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형질자가 곧 마법사요, 그 피가 우성에 가까울수록 마력도 강해지는 세상에서 아드리안 황태자는 유례없이 강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건국 이래로 우성의 형질을 가진 이들끼리 혼인해서 혈통을 보존해 왔으니 예정된 일이나 마찬가지긴 했지만.
그 때문에 황태자는 외로운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알파나 오메가는 페로몬으로 서로 자극하고 끌어당긴다.
어설픈 오메가는 강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질식하기 때문에 황제는 황태자가 다른 오메가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황태자의 페로몬 조절 능력이 괜찮은 수준까지 올라오면 그때 짝을 정할 예정이었다.
역대의 알파 황족들은 모두 비슷한 수순을 밟아 짝을 찾았다.
그러나 자유로운 연애 분위기가 형성된 제국에서 형질자들이 비형질자와 결혼하는 일이 많아지자 황족이나 일부 귀족들을 제외하고서는 알파든 오메가든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사이에 린드버그에서 놀랍게도 열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 사이에 우성의 자녀가 둘이나 태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알파인 레아 린드버그와 오메가인 칼 린드버그였다.
특히 왕자가 우성 중에서도 극우성이라 소문이 짜해서 유력한 헤네켄의 차기 황태자비로 거론이 되고 있었는데.
첫 만남이 최악이라 그대로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었다.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강한 우성 알파. 그 무게를 오롯이 홀로 견뎌야 했던 10년의 세월을 생각해 보면, 이제라도 칼 린드버그가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긴 했다.
그러나 벨프리는 회의적이었다.
이전의 왕자나 지금의 왕자나 솔직히 황훗감은 아니었다.
제국의 황후라는 자리가 어디 외모만 보는 자리냐고. 넘치는 지성과 거기에 걸맞는 마력까지 함께 갖춰야 한다.
이번에 만난 왕자는, 음. 뭐라고 해야 하지. 벨프리도 딱 정의 내리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래도 황태자가 강하게 원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말은 그렇게 하셔도 왕자님이 여기 온 후로 거의 매일 만나고 계시지 않습니까?”
벨프리가 그 히죽거리는 얼굴부터 어떻게 하고 신뢰 운운하라고 타박을 했다.
“예쁘고 재밌잖아.”
황태자가 키득키득 웃자 한쪽 볼에 볼우물이 움푹 파였다.
“하긴, 대뜸 제게 와서 황태자 전하, 했을 때는 저도 조금 웃을 뻔했습니다.”
10년씩이나 가만히 있던 왕자가 돌연 헤네켄으로 편지를 보냈을 때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무슨 장난질일까 생각했다.
종일 외모 가꾸기에만 열을 올린다던 왕자의 대륙 공용어 문법은 완벽했다.
편지 내용은 더더욱 그 왕자가 쓴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린드버그의 앞날을 위해 레아 린드버그와 칼 린드버그 두 사람의 신병을 인도해 달라는 간결한 내용이었지만 중간중간 번진 잉크 자국으로 쓴 사람이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꽤나 고심했음을 알게 되었다.
〈린드버그가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그날 편지를 구기던 황태자의 표정이 얼마나 살벌했었는지, 벨프리는 드디어 린드버그가 지도에서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도착해서 만난 왕자는 예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분명히 눈에 독기가 차서 지나가는 사람 모두에게 시비를 건다 들었는데, 거기서 만난 건 오밀조밀한 눈코입에 긴장을 가득 담은 청년이었다.
그는 자박자박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벨프리에게 ‘아드리안 전하시죠?’라고 말했다.
당황하는 벨프리 뒤에서 황태자가 걸어 나왔을 때 왕자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는 게 다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고 나서 나를 봤을 때 표정 봤어? 눈이고 입이고 동그래지는 게 좀 귀엽더라니까.”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 웃긴다고 아드리안이 키득키득 웃어 댔다.
‘저게 어딜 봐서 좀 귀여워하는 표정이냐. 아주 좋아 죽는구먼.’
벨프리는 속으로 잠시 이죽댔다.
그렇게 헤네켄으로 온 왕자는 하는 짓마다 이상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귀하게 자랐을 왕자가 매번 시종들의 일을 돕고 있다든지.
기사들 틈바구니에 섞여 뜀박질을 한다든지.
그건 괜찮았다.
만년 운동 부족의 벨프리가 봐도 왕자의 체력은 형편없는 수준이라, 지금 체력을 키워 놔야 애를 낳을 때 덜 고생하지 싶다.
자신의 머릿속도 온통 왕자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벨프리는 자각하지 못했다.
“내가 대뜸 찾아가면 당황해서 눈을 요리조리 굴리는 게 진짜, 한입에 삼키고 싶어.”
황태자가 알파 특유의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벨프리는 자신이 베타라서 다행이라고 백 번쯤 생각했다.
왕자가 온 후 황태자는 더욱 위험한 향기를 풍긴다고, 다른 귀족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왕자에게선 무슨 향기가 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전하는 그 향기가 마음에 드실 테지.
“거참 다행입니다. 전하께서 왕자님을 마음에 들어 하셔서요.”
연무장을 돌며 연습용 목검을 다 박살 내 버리거나, 마정석을 연구한답시고 며칠 동안 틀어박힐 때보다 훨씬 보기 좋으니.
이제는 힘내서 일 좀 해 주시면 좋을 텐데.
벨프리가 보란 듯이 황태자의 다리 옆에 서류를 턱 내려놨으나 황태자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손안의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데 뭔가 계속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뭐가요?”
속으로 저 황태자를 한 번쯤 때려 봤으면 하고 생각하던 벨프리가 괜히 찔려서 되물었다.
아드리안이 책상을 돌아 벨프리에게 다가왔다.
벨프리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황태자의 장난기가 쏙 빠진 얼굴은 오늘따라 각이 도드라져 더 위협적이었다.
“어제 왕자에게 국혼 이야기를 꺼냈어. 그랬더니 날 이렇게 보면서, 연애도 아직인데 결혼은 좀 이르지 않냐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벨프리가 엥?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드리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 후 결혼이 자연스러운 것은 어디까지나 평민, 그리고 일부 귀족들에 국한된 거지 황태자에게까지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특히 상성이 맞아야 하는 형질자들은 더더욱.
“어릴 때부터 전하의 옆자리가 자기 거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 걸로 알고 있는데, 새삼 발을 빼고 싶어진 걸까요?”
아드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내가 당신한테 바라는 것은 그 몸을 빌려서 우성 형질자를 얻는 것이라고 그랬더니.”
벨프리는 자신의 코앞에 다가온 아드리안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이는 소리에 모노클을 툭 떨궜다.
“자기 누이는, 계속 성안에서만 살아서 남자를 많이 못 만나 봤대. 그런 식의 접근은 옳지 않다고 근엄하게 설교하더라고.”
그때 아드리안이 얼마나 황당했는지는 그 자신만 알았다.
여기서 자기 누나가 왜 나오냐고. 진짜 미친 거냐고 되물으려다가 꾹 참았다.
왕자가 진지하고 침착했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아니라, 누이요?”
“응.”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것을 깬 것은 말을 더듬는 벨프리였다.
“그럼 지, 지금 왕자가, 자기 누이를 국혼의 상대로 알고 있단 말입니까?”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착각을 하는 건지 몰라도 내가 바라는 건 그대입니다.’ 하고 콕 집었거든.”
벨프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성격이 바뀐 게 아니라 아주 백치가 되어 버린 건가? 그런 것 치고는 오히려 정상 범주로 돌아온 것 같았는데.
“어, 어떤 반응이셨습니까?”
“…….”
“전하!”
“마시던 차를 자기 바지에 줄줄 쏟더라고.”
“세상에.”
벨프리가 비틀거리자 황태자가 그 허리를 감싸 부축했다.
정신을 차린 벨프리가 황태자의 손등을 찰싹 때렸고 젖형제가 책상 모서리에 관자놀이를 박고 세상을 뜨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인 아드리안은 금방 몸을 물렸다.
“왕자가 정신이 이상해진 모양입니다.”
“그것도 아닌 것이, 다른 부분은 수상할 정도로 똑똑해졌어. 모추 산맥의 채굴권에 관한 내용이라든가, 귀족들을 어떻게 들쑤셔 놓으면 좋을지를 의논할 때에는 눈빛이 반짝반짝 빛난다고.”
“그럼 뭡니까?”
“그런데 마법이나 형질에 관한 부분은 완전히 백지야.”
“마법에 대해서 백치라고요? 마법을 모르는 사람이 마정석의 가치에 대해선 어떻게 그렇게 빠삭하답니까?”
앞뒤가 안 맞는다.
왕자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린드버그에서 헤네켄으로 올 때 황태자는 그의 시선이 정확하게 수식을 읽어 냈다는 걸 짐작했다.
그도 그럴 게 수식을 쓰는 방향은 대륙 공용어와 문법이 달라서 보는 방향 자체가 다르단 말이다.
왕자가 수식을 읽어 내리고 흣,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까지 황태자는 제대로 보았다.
“헨드릭 소공자, 왕자가 언제부터 저런 성격이 되었다고?”
“아, 그게 아마도 반년 전입니다. 첩보에 따르면 그때 낙마 사고로 정신을 잃은 후에, 깨어나서는 갑자기 머리카락을 자르고 옷을 다 갖다 버리라고 했다더군요.”
큭, 웃음을 삼킨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잘한 일이군. 왕자 취향은 정말…….”
한때 왕자가 연회 때마다 입고 등장했다는 잠자리 날개 같은 옷들을 생각하며 두 사람 다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다음의 행보가 더 주목할 만합니다. 계속 사이가 좋지 않았던 레아 공주와 급속도로 친분이 생겼고요. 왕자의 하인과 공주의 시녀가 자주 왕래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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