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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16화 (16/150)

16화

“어차피 망해 없어질 나라라는 거죠.”

황태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왕자와의 약속을 상기했다.

왕자와의 약속은 단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왕자의 도움을 얻어 모추 산맥의 마정석 채굴권과 정치적 개입을 허가하는 문서에 옥새를 찍는 것과.

두 번째. 왕족과 귀족을 제외한 평민들의 불필요한 희생을 최소화하는 것.

“칼 린드버그는 공주를 여기 두고 본인이 린드버그로 들어가 옥새를 훔치겠다 했습니다. 그는 옥새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완전히 이해한 것처럼 보였어요. 키치너가 왕족을 업신여기면서도 유지시키려는 이유도 아는 것 같았고요.”

키치너 재상은 린드버그의 왕이 되고 싶어 했다.

그가 왕이 되지 못하는 건 오랜 불문율을 깨지 못하는 그 혈통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마력이라곤 한 톨도 없는 베타였으니까.

왕자는 그 상관관계는 잘 모르면서도 눈치로 키치너 재상이 왕족이 유명무실해지길 기다리고 있는 것에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 판단한 듯했다.

“근데 왜 하필이면 직접 훔치겠다는 겁니까?”

공작이 의아하게 말했다.

헤네켄의 첩자들이 이미 린드버그에 득시글거리는 판이다.

개중에는 뛰어난 역량의 사람들도 많은데 어째서 왕자는 ‘훔쳐 와 달라’가 아니라 ‘훔치겠다’인지.

황태자는 헛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 정도는 왕자로서의 마지막 과제라고 하더라고요.”

“왕자는 쉬운 길을 놔두고 부러 돌아가려는 구나.”

황태자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던 황제가 말했다.

“쉬운 길이 따로 있습니까?”

아드리안의 질문에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잖냐, 어떻게든 각인을 유도하고 나서 린드버그의 옥새까지 포함해 왕좌를 탈환해 달라 요청하면 될 문제였다. 본인이 직접 린드버그로 돌아갈 필요 없이 말이다.”

“폐하!”

헨드릭 공작이 대뜸 언성을 높였다.

글렌 황제가 “뭐, 맞잖아? 헤네켄의 황태자 비가 되면 린드버그가 대수냐고.” 하며 귀를 후비적거려서 공작이 더 방방 뛰었다.

충분히 심리적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각인을 유도하는 것은 쌍방에게 좋지 않은 일이었다.

누구보다 잘 아실 분이.

“아, 물론 진짜 시도했다면 그 왕자는 합법적인 헤네켄의 황태자비는 될 수 없었겠지만.”

여상히 덧붙이는 황제 때문에 헨드릭 공작의 눈썹이 이만큼 올라갔다.

“옥새를 훔치는 건 생각보다 쉽겠습니다만, 그 재상이 두고 볼지 의문이군요.”

황태자는 가면을 쓰고 교활히 자신의 욕심을 숨기고 있는 린드버그의 재상을 떠올렸다.

“그래서 말인데요, 칼 린드버그를 쉬이 해치지 못하도록 명목상이나마 제 약혼자로 선포해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드리안의 말에 황제와 공작이 시선을 교환했다.

잠깐 놀란 표정이었던 황제는 느물느물 웃으며 “명목상이란 말이지.” 하고 중얼거렸다.

“왕자에겐 제가 따로 동의를 구하겠습니다.”

순간 장난기가 다분한 얼굴을 한 황제가 아드리안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지 말고 물어 버려. 어차피 널 감당할 오메가는 그가 유일하지 않냐. 일단 질러 놓고 그 태에서 후손을 보든 말든 하면 될 것 아니냐.”

“폐하!”

“폐하!”

가장 아끼는 제후와 아들이 동시에 소리를 지르자 황제가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뭘 그렇게까지 짜증을 내고 그래?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예전의 칼 린드버그라면 여기 오자마자 아드리안의 침실부터 차지했을걸?”

안 그러냐, 하고 동의를 구하는 황제에게 아드리안이 인상을 팍 구겨 보였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아비가 먼저 걔가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니 영 듣기 껄끄러웠다.

헨드릭 공작은 아드리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공작이 아드리안의 어깨를 두드리며 섣불리 각인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꺼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지금이야 애 셋 낳은 중년의 사내였지만 그 자신이 유력한 황후 후보였을 때, 권력에 굴복해 각인당할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를 기억했다.

다행히도 황제에게도 달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없었던 일이 되긴 했지만.

“왕족이어도 아직 어립니다. 앞자리가 바뀐다고 아이가 갑자기 어른이 되지는 않아요. 칼 린드버그 왕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의심하기보다는, 그가 하려고 하는 일이 나쁜 일은 아니니 협조해 두어도 괜찮겠지요.”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안에 있던 칼 린드버그에 관한 의심의 끄트머리가 사르르 녹았다.

부드러운 표정이었던 공작이 금방 날카로운 참모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것이 헛짓거리의 연장이라 한다면 모조리 쓸어 버리면 될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하의 짝은 제가 어떻게 해서든 찾아드리겠습니다.”

오메가가 부족하다고 해도 언감생심 쓰레기가 귀한 황태자를 넘보게 할 순 없었다.

충심이 가득한 공작의 머릿속엔 짝 없는 우성 오메가, 우성에 가까운 열성 오메가 리스트가 세 명쯤 있었다.

“이봐, 공작. 내가 하려던 말이 그 말이었다니까?”

황제가 억울한 듯 외쳤지만 두 사람 다 귀 기울여 듣지를 않았다.

아드리안이 집무실을 떠나자 황제가 “젊으니까 좋네. 쟤는 재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왕자한테 왜 저렇게 물렁한 거야?” 했다.

헨드릭 공작이 황제에게 “개구리는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하고 면박을 주었다.

저 황제가 황태자 시절 얼마나 정열적으로 지금의 황후를 꾀어냈는지를 생각하니 아주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렸다.

아직도 한창때인 두 사람은 툭 하면 침실에 처박히곤 했다. 그나마 지금 황후 폐하께서 회임 중이시니 열 달은 자중해서 다행이고.

“다 누굴 닮아 그렇겠습니까. 하여간 말조심 좀 하십시오. 아무리 주군이어도 각인을 해라 마라 하시면 안 됩니다.”

“저 녀석이 안 할 줄 알고 그런 거지 뭐, 넌 요즘 왜 그렇게 짜증이 심해? 대공이랑 사이가 별로야?”

황제가 느물거리자 공작은 정색을 하고 망토를 팔락이며 꾸벅 인사를 했다.

“폐하,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은 퇴청합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삐쳤어?”

공작이 활짝 웃었다. 웃고는 있지만 눈에 살기가 등등했다.

“황후 폐하께 꼭 보고할 일이 생겨서요. 우리 고귀하신 폐하께서 아드리안 전하께 ‘강제 각인’을 권유하셨다고요.”

황제의 얼굴이 느물거리던 채로 딱 굳었다.

“그럼, 이만.”

돌아 나가는 공작의 어깨를 황제가 턱 잡았다.

“내가 잘못했어. 그냥 좀 떠보려고 한 거야. 황후, 지금 아기 가져서 조심해야 해. 그런 걸로 일일이 그 사람 신경 쓰이게 하지 마.”

황후의 일이라면 물불 못 가리고 팔불출이 되는 황제는 공작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 * *

그 시각, 레아의 방에서는 때아닌 오메가버스 강좌가 한창이었다.

학생은 당연히 칼 린드버그였고 강사는 레아 린드버그였다.

“그러니까 오메가는 남자건 여자건 임신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 개중에서도 그 성질을 우성과 열성으로 나누는데, 우성일수록 우성의 자녀를 낳을 확률이 높아지지. 마력도 높아지고.”

열정적으로 필기를 해 나가는 칼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며 레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평민들이야 베타의 비율이 월등히 높으니까 모를 수 있다 쳐도 들숨 날숨의 원리보다 먼저 배운다는 형질을 잊어버리다니, 헤네켄에서 이 사실을 알면 난리가 날 텐데.

다른 것보다 우성의 오메가가 부족한 이 시점.

발정기도 남들보다 느리고 더불어 마력이 도드라지지 않는 왕자가 형질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들키면 황태자에게 제멋대로 휘둘리다가 원치 않는 각인이나 임신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오메가, 임신할 수 있음.’, ‘알파, 임신시킬 수 있음.’, ‘페로몬,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음.’ 등등을 적어 내려가는 칼의 얼굴이 절박해 보였다.

그 옆에는 ‘아드리안 헤네켄, 우성 알파.’, ‘레아 린드버그, 우성 알파.’라고도 적혀 있다.

“알파끼리는 전혀 안 되는 걸까요?”

칼의 말에 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페로몬의 상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말이야. 보통은 거부감이 들어.”

“누님이 황태자를 볼 때는, 아니 황태자의 페로몬을 맡으면 어때요?”

상상도 하기 싫었다. 황태자의 페로몬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레아는 거부감을 넘어서 두려움을 느껴야 했으니까 말이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만약 황태자와 한 침대를 공유하게 된다면 검을 꽃은 베개를 베고 자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겠구나.”

찰떡처럼 알아들은 칼의 양 뺨이 하얗게 변했다.

“너, 혹시 나랑 아드리안 황태자를 연결시키고 싶었던 거야?”

정곡을 찔린 듯 움찔거린 칼을 보며 레아가 속으로 ‘이런 미친!’ 하고 욕을 했다.

어쩐지, 황태자가 방문할 때마다…….

〈누님은 날개가 없어 걸어 다니는 천사입니다.〉

〈크으, 둘이 이렇게 앉아 있으니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군요.〉

……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니.

레아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때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은 건 애쓰는 칼이 안쓰러워서였는데.

“그럼 만약 오메가가 평생 짝을 안 만들고 살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렇지 않다’라고 대답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칼은 레아를 우러러보았다.

여차하면 독야청청 독신남의 길을 걸으려는 칼의 희망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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