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입가에 침까지 흘리고.”
황태자가 부스스 웃었다.
“그냥, 활기찬 미래 생각이요. 행복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생각이요.”
어쩐지 따라 웃게 되는 표정이라 나도 히죽 웃었다. 황태자는 웃다 말고 내가 따라 웃자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크흠, 왕자의 행복이 무엇인데요?”
행복? 많지.
너랑 내 누나가 고구마 없이 해피 엔딩을 맞이하면 내 행복은 따라 들어온단다.
“한번 말해 봐요. 궁금합니다. 왕자의 미래가 곧 내 미래일지도 모르니까요.”
황태자가 하는 질문에 놀란 것은 되레 내 쪽이었다.
벌써부터 매형 노릇을 하려는 것인가.
이거, 이거.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히 레아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요 일주일.
황태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외성으로 행차했다.
오늘처럼 앉아서 차를 마실 때도 있었지만 아침 운동을 하는 우리와 함께 뛸 때도 있었다.
마음에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운동이나 훈련을 할 때는 레아와 함께하면서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할 때는 내가 혼자 있을 때만 권했다.
황태자가 보기에 아직도 나는 비린내 나는 애송이라 그런가.
어쨌든 자주 얼굴을 마주치며 정을 쌓는 것은 중요했다.
당장 나만 해도 자꾸 얼굴 맞대니 정이 들어 그런가, 황태자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점점 즐거워지고 있었으니까.
레아 공주를 직접 대면하지 않고 내게 먼저 접근하는 것은 장수를 잡기 전에 말을 먼저 쏘려는 전략인지도 몰랐다.
“왕자의 행복이 뭐냐니까요?”
“저는…… 그냥 좋아하는 일 하면서 적당히 먹고살 만큼 벌고, 또 누이가 행복하게 사는 소식 들으면서 가끔 만나서 저녁 먹고요. 그런 게 행복이죠.”
어쩌다가 왕자가 되긴 했지만 사치스러웠던 지난날은 잊고 소박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심정을 조심스레 내비쳐 보았다.
부와 권력, 명예 따위에 관심이 일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보다 적성에 맞지 않는 왕자 노릇을 때려치우고 싶었다.
적당히 관심에서 멀어져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을 때쯤, 날개를 훨훨 펴고 날아가는 것.
내가 눈을 그윽하게 뜨자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대가 좋아하는 일은 뭔데요?”
“글쎄요. 먹는 것을 좋아하니 빵이라도 구울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에 황태자는 이제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빵을 굽는다고요? 당신이? 왕자가 이렇게 재밌는 성격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내 얼굴이 괜히 달아올랐다.
왕자는 빵 구우면 안 되냐?
어차피 다 망해 가는 나라, 내가 확실하게 망쳤다가 되살릴 예정이었다.
그때쯤 되면 백성들은 폭정만 일삼던 왕족의 망나니 왕자 따위는 잊어버릴 텐데.
아드리안과 레아가 연애하며 지지고 볶는 동안에 나는 착실히 공부도 하고 자금도 모아서 소설이 끝나갈 때쯤 동네 빵집 아저씨 1 정도의 위치로 갈 거다.
마르코랑 엘리자벳 장가도 보내 주고, 할 일이 참 많았다.
세상만사 다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지만 꿈은 크게 잡아야 반이라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지. 그게 27년 녹록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전우영의 지혜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별로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내가 정말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그는 웃음을 멈췄다.
미간을 이렇게 좁혔다가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왕자, 혹시 성 밖으로 나가 평민처럼 살겠다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요?”
“그게 왜 말도 안 됩니까?”
또 나만 이상한 건가?
레아가 황후가 되고 나면 나는 그야말로 깍두기 같은 신세가 된다.
왕자라고 해도 무슨 지식이 있어야 요직에 앉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것 외에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성에 남아서 요직을 차지한다는 말이냐고.
마법이라도 쓸 수 있으면 모를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력의 마, 자도 느껴 본 적 없는 몸이다.
마르코의 말에 따르면 원래의 칼 린드버그도 마법은 한 개도 쓸 줄 모른다 했다.
나는 슬쩍 생각에 빠진 황태자를 넘겨다보았다.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뚝을 두드리고, 다시 눈을 마주치며 눈으로 ‘진짜냐’고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뭔가 앙금이 있어서 성안에 남겨 두고 막 부려 먹으려는 건가?
아니면 내가 성 밖을 나가서 다른 일이라도 도모하려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지금까지 읽고 본 바에 의하면 황제 형제들도 다 줄줄이 성을 떠났고, 하다못해 린드버그도 결혼을 하면 성 밖으로 나가 자신의 영지를 꾸렸는데.
황태자는 어벙한 내 얼굴을 보곤 이제는 소리 내서 웃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보통 불길한 예감은 다 맞는다. 불행하게도.
그는 매우 다정한 말투로 달갑지 않은 친절을 베풀었다.
“원한다면 성 내에 그대가 빵을 구울 수 있는 장소 정도는 마련할 수 있습니다. 필요하면 꼭 말씀하세요.”
한참을 키득거리며 웃던 황태자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 말했다.
“예, 뭐. 꼭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는데요.”
미남에 금수저, 아니 마정석 수저 인생 좋겠다.
떨떠름히 대답하자 황태자는 다시 물었다.
“왜요, 헤네켄 성안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합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눈만 뜨면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나오고, 시녀들은 발랄하고 친절했다.
마르코도 덩달아 많이 쾌활해졌고 반려견은 정원을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데. 이보다 더 멋진 생활은 없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매일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던 누이가 밖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레아 공주의 취미는 여타의 공주님들하고 좀 달라서 승마, 활쏘기, 검술 같은 걸 한다고 기사들과 줄 맞춰 서 있는 것을 몇 번 보았다.
놀랍게도 제국은 린드버그와 다르게 성비에 제한을 두지 않는지 기사들 중 여성의 비율이 거의 반반이었다. 그들과 함께 땀 흘리며 연무장을 누비는 레아는 정말 멋있었다.
“너무 좋아서 황송할 정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자 황태자는 자신의 턱을 괴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아직 감사를 표하긴 이릅니다.”
“예?”
아드리안의 눈이 반쯤 접혔다가, 금방 진지한 빛을 띠었다.
“왕자, 나는 아직 당신을 완전히 돕겠다고 결정하지 않았어요.”
“네?”
바보처럼 벌어진 입을 황태자가 팔을 뻗어 턱을 닫아 주었다.
그러고는 다리를 꼬며 말했다.
“곧 거사를 치러야 하니, 협상의 내용을 결정합시다.”
주인공은 역시 녹록지 않았다.
* * *
협상을 하자던 황태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네 가지의 계절이 한 공간에 존재하는 온실에서 나비 한 마리가 분주히 나는 것을 한참을 지켜보고 나서야 황태자는 운을 띄웠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왕자를 돕는 대가로 고작 마정석 채굴권을 얻는 것은 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거기에 매장되어 있는 마정석이 순도 100프로인데도요?”
“……100프로?”
어, 아니지 참.
“큼, 그게 아니고 순도가 아주 높다는 말이었습니다. 심지어 전 대륙 매장량의 6할이 모추 산맥에만 있는걸요.”
처음 소설 속으로 들어왔을 때 장르가 판타지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로맨스 소설은 잘 안 읽어도 판타지 소설 가방끈은 좀 긴 편이었는데. 덕분에 마법이 존재하는 대부분의 세계관에서 마정석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았다.
한때 제국과 크기를 나란히 했던 대국 린드버그는 마법사가 조금씩 줄어드는 태세가 보이자 모추 산맥을 둘러싼 오랜 내전을 겪으며 규모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게 아마 개뿔도 가진 것이 없는 린드버그가 거들먹거리는 가장 큰 이유일 테고, 두 주인공이 만나는 것에 큰 영향을 미칠 거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주인공은 ‘고작’ 마정석 채굴권이란다.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가 황급히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쉬운 것은 내 쪽이니 초장에 주인공의 신경을 건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칼 린드버그, 왕자가 내게 약속한 것은 채굴권이지, 채굴된 마정석이 아니잖아요. 마정석을 채굴하고 가공하는 데 얼마나 많은 품이 드는 줄 아십니까?”
아, 맞다. 내가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다.
황태자가 슬그머니 몸을 내 쪽으로 당겼다.
“거기다 모추 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미바리 숲은 마물 서식지로 유명하죠. 그대는 볼 일이 없었겠지만 무척 흉포합니다. 그것을 처리하고 채굴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큰일이에요. 모추 산맥은 사실상 마법이 없이는 그림 속 케이크 같은 존재죠.”
“그, 그렇긴 합니다만.”
제 밑천은 그게 다인데요.
이 모든 일을 꾸밀 때 나의 믿는 구석은 단 하나. 소설의 전개였다.
아드리안 헤네켄과 레아 린드버그. 두 사람이 만나기만 하면 알아서 사랑에 빠지고 알아서 황태자가 움직여 줄 거라 생각한 것이 불찰이었다.
사실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힌 나머지 그들에게는 여기가 현실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게 외면했던 탓이라 생각했다.
나의 등 뒤에선 해바라기가 영글었는데 황태자의 뒤에서 앙상한 나뭇가지에 눈이 살살 내려앉고 있었다.
눈처럼 하얀 셔츠에 검은 장미 문양 견장을 단 단출한 차림으로 앉아 있는 황태자와는 퍽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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