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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12화 (12/150)

12화

“제가, 뭘 하면 도와주시겠습니까?”

그가 원하는 거라면 뭐라도 해야지.

이제 와서 헤네켄이 발을 빼기라도 하면 나는 둘째 치고 린드버그는 어떡하냐.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황태자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왕자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예?”

“왕자가 린드버그에서 누리던 것들을 두고 구태여 헤네켄으로 넘어온 이유가 정말 린드버그의 앞날을 위해서입니까? 차라리 왕자가 린드버그의 생활이 답답해서 그랬다고 한다면 모추 산맥의 마정석 따위 안 줘도 두 사람의 신병을 저희가 맡겠습니다만.”

황태자는 날 떠보듯 한 템포 쉬고 이어 말했다.

“사실 진짜 이유는 숨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요.”

황태자의 의심스러운 마음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20살이 되도록 정신 못 차리고 개떡같이 살던 왕자가 갑자기 백성을 구제해 달라니 나 같으면 코웃음 치면서 무시했을 거다.

그러나 우리의 정의로운 주인공은 기꺼이 움직여 주었다.

너랑 우리 누나 잘되고, 나도 살려 주고 겸사겸사, 불쌍한 린드버그의 백성들 구제해 달라고.

황태자의 말처럼 내가 당장 내세울 건 채굴권 하나지, 그 외의 것들은 잘 모르겠다.

반년 동안 조사한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그중에서 내가 황태자에게 또 내세울 게 무엇일지.

사실 떠오르는 것은 협상 테이블에 올릴 게 무엇인가보다 왜 이런 일을 벌였는가다.

내가 눈을 깜빡이자 황태자는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린드버그에서는 멍청한 행동을 비유할 때, 말을 밖에 매어 놓는다고 표현합니다.”

한숨과도 같이 나온 말에 황태자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먹을 게 부족한 사람들이 밖에 매어 놓은 말까지 잡아먹어서 그런 표현이 생겼습니다. 하루 종일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는 영지민들은 돌아갈 때 받는 게 밀 한 주먹, 소금 한 꼬집이랍니다.”

그제서야 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챈 황태자가 자세를 고쳤다.

내가 비록 이 소설의 전개를 몰라, 언제 어떻게 린드버그의 정세가 바뀔지는 몰라도 칼 린드버그의 몸으로 사는 동안 단 하나 바꾸고 싶었던 게 바로 그것이었다.

“의료도, 약학도 권력자들이 전부 쥐고 있어요. 그래서 터무니없는 민간요법이 성행해서 아주 작은 병을 키워 돌이킬 수 없게 되곤 해요. 린드버그 성에는 하루에도 수십 개씩 마정석이 소모되는데 그들에겐 부스러기도 안 돌아갑니다.”

말을 하면서 손끝이 점점 차가워졌다.

과거의 단편이 줄줄이 떠올라서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남겨진 나와 재영인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형제가 별로 없어서 그나마도 힘들었는데, 다행히 삼촌이 우리 남매 모두를 입양하겠다고 나서 줘서 재영이 학창 시절 동안은 전부 거기서 보냈다.

재영이가 중학교에 다닐 때, 나는 이미 사회인이었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세상의 무시와 편견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유일한 유산인 부모님의 집을 지키고 재영이와 다시 합치기 위해서였다.

삼촌이 그걸 다 털어먹었다는 걸 알게 된 후엔 여름이면 비가 새서 곰팡이가 슬고 겨울에는 웃풍에 서리가 끼는 연립에서 재영이와 둘이 살았다.

그래도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 둘이 살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고 어린 동생은 묵묵히 잘 참아 주었다.

그렇게 재영이 대학 입학할 때, 마침내 우린 지긋지긋한 지하 방을 탈출해 지상으로 올라왔다.

솔직히 흔한 얘기다. 힘겹긴 했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생의 그림자였다.

눈꺼풀 안쪽이 뜨끈했다.

코끝도 시큰했다. 못 입고, 못 먹고. 눈치 보며 살던 날들이 북받쳐 올랐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건 나 하나만 보고 사는 어린 동생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희망 하나 때문이었다.

“……지금은 가난해도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가 생길 수 없어요. 모든 권력이 위로 집중되어 있는 데다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도 잊어버렸거든요.”

더 좋아질 수 있었는데, 우리 둘 다 명이 짧아서 그랬지.

내가 그렇게 평생 가난하기만 한 채 생을 마감했다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라는 법은 없다.

린드버그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됐다.

적어도 내가 칼 린드버그로 있는 동안에는.

황태자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바지에 점점이 얼룩이 졌다.

어느새 혼자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온몸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 그, 이건.”

지금 울면 분위기 이상해질 텐데.

시큰한 코끝을 쥐고 황태자에게 꽃가루 알레르기라고 변명해 볼까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황태자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칼 린드버그.”

그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온실 속 화초 같은 당신이, 백성들의 가난에 그렇게까지 공감을 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지만 오늘은 이쯤 하죠.”

그는 어딘가 화가 난 사람처럼 굳어 있었지만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만큼은 카스텔라처럼 부드러웠다.

“……그럼 이제 그냥 도와주시는 겁니까?”

킁 하고 코를 먹으며 물었더니 그가 피식 웃었다.

“아뇨.”

뭐?

좋은 향기가 나는 손수건이 손안에서 팍 구겨졌다.

눈물도 쏙 들어갔다.

황태자의 왼쪽 볼우물이 깊게 파였다.

“당신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헤네켄에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 말고 내게도 하나 보상을 약속해 줘요.”

주인공 당신, 그렇게 안 봤는데 말입니다.

의외로 이해타산적이네? 하긴 그래야 황태자도 해 먹는 건가.

한숨을 쉬며 손수건을 돌려주려다 축축해진 손수건은 받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뭘 원하시는데요? 아시다시피 저는 드릴 게 이 몸밖에 없는 처진데요.”

원하시면 성에서 층계참이라도 닦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이려 했지만 순간 황태자의 눈이 기묘한 색으로 빛이 나서 입도 다물었다.

초록빛의 눈이 더 옅은 녹색으로 바뀌고 화난 사람처럼 눈썹을 치켜올린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설레서가 아니고 무서워서다.

상대방은 20살의 어린 청년인데. 겁먹어서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이런 농담은 헤네켄에서는 하면 안 되는 걸로.

황태자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더 잘됐군요. 나는 칼 린드버그, 당신 자체를 원하니까요.”

“예?”

“헤네켄이 어떤 나라인 줄 압니까? 내가 황태자라곤 하지만 린드버그를 돕기 위해, 또 왕자를 돕기 위해서는 많은 제후들에게 이해를 구해야 합니다.”

황족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존경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니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다는 말인 것 같았다.

“그래서 왕자가 내게 직접 명분을 쥐여 주기를 요청합니다. 국혼,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 같은 것 말이에요.”

그의 말이 한 번에 이해가 가질 않아 수 초간 곱씹었다.

“아무리 그래도 벌써부터 아이 얘기는 좀 이르지 않나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하고 되묻자 황태자가 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만난 지 얼마나 되어야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습니까?”

“음, 제가 황실 결혼 적령기는 잘 모르지만, 아무리 그래도 1년은 서로 알아 가야 하지 않을까요?”

“뭐요?”

황태자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고 나도 말을 하면서 수렁으로 빠지는 것만 같았다.

국혼이라, 그것은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런 형태의 것은 내키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사랑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결혼, 출산까지 이어져야 하는 거지. 레아 공주를 대뜸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것은 너무 거북했다.

“그렇잖아요. 레아 공주는, 아니 누님은 이제 막 린드버그 성을 벗어났는데요. 그전까지 변변히 남자를 못 만나봤거든요. 아직 어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두 분은 서로 잘 모르시잖아요.”

황태자의 눈초리가 아까보다 더 얼음장처럼 변했다.

눈 좀 풉시다. 그런 흉흉한 기세로 결혼을 하자고 종용하면 있던 로맨스도 도망가겠어요.

“아, 물론 전하가 누님의 상대로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진도가 너무 빠른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변명하듯 덧붙인 말에 황태자는 헛웃음을 쳤다.

이게 아닌가? 내가 너무 헤네켄의 문화에 무지해서 지금 어마어마한 실례를 저지르고 있는 것인가?

“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황태자는 부드럽게 말하며 내 손을 잡았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황태자의 체온은 쓸데없이 높았다.

닿을 때마다 데일 것처럼 이쪽의 피부도 달아오르는 느낌이라 거북해진 내가 손을 빼려고 하니 더 강하게 잡아 왔다.

“같은 알파인 나와 공주가 어떻게 결혼을 합니까?”

뭐요?

갑자기 손끝이 차가워지면서 눈 밑이 바르르 떨렸다.

“나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사람은, 우성 오메가인 칼 린드버그.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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