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쾅쾅.
난데없이 열대 우림 사이로 스콜이 쏟아졌다.
물론 마법인지라 우리가 앉아 있는 중앙 파티오엔 물 한 방울 튀지 않았지만.
나는 눈을 뜬 채 황태자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곱씹었다.
“혹시, 헤네켄식 농담입니까?”
여친 사귀려면 그 처남에게 대시를 해야 한다거나.
“농담은 왕자가 하고 있겠지요.”
웃음기를 싹 지운 황태자의 체취가 어지러울 지경으로 온실을 가득 채웠다.
나비도 도망가고 작은 동물들도 자취를 감췄다.
황태자는 매우 평온한 얼굴인데, 나는 목이 졸린 것처럼 헐떡거렸다.
아랫배가 지끈 울리고 열이 점점 오른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술이 혈관을 타고 마침내 뇌 신경에 침범한 것만 같았다.
“나는 당신과의 사이에서 후계자를 만들길 원해요.”
주인공의 나라로 넘어온 지 딱 일주일 만에, 남주인공은 내게 폭탄을 던졌다.
* * *
“엘리자벳, 나 시집갈지도 몰라. 흐, 흐흐.”
우는 듯 웃는 듯 실성한 내 소리에 엘리자벳이 끄응끄응 소리를 내며 얼굴에 침을 잔뜩 발랐다.
황태자는 농담이 아니었다. 나보고 진짜 애를 낳으라 했다.
〈강요는 아닙니다만, 꼭 긍정적으로 답해 줬으면 좋겠군요.〉
강요가 아니라곤 했지만, 달리 거절할 방법이 없는 나로서는 그게 그거였다.
차마 거기서 저는 남잔데요? 라고 말할 수 없어서 일단 돌아가겠다며 자리를 떴다.
“아니, 왜. 왜. 나야?”
내가, 아니 칼 린드버그가 좀 예쁘장하게 생기긴 해도 어딜 보나 남자앤데.
아니, 그래도 되는 건가?
황태자가 남자 비를 들여도.
마법으로 아이를 만드는 건가?
황태자는 레아 공주가 ‘알파라서’ 결혼은 못 한다고 했다.
알파가 별명이나 지위가 아니었나 봐.
린드버그의 모체나 다름없는 린드와이어 제국 역사서에는 황후의 성별이 달리 명시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린드버그로 넘어온 뒤 역사서는 사실 직시의 글이 아니라 린드버그 왕가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완전히 변했기 때문에 읽기를 그쳤었다.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개방적인 헤네켄 사람들이 떠올랐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축하받던 남자들 중 한 사람이 배가 볼록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바지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봤지만 아기가 나올 수 있는 기관이 있을 자리가 없다.
“내가 뭘 놓친 걸까.”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먼저, 칼 린드버그의 부모.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칼의 부모는 손에 꼽을 정도로 마주쳤다.
의도적으로 만남을 피한 것도 있지만 본인들이 방 밖으로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
왕은 건강이 좋지 않아 방 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고, 왕비는 가끔 왕 옆을 지키고 대부분은 키치너 재상의 근처에 붙어 있었다.
그다음이 키치너 재상.
그는 자주 린드버그 성에 들어왔지만 주로 집무실이나 연회장에 있었기 때문에, 나와는 접점이 많이 없었다.
날 보는 끈적한 시선이 껄끄러웠지만,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음, 그다음이 귀족들.
그들은 주로 외모에 대한 칭찬을 늘어놨지만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남자, 에 대한 건 언급한 적이 없었다.
빌보드 랩퍼처럼 돈이랑 애인 자랑에 열을 올리는 것들이라 똥 밟은 것처럼 피하곤 했다.
그마저도 몇 번 되지 않는다는 점도 있다.
“내가 너무 틀어박힌 게 잘못이었구나!”
내가 손바닥을 짝 치자 엘리자벳이 놀란 듯 펄쩍 뛰었다.
조금만 더 이야기를 나누어 봤다면 진작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가장 가까이 있는 마르코도 내가 임신할 수 있는 몸이라는 건 알려 주지 않았다.
황태자가 착각을 했든가.
아니면, 내가 착각을 했든가.
헤네켄에 와서 생기 넘치는 사람들을 보며 그렸던 청사진에 조금씩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황실 분위기는 온화했고 주인공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었다.
그 모든 환경들이 레아 린드버그가 더 이상 새장의 새처럼 살 필요가 없다는 희망, 그리고 내가 주인공들이 떠나고 남겨진 자리에서 진짜 새 인생을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심어 주었다.
황태자가 자주 내게 찾아오는 것도, 어쩌면 레아 공주와의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일지 몰라 열심히 반겼다.
그러나 여주인공이 사실 여주인공이 아니었고 꼼짝없이 차기 매형일 줄 알았던 남주인공이 나의, 나의.
“애 아빠가 된다니!”
엘리자벳은 이제 슬슬 내가 귀찮은 것 같았다. 점점 히스테릭해지는 내 모습에 슬금슬금 몸을 뺀다.
“거기다 그놈의 국혼. 나는 그거 우리 누나가 하는 건 줄 알았지! 그걸 내가 하게 될 줄 알았으면 절대 여기까지 안 왔을 거라고.”
내가 이 소설에서 레아 린드버그를 찰떡처럼 여주인공으로 찍은 것은 국혼 이야기도 한몫했다.
연회에 참석할 때마다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저렇게 아름다우시니, 장성하셨으니 국혼을 준비해도 되겠다며 마치 기정사실처럼 떠들어 댔기 때문이었다.
그 연회 장소에 있는 결혼 적령기의 여자라곤 레아 린드버그뿐이었다.
그래서 능구렁이 같은 재상의 입김에 갑자기 레아를 시집보낼 뻔했을 땐, 아 이것이 여주인공의 첫 번째 시련이구나 하며 쪽팔림을 무릅쓰고 바닥에 드러누워 저지했었는데.
그런데, 그게 레아 린드버그가 아니라 칼 린드버그 이야기였나. 젠장!
“끼이잉.”
엘리자벳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뒷다리로 제 귀를 탈탈 털어 댔다.
정말 성의가 없어, 너 안 그랬잖아.
내가 여동생 얘기를 할 때마다. 예전에. 아니 이젠 전생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얼마나 힘들었는지 얘기할 때마다 성심성의껏 들어줬잖아.
“왕자님, 늦어서 죄송해요. 오다가 레아 공주님의 시녀를 만났는데, 한번 들르라고 전해 달라셔서요. 그런데 뭐 하시는 거예요?”
빠져나가려는 엘리자벳의 궁둥이를 붙들고 주저앉아 있는 내 모습에 마르코가 체통 좀 지키라 잔소리를 해댔다.
“마르코오, 나 왕자 안 할래.”
“또 그 소리! 왕자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왕자를 안 해요? 신경쇠약이 이렇게 무섭다니까. 그것도 다 결혼하면 괜찮아질 거래요. 발정이 가까운 오메가들이 신경이 날카롭다니까, 왕자님도…….”
“뭐야? 너, 너 알고 있었어?”
“뭘요?”
마르코에게 달려가 어깨를 잡고 털털 털었다.
“내가, 내가 황태자랑 결혼할 수도 있다는 거!”
“와, 왕자님. 기억이 가물가물하시다더니. 그것까지 잊어버리셨던 거예요?”
그것까지? 그걸 어떻게 내가 짐작을 하냐!
아무도 언질을 안 해 줬는데.
바닥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닥 대신 허벅지를 치고 숨을 몰아쉬는 날 보며 마르코의 동공이 거침없이 흔들린다.
이거 진짜 장난이 아니구나.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다른 건 다 잊어버리셔도 황태자 전하의 존함은 똑똑히 기억하시기에, 다, 당연히 염두에 두신 줄 알고, 저, 저는.”
어금니를 딱딱 부딪치던 마르코가 눈을 질끈 감았다.
“왕자님께서는 우성 오메가치고는 발정이 늦어지고 있어서 걱정이 많았거든요. 다른 알파들을 만나도 잘되지 않는다고. 황태자 전하를 만나기 위해 아껴 두는 거라고 누누이 말씀하셨거든요.”
갈수록 온도가 급강하하는 내 표정에 마르코의 목소리도 덩달아 작아졌다.
다른 알파, 우성 오메가. 그게 다 뭐냐.
“그러니까 저도 베타라 그런 건 잘 몰라서요. 이를 어째요.”
발정기는 또 뭐고.
인간 남자는 365일이 발정인데.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왕자님? 왕자님!”
정신이 아득해진다. 마르코가 부르는 소리, 엘리자벳이 짖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전재영, 이 되바라진 것아. 도대체 무슨 소설을 읽고 있었던 거야!
* * *
“린드버그의 재상이 일주일 새 세 번이나 연통을 보냈습니다.”
벨프리가 모노클을 추켜올렸다. 신비로운 보라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오랫동안 황족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헨드릭 가의 특징이었다.
“몸이 달았나 보지?”
빙글거리며 웃던 황태자가 손안에 쥐어진 구슬을 코에 가져다 댔다.
은은한 제비꽃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맡을수록 끌리는 향이었다.
페로몬이 변한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왕자님이 전하와 각인이라도 할까 봐 그런 모양입니다.”
“각인은 무슨,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난 아직 왕자를 전부 신뢰하지는 못하고 있어.”
벨프리가 황태자를 흘겼다.
양쪽 다리를 책상에 걸치고 의자에 늘어져 있는 황태자는 언뜻 방만해 보였으나 그 속에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쿨쿨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을 그의 젖형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이성을 무시하고 본능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도.
“그런 분께서 왕자님이 연락을 취하자마자 가서 데리고 오셨어요?”
그것도 10년 전에 대차게 뺨을 맞고 짝사랑 접으신다고 이를 득득 갈지 않았습니까.
황태자를 흘기던 벨프리는 빙긋 웃는 그를 보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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