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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10화 (10/150)

10화

격앙된 왕자의 반응에 아드리안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공주의 성장은 눈부시게 빨랐다. 아드리안보다 먼저 러트를 겪었고 그것을 훌륭히 혼자 견뎌 내었다. 그때가 아마 열다섯, 열여섯 그즈음이었을 거다.

알파의 첫 러트, 운이 좋으면 짝이 될 오메가와 보내겠지만 보통은 짝이 없는 상태에서 러트를 겪었다.

그 고통은 베타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라서 권력자들은 억지로 알파의 상대가 될 오메가나 혹은 베타를 그 자리에 밀어 넣는 게 일반적이었다.

문제는 베타 같은 경우 몸의 부담이 심해 영구적으로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았고 오메가와는 사랑 없는 결혼으로 이어진다는 거였다.

헤네켄에서는 제법 긴 시간을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투자했고, 마침내 유사 페로몬 효과와 진정 역할을 하는 술식을 연구해 냈다.

대부분의 마정석을 헤네켄에서 수입하는 린드버그라 아는데, 공주가 그 술식이 입력된 마정석을 구매한 것은 단 두 번뿐.

일정 시간이 흐르면 효과가 반감되는 마정석을 여태 두 개밖에 안 썼다는 것은, 발정기가 올 때마다 대부분 스스로 다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공주가 힘을 키운다면.

깜빡깜빡.

눈꺼풀에 가려져 있던 아드리안의 눈이 본능적인 투지에 불타올랐다.

좋은 라이벌이 생길 예감이 들었다.

칼 린드버그는 여전히 화를 내고 있었다.

“스물 한살짜리하고 쉰살이요. 아버지뻘이죠. 그게 말이 됩니까?”

형형한 눈빛을 하고 테이블을 쾅 내려치는 손길이 제법 야무졌다.

공주의 혼담이 오가는 그 자리에서 왕자가 바닥에 드러누우며 저지했다는 소식은 익히 접했다.

황태자는 쿡, 올라오는 웃음을 참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서, 본론은요?”

“아, 그래서 본론은 모추 산맥의 마정석 채굴권을 통째로 넘길 테니 린드버그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힘을 합쳐 주세요.”

단숨에 뱉어 낸 왕자가 천천히 벌어지는 아드리안의 입술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왕자가 무슨 수로 마정석 채굴권을 넘깁니까. 왕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저보고 그대 아비의 목을 치라는 것은 아니겠지요?”

황태자가 묻자 칼 린드버그는 외운 것처럼 줄줄 계획을 설명했다.

“옥새를 가져올 겁니다.”

“옥새를요?”

칼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 한 장에 옥새가 찍히면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공문서가 됩니다. 그건 마법이 걸려 있는 옥새니까요.”

옥새에 무슨 힘이 담겨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문데, 스무 해가 되도록 ‘미쳐’ 있었던 왕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아바마마는 이미 정치적 생명이 끝났어요.”

“어째서요?”

린드버그의 왕이 재상이 가져다주는 이상한 물담배에 중독되어 있다는 건 아드리안이 더 잘 알았지만 일부러 말꼬리를 잡았다.

“아바마마는 약 때문에 건강과 신뢰를 모두 잃었습니다. 키치너의 눈을 돌릴 약간의 시간을 벌면, 제가 가서 옥새를 들고 오겠습니다.”

왕과 왕비의 치마폭에 싸여 자란 칼 린드버그는 제 아비의 치부를 드러내면서도 무덤덤했다.

“옥새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고요?”

“……덤으로 그것도 좀 알려 주시면 잘 써먹겠습니다.”

말투도 눈빛도 결연하기 그지없건만 콧등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그가 얼마나 긴장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일단 고민을 좀 해 봐요.”

황태자는 적당히 식은 차를 마시며 왕자에게도 권했다. 왕자는 한숨도 쉬지 않고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순간 그의 파르르 떨리는 손을 잡아 주고 싶다고 아드리안은 생각했다.

20살. 아이도 어른도 아닌 경계선에서 몸만 부쩍 자라 버린 황태자는 칼 왕자가 이 성으로 온 뒤로 술렁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 * *

“그게 뭐야?”

마르코가 품에 한 아름 무언가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두툼한 종이봉투에서 달고 고소한 냄새가 올라와서 방금 밥을 먹었는데도 허한 기분이 들었다.

만면에 웃음을 띤 마르코는 자랑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시녀 누님들이 주셨어요.”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맛있어 보인다. 뭔진 몰라도.

“엘리자벳을 산책시키고 있는데 어떤 누님들이 우르르 오셔서, 나이가 몇 살이냐. 밥은 먹었냐 물으시더니 과자를 주셨어요.”

왕자 외 타인에게 친절을 받아 본 게 처음인 마르코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와, 대박. 이거 상투 과자잖아!”

봉투 안을 가득 채운 건 내가 아는 녀석이다.

아몬드 가루에 계란 노른자와 우유를 넣고 반죽해서 밤 모양으로 쭉 짜서 굽는 과자.

연한 갈색의 부드러운 쿠키에 침이 퐁퐁 솟았다.

마르코 건데, 손이 절로 가서 덥석 쥐고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한 앙금의 맛이 느껴진다.

“이야, 이거 제대로 만들었네.”

왕자님? 하고 부르는 마르코의 목소리도 못 듣고 세 개를 연달아 입에 밀어 넣었더니 목이 턱 막힌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어릴 때 자주 먹던 건데, 이걸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왕자님이 이 과자를 어떻게 아세요? 헤네켄의 전통 과자라던데, 평민들이 자주 먹는 거래요.”

가슴을 퍽퍽 치며 과자를 간신히 삼키고 “어, 어렸을 때 많이 먹어 봤던 것 같았는데. 착각했나 봐. 맛이 좀 다르네.” 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다행히 선량하고 충성심 넘치는 마르코는 왕자님이 그렇다면 그런가 보다 하고 웃어넘겼다.

“저는 이런 거 처음 먹어 봐요.”

황금을 보듯 황홀한 얼굴이 과자를 입에 넣는 순간 경이로 넘실거리는 게 똑똑히 보인다.

“부드러워요. 고소하고, 달고요. 가끔 왕자님이 주시던 쿠키보다 더 마음에 들어요.”

“나도 그래. 정말 맛있다.”

마르코와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과자 한 봉지를 뚝딱 해치웠다.

“이걸 주신 누님이 절 보더니, 왜 이렇게 말랐냐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왕자님 곁에 있는 게 제일 행복해서 좋았다고 했어요.”

배를 툭툭 두드리며 웃는 마르코가 짠해서 나는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헉, 와, 왕자님. 갑자기 이런 건!”

숨이 멎을 것 같다고 마르코가 코 평수를 넓혔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나는 얘가 짠해서 죽겠다.

어린 시절에 나와 겹쳐 보인 것도 있었고, 인간적인 동정심이 들기도 했다.

“마르코, 내가 그동안 잘못한 만큼 너랑 레아에겐 다 갚을 거야.”

“지, 지금까지도, 저는.”

우물거리며 행복했다고 말하는 마르코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너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정당한 이유 없이 누굴 때리거나 심하게 부려 먹으면서 입으로만 네가 제일이다 하는 건 진짜 우정도, 애정도 아니거든. 넌 지금부터 여기서 그걸 배우는 거야. 알았지?”

마르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허벅지가 허전하다. 내가 매일 끌어안고 있는 따끈하고 말랑한 엘리자벳이 없다.

“그러고 보니 엘리자벳은 어디 갔어?”

“아! 시녀 누님들과 말을 나누는 동안 황태자 전하를 발견하고 뛰어갔는데…….”

뭐?

정원이 꽤 넓던데, 그거 괜찮은 거야?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칼 왕자의 방 안이 세상의 전부였다는 엘리자벳은 여기 온 뒤로 산책을 나가면 함흥차사였다.

그래도 늘 마르코나 내가 함께해서 괜찮았는데.

“걱정 마세요, 엘리자벳은 저만큼이나 왕자님을 좋아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올 거…….”

말을 하다 말고 마르코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됐다.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에 놀라는 찰나 갈색 털 뭉치가 휙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고, 얼음장 같은 황태자의 음성도 함께 날아왔다.

“둘이 그런 사이인 줄은 미처 상상도 못 했군요.”

* * *

확실히 잘사는 나라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분위기는 느슨하지만 각 잡힌 군복의 소매가 깨끗한 기사들이 그랬고 잡일하는 하녀들의 치마에 주름 한 점 없다는 점도 그랬다.

빙의 후 반년, 주인공의 나라로 넘어온 지 일주일.

나는 고작 일주일 만에 복지 수준의 차이를 체감하며 상당히 편파적인 작가의 의도에 경의를 표했다.

“차가 입맛에 맞지 않습니까?”

감상에 빠져 있는 내게 불쑥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물었다.

“아뇨. 아주 맛있네요. 여기 분위기가 좋아서 그런가.”

아니면 남주 얼굴 맛집이라 그런가? 하며 속으로 ‘흐흐.’ 하고 웃어 보았다.

전재영이 매일 노래를 부르던 그놈의 얼굴.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막상 눈앞에 계신 분을 보니 얼굴이 중요하긴 하다.

오뚝한 코에, 보기 좋게 솟은 이마도 그렇고, 초록빛의 눈동자랑 한쪽 볼에만 파이는 보조개까지.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얼굴이었다.

거기에 전매특허인 듯한 묘하게 웃는 표정까지 탑재하니 아주, 상견례 프리패스상이다.

홀짝 차를 마시며 황태자를 흘긋거렸다.

전재영이 이 소설 속에 들어왔다면 미쳐 날뛰었을 텐데.

역시 내 최애. 완벽하구나 하면서.

얼굴뿐이랴?

떡 벌어진 어깨에 넓은 가슴, 두툼한 흉통에 탄탄한 허벅지까지. 예부터 흉통과 허벅지는 힘의 상징이라고 했다.

비록 나는 허옇고 비리비리한 악당이 되고 말았지만 레아와 황태자를 엮는 데 성공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운동에 매진할 예정이었다.

팔굽혀펴기 열 번에 1시간을 앓아눕다 보면 얼굴은 평범했어도 다년간의 육체노동으로 다져진 팔뚝과 구릿빛 피부를 가진 예전의 내가 그리울 지경이다.

그리고, 기술도 배우고, 다른 공부도 좀 하고.

돈 모아서 여행도 하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여동생 하나만 바라보며 뭐 빠지게 살았던 지난 생이나 창살 없는 감옥 같았던 린드버그에서의 생활을 생각하니 부르르 어깨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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