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뒷일을 아주 생각 못 한 건 아니었지만, 무턱대고 움직인 꼴이라니.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오롯이 주인공에게 기대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산재했다는 것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의 위축된 마음을 눈치챈 벨프리가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왕자님이 이렇게 한발 나서 준 것만으로도 린드버그에는 큰 변화가 생길 겁니다. 그것보다, 빨리 출발하자니까요.”
부루퉁한 표정을 한 벨프리는 황태자에게 삿대질까지 해 가며 빨리 문을 열라 종용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느긋했다.
일부러 느긋하게 굴며 내 반응을 보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치가 우릴 따라잡으면 어쩔 건데, 막말로 전쟁이라도 할 거야, 어쩔 거야.”
아니, 전쟁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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