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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9화 (9/150)

9화

“수도 중심은 더욱 활기찹니다. 적당한 때에 나가서 구경하는 것도 가능하니 필요하다면 요청하세요.”

“그래요?”

나갈 수 있다니까 칼 린드버그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린드버그에서의 우중충하고 긴장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황태자의 시선에 머쓱해진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아, 저. 아무래도 린드버그 분위기가 좀 흉흉하잖아요. 그래서 재미가 없었거든요.”

재미가 없었다고? 그렇게 재미가 없어서 취미 삼아 패악을 부려 댔나?

단연코 그 성에서 가장 즐겁게 산 사람일 텐데.

아드리안은 그가 ‘아는’ 칼 린드버그와 눈앞의 칼 린드버그가 가지는 미묘한 간극을 좁힐 수가 없었다.

그걸 알아내고 싶어서 따로 시간을 가졌지만 점점 모르게 되었다.

황태자의 마음도 모르고 칼은 조잘조잘 잘도 떠들었다.

“왕래하는 사람들은 다 아저씨들 뿐이라 제 또래 친구를 사귈 기회도 없었고, 사용인들은 왕족과 말을 섞는 게 금지되어 있어서 더 그랬어요.”

“음?”

사용인들과 친구를 하려 했다고?

“물론 마르코가 있으니까 괜찮긴 하지만, 아. 엘리자벳도 있고. 누님도 계시고 하니까 그나마 버틸 만했죠.”

여기는 날씨도 좋고 젊은 친구들도 많네요. 하고 덧붙이며 어린 시종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을 정말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칼 린드버그가 손가락을 요리조리 접어 가며 중얼거리더니 앗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표정 관리를 했다.

“뭐, 그랬습니다.”

나폴거리는 속눈썹에 아쉬움을 주렁주렁 매달고는 덤덤한 척이라니.

황태자가 사람 좋은 척을 하며 웃었다.

“친, 구를 만들고 싶었다면 공교롭게도 우리가 동갑내기니 차차 친해지면 되겠죠.”

칼 왕자의 가냘픈 어깨가 외로워 보여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긴 했다.

엄밀히 따지면 둘은 친구 사이보다 더 찐한 정을 나눌지도 모르는 사이였지만, 부부 사이에도 우정이 있다고 하니 왕자가 원한다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예? 아, 아니에요. 어떻게 황태자 전하랑 친구를 합니까? 하하하.”

손사래까지 치며 거절할 일인가?

기분이 나빠진 황태자는 꼭 평민 같은 언동을 하는 왕자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훑었다.

왕자의 얼굴이 언제부터 이렇게 탄력 있게 살이 올랐지? 첩자가 보내오는 초상화에서는 매번 비쩍 마른 몰골이었다.

기름을 덕지덕지 발라도 감출 수 없는 푸석한 머리카락도, 늘 뾰족하게 올라가 있는 눈꼬리도 황태자의 취향은 아니었다.

열 살의 왕자는 어땠었나.

그때는 그래도 제법 볼이 통통하고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두 달에 한 번.

일주일 내내 침실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 황제와 황후 부부는 역대 황족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금슬을 자랑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터라 황태자도 저를 같은 마음으로 사랑해 줄 오메가를 손꼽아 기다렸다.

우성, 열성이 뭔지. 쉬이 짝을 찾기 어려운 때에 린드버그의 칼 왕자가 우성 중의 우성 오메가로 판별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린드버그에서 간간이 보내 주는 초상화 속 예쁘장한 소년을 매일 들여다보며, 홀로 마음을 키우다 10살 생일에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는데, 거기 있던 건 곱게 차려입은 인형이었다.

서리 여왕처럼 차가운 얼굴에 오만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인형.

제국의 황태자가 찾아왔는데 누구도 반기지 않아서 사절단이 전부 당황할 정도의 분위기, 그 중심에서 칼 왕자는 까닥까닥 손을 흔들었다.

아드리안에게 한 손을 내밀고 입을 맞추라 종용하던 칼에게 아드리안은 “역겨워서 못 하겠다.”라고 대답했고 칼은 아드리안의 뺨을 매섭게 내려쳤다.

역겹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나이가 어린 오메가는 페로몬 따위 내뿜지 않는다.

그런데 어린 칼에게선 코를 찌르는 듯 역한 장미 냄새가 났다.

황태자가 뺨을 맞는 순간에 누구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도 재상이었던 키치너는 되레 어린 황태자가 예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나무랐다.

헤네켄의 기사들은 분기탱천했지만 황태자의 명 없이 타국에서 칼을 뽑는 건 전쟁 선포나 마찬가지여서 화를 삭이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여러 해를 지나며 왕자의 만행은 더 눈 뜨고 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황태자는 왕자가 온 김에 꼬투리를 잡아 린드버그를 족치리라 다짐했던 것이 진짜 속내였다.

그런데…….

지금 그 앞에 있는 건 아드리안이 그려 마지않았던 이상형이었다.

독기가 다 빠진 눈동자는 헤네켄에서도 손꼽히는 휴양지인 유지니 해협처럼 빛났다.

앙다문 입술이 호선을 그릴 때마다 아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턱에서부터 깔끔한 선으로 둥근 어깨까지 떨어지는 목선을 보고 있노라면 침이 꿀꺽 넘어갔다.

거기다 은은히 풍기는 제비꽃 향기까지.

황태자는 그가 알파인 것을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었지만 실감한 적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에게 찾아온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보드라운 털을 가진 오메가는 그를 단숨에 알파로 자각시켰다.

하도 눌러 둬서 질질 새기 시작한 페로몬이 당장이라도 저곳에 섞이고 싶다 아우성을 쳤다.

황태자의 가슴 안에서 꿈틀거리는 어떤 욕망을 모르는 칼 린드버그는 삼삼오오 모여 웃는 어린 하녀들을 아비가 딸을 바라보듯 하며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보다 못한 황태자가 자연스레 그의 팔을 잡고 에스코트했다.

그는 팔이 잡히는 줄도 모르고 하녀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성질이 날 것만 같아 아드리안은 칼 왕자를 근처에 있는 파티오에 착석하도록 했다.

“어쨌든. 이제 솔직하게 이야기 좀 하시죠. 왕자는 뭘 하고 싶은 겁니까?”

눈치 빠른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두 사람의 등에 쿠션을 받치고 차와 과일을 올렸다.

따듯한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왕자가 잠깐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일단 편지에는 들킬까 염려스러워 다 설명을 못 했는데도 저희를 헤네켄에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의 검은 속내를 파악하고 싶었으나, 장렬히 실패했다.

첫마디로 인사를 꺼낼 줄은 몰랐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 인사치레는 됐습니다. 우리 사이에.”

“하하, 그런가요?”

왕자의 눈썹이 조금 아래로 처졌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늘 올라가 있던 눈썹이 내려간 것만으로 이렇게 인상이 달라질 수 있나 하며 연신 그의 얼굴을 살폈다.

매일 밤 이를 득득 갈며 상기시켰던 10년 전의 어린 칼 린드버그의 얼굴조차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분명 닮았지만, 어딘가 달랐다.

‘그런데, 어디가 달라졌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단 말이지.’

말을 고르려는 듯 꿈틀거리는 입꼬리도 인상적이었다. 칼 린드버그는 하고 싶은 말을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내뱉어서 늘 구설수에 올랐다.

잠깐의 인내 후에 붉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용건을 뱉어 내는 장면을 아드리안이 홀린 듯 보았다.

“린드버그는 귀족들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지고 있어서, 백성들이 더 이상 살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제법 잘 파악하고 있군.

린드버그는 꽉 찬 고름 같은 상태였다.

작은 바늘 하나 들어갈 정도의 틈만 보여도 분노한 평민들이 왁다글대며 쏟아질 것이다.

사실 이번 ‘가짜 폭동’은 그것을 유도하기 위함도 있었다.

왕자에겐 당분간 비밀에 부칠 테지만, 왕자가 바라는 것처럼 무혈의 반정은 있을 수 없었다.

황태자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왕자가 말을 이어 갔다.

“국고에 있는 건 전부 왕족과 귀족을 위한 것이지 백성의 것은 아닙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가 계속 ‘미쳐’ 있다가 정신을 이제야 차려서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스스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이 미쳐 있었다고?

뜻밖의 언어 선정에 아드리안이 눈을 크게 뜨자 칼 왕자는 다시 하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저도 압니다. 제가 무슨 짓을 하며 살았는지. 그게 뒤늦게 부끄럽고, 또 되돌리고 싶어서.”

왕자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반성하는 눈치였다.

“거기다가 누이의 혼처가 갑작스레 정해지는 바람에, 산재한 문제들을 해결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왕자는 눈을 도로록 굴리면서 아드리안의 반응을 살폈다.

“레아 공주의 혼처가요? 흠, 그것은 경사에 가까운 이야기처럼 들리는데요?”

아드리안이 심드렁히 말했다. 그의 시선은 꼼지락거리는 왕자의 손가락에 닿아 있었다.

“……그, 혼처가 일반적인 혼인은 아닙니다. 우선 상대는 이제 막 자작 위를 받은 변경의 귀족이었고 나이가 쉰 살은 된 데다, 못생겼고요.”

말하다 보니 사무친 듯 왕자의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알 만했다.

키치너 재상은 그녀가 알파로서 두각을 나타낼 만한 모든 경로를 다 막아 버리고 싶었을 테지.

린드버그에는 형질자의 존재조차 모르는 평민들도 많았다.

그녀를 변방으로 내몰고 나면, 아무리 대단한 알파라도 쉽게 정치에 발을 들일 수 없을 것이다.

보아하니 왕자는 그 자세한 내막은 모른 채 아리따운 누이가 팔리듯 시집갈 뻔한 것이 싫었던 모양이었다.

분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양 주먹을 꼭 쥐고는 눈은 눈물이 맺힌 양 그렁그렁했다.

“위치가 어떻든 나이가 어떻든, 용모가 어떻든 간에 사실 누님이 그 사람을 진정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라면야 제가 말릴 권한은 없지요. 그러나 그 혼사에 누님의 의사는 단 한 개도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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