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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8화 (8/150)

8화

도심의 한가운데에 넓고 긴 포장도로를 깔고 그 끝은 여섯 개의 첨탑을 가진 성과 연결이 되어 있다.

본체는 거대한 성벽에 가로막혀 삼분의 일 정도만 보였지만 그 크기와 위용이 그려졌다.

“이렇게 도로를 깔아 둬도 괜찮나요?”

도시를 수호하는 망루 두 곳 사이에 성까지 직통으로 이어지는 대로는 아름답긴 했지만 안전하진 않을 것만 같았다.

입을 벌리고 구경하는 내 옆에 말을 바짝 붙인 벨프리가 자랑스레 대답했다.

“이 길을 통해서 헤네켄의 황성에 침입을 하려면 수십 개의 포탑에 몸이 가루가 될 각오를 먼저 해야 하고 그다음엔 위험한 것들이 잔뜩 도사리고 있는 강에 몸을 던질 준비를 해야 해요.”

어쩌다 살아남아 성안에 침입을 한다 하더라도 요새 그 자체인 성을 빠져나가기 어려우니 궁금하면 해 봐도 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벨프리의 설명은 한참을 이어졌다.

석회에 화산재를 섞어 뛰어나게 경도를 높인 도로부터 시작해서 성벽의 두께까지 나불나불 설명하는 벨프리를 보더니 황태자는 “린드버그가 헤네켄을 침범하면 제일 먼저 목숨을 버려야 하는 건 너다, 이 충신아.” 하고 핀잔을 줬다.

벨프리는 입을 다무는 대신 한쪽 귀를 막고 꿋꿋하게 한 황제가 서거하면 성벽을 한 줄 낮추는 풍습에 대해서까지 설명을 했다.

“헤네켄 황실의 강함이 한낱 벽돌 따위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함입니다.”

그 당돌함에 되레 말문이 막힌 황태자는 저 성벽이 자기 키만큼 줄어들려면 수백 년은 걸릴 거라고 하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린드버그는 수백 년이 지나도 저 성문을 못 넘을 거라는 의미인 것 같기도 했다.

* * *

말들이 줄지어 바닥에 굽을 대고 섰다.

다각다각, 지면을 마찰하는 소리가 부드럽고 듣기 좋았다.

사람들은 호기심과 경외가 섞인 시선으로 이쪽을 응시하지만 자신들이 하는 일을 멈추고 달려오거나 혼선을 만들지는 않았다.

질서와 절제가 뭔지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는 황태자의 이름을 연호했고, 황태자는 그에 화답했다.

어린아이들은 꽃을 던지기도 했다.

그들이 자신의 나라와, 또 그의 지도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린드버그의 왕족이 이렇게 행차를 한다면, 우선 포장되지 않는 도로에 마차 바퀴가 망가지고 마차가 멈추면 사람들이 눈치를 보다가 매여 있는 말을 훔쳐 달아날 것이다.

물론 그 뒤를 쫓는 경비병들에게 잡혀 목숨을 잃게 되겠지만.

지나친 굶주림은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게 만드니까.

연신 한숨을 쉬는 내 뺨에 황태자의 등이 닿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는 알겠지만, 지금은 헤네켄의 사람들에게 조금 웃어 줘요. 다들 기대하고 있군요.”

황태자의 말대로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 모습일까.

어색하게 웃으며 한쪽 손을 들어 보였더니 아이들이 꺄르륵 웃으며 어른들 뒤에 숨었다.

귀여워.

계속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황태자의 등에 닿았던 뺨에서부터 가슴이 따듯해졌다.

그제서야 여유를 찾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시선을 유달리 잡아끄는 몇 개의 장면이 있었다.

테이블 아래로 다정하게 손을 맞잡으며 입을 맞추는 두 사람.

아이를 안고 이쪽으로 아기의 손을 흔들어 보이는 부부.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길거리에서 얼싸안고 축하받는 사람들.

전부 같은 성별의 사람들이다.

솔직히 엄청 놀랐지만 티 내지 않았다.

원래 나라가 발전하려다 보면 편견을 제일 먼저 버려야 하는 법이랬다.

딱딱하게 굳은 머리로 무슨 놈의 발전을 꾀하겠냐고 예전 직장 동료가 푸념하듯 말했었지.

그때 상당히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 진정한 자유는 편견을 내던지는 것에서 나온다.

내가 생각해도 린드버그는 구닥다리다.

암, 그렇고말고.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성별도 없다잖아.

“여러 의미로 꿈같은 나라네.”

혼자 중얼거린 소리가 들렸는지 황태자가 힐끔 돌아보길래 배시시 웃어 보였다.

황태자는 마주 웃다가 앞을 보고는 도착할 때까지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황성이 가까워질수록 황태자의 체취도 짙어졌다. 등에 열이 오르는 듯 뜨끈뜨끈하기도 했다.

아침부터 달려와서 많이 피곤했나.

문득 뒤를 돌아보니 하얗게 질린 마르코와 입을 벌리고 헥헥 소리를 내는 엘리자벳도 있다.

이 여정이 스트레스가 된 탓이겠지.

나라의 흥망성쇠를 두고 볼모나 다름없는 형태로 왔으니 귀빈 대접은 바라지 않아도, 레아나 마르코가 쉴 만한 공간은 얻었으면 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선 황제 폐하께서 동쪽에 와인 저장고를 따로 지으셨는데 마정석을 수십 개를 가져다 박았거든요. 온도, 습도 조절뿐만 아니라 방호 마법도 발동을 시킬 수 있어서, 여차하면 방공호로 쓰일 수 있게 해 뒀어요.”

벨프리 헨드릭, 너 아직 안 끝났냐?

황태자의 귀 옆 근육이 볼록 나와 있다.

이를 앙다물고 있는 게 분명했다.

* * *

건축 덕후 같은 벨프리의 ‘헤네켄 황성의 건축양식과 발전’ 강의는 도개교가 내려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덕분에 헤네켄의 성 구조에 대해 아주 빠삭하게 알게 된 기분이다.

놀랍게도 황태자보다 먼저 벨프리의 입을 막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레아 공주였다.

“핸드릭 소공자, 내 시녀는 말을 못 해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대의 입술을 보며 부러움에 뼈가 삭을 지경이랍니다.”

시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녀의 눈빛이 정말로 안타까워서 보는 벨프리까지 찔끔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벨프리는 정말이지 얼굴하고 성격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흰 피부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오묘하고 아름다운 눈동자와 작은 콧잔등이 새침데기 같은 인상을 주는데, 말이 저렇게 많을 줄이야.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열을 맞춘 병사들이 우렁차게 기합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양쪽에 날이 있는 검을 하늘로 치켜올렸다가 황태자가 지나갈 때 순서대로 착착착 집어넣는 폼에서 예전 육군 의장대의 생활을 떠올렸다.

나도 그땐 참 멋있었지, 어린 동생을 홀로 두고 갑자기 휘뚜루마뚜루 입영하게 돼서 속은 썩어 있었지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그만하자 이제, 너는 칼 린드버그야.

기사들은 정문까지 일행을 호위한 뒤 모두 일사불란하게 사라졌다.

서류 작업이 밀렸다던 벨프리도 종자에게 말을 넘기자마자 후다닥 안쪽으로 사라졌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전하.”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로맨스 그레이의 정석 같은 눈가 주름과 포마드로 넘긴 헤어 스타일이 멋진 신사였다.

부스럭거리는 재질의 옷이 주름 하나 없고 가벼운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내 그대를 생각해서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버번 백작.”

버번이라고?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버번 백작이 “이분이 소문의 그분이시군요.” 하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나이 찬 남자들이 모여서 애첩 자랑에 열을 올리는 장면만 반년을 보다가 오랜만에 어른 같은 어른을 본 탓에 위치를 망각하고 같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다시 허리를 펴고 나서야 뭐가 잘못된 건지 눈치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웃음으로 무마시켰다.

황태자도 레아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고 버번 백작은 “듣던 것과는 사뭇 다르시군요.” 하며 돌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칼, 헤네켄, 헨드릭을 지나서 이제는 버번이냐?

얼마나 다양한 술이 튀어나올지 정말 기대가 될 지경이다.

“먼 걸음 하셨으니 많이 피곤하시겠군요. 외성을 치워 놓았으니 먼저 휴식을 취하시겠습니까?”

버번 백작은 따듯하게 웃으며 휴식을 권유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다시 넙죽 허리를 숙이고 말았다.

백작의 웃음소리가 한결 높아졌고 레아는 아주 얼굴을 구겼으며, 마르코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허리를 넙죽 굽혔다 펴는 칼 린드버그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드리안 헤네켄은 정말이지 눈앞의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버번 백작이 시종을 시켜 레아 공주와 칼의 하인을 데리고 간 뒤, 아드리안은 왕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겠습니까?”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뺨은 여전히 붉었다.

복숭앗빛 뺨은 입을 대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 기묘한 충동을 이겨 내기 위해 아드리안은 먼저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칼 린드버그는 분주히 쫓아오면서도 주변을 구경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알에서 막 깬 새끼 오리를 보는 것만 같았다.

아기 오리는 귀엽긴 하지만 예쁘지는 않으니까.

말랑하고 우유 냄새가 나는 아기 고양이인가?

불쑥 튀어나오는 간지러운 감상에 놀란 황태자가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가 내렸다.

왕자는 여기저기 시선을 두며, “오, 오, 오오.” 하는 특이한 감탄사를 내질렀다.

시녀들이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으며 지나갔다.

“와, 헤네켄은 정말 활기차군요.”

아드리안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칼이 말했다.

그렇게 열심히 구경하고, 감상이라고 뱉는 것이 고작 ‘활기차다.’인가.

또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웃을 상황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왕자는 자꾸만 자신을 웃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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