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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17화 (17/150)

17화

“그건 불가능해. 특히 우리 같은 우성 형질자들은 페로몬 조절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금방 주변 사람을 꼬여 내니까.”

“산 같은 데 들어가서 살아도요?”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나 보다.

저 자그마한 머리통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여 레아는 차갑게 일갈했다.

“칼 린드버그, 네가 아직 히트 사이클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해서 그런 이야기를 쉽게 하는데, 짝 없이 보내는 발정기는 죽도록 고통스러워.”

익히 경험해 본 바 있는 레아는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어차피 선택권은 없어. 황태자는 우릴 돕는 대가로 국혼을 진행시킬 거야. 이유는 단 하나야, 황태자를 감당할 만한 오메가가 드물고, 너는 그중에서도 꽤 괜찮은 상대니까.”

칼 린드버그는 소름이 돋은 자신의 양팔을 문질렀다.

“네가 죽을 만큼 싫다면야 나도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겠지만. 어설프게 도망가겠다는 생각은 버리렴.”

눈꼬리가 축 처지며 난감해하는 모습이 안타깝긴 했지만 레아는 어설프게 위로하진 않았다.

레아 자신도 알파라서 잘 알았다.

우성에 가까울수록 제 짝을 눈치채는 것이 빠르고 그 욕심과 집착엔 한계점이 없다는 걸.

속에 끓는 용암을 지닌 어린 용이, 선택권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굴러들어 온 먹잇감을 절대 놓칠 리 없다는 것도 말이다.

칼 린드버그가 편지를 쓸 때 그의 페로몬을 갈무리해 동봉한 것은 다름 아닌 레아 린드버그였다.

아드리안 헤네켄은 언뜻 자기 마음대로 휘저으면서 다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실리를 따지는 편으로 칼의 페로몬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절대 린드버그를 돕지 않았을 거였다.

마정석을 품은 모추 산맥? 린드버그가 망하면 어차피 헤네켄의 것이다.

키치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마정석을 캘 수 없었다.

여우가 범의 자리를 차지한다 쳐도 여우일 뿐이다, 심지어 그는 옆에 있는 범이 아니라 아가리를 벌린 용을 간과했다.

레아 린드버그가 칼이 빨빨거리며 린드버그를 구한다, 어쩐다 하는 무모한 계획에 묵묵히 따라온 것은 아드리안 헤네켄이 지금의 칼 린드버그를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은 떤 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칼 때문에라도 적극적으로 린드버그를 돕는다면, 백성들도 좀 더 빨리 편해질 테니까.

사실은 그녀 스스로 해내고 싶었던 일이었다.

내 나라를 구하는 데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또 있을까.

스트레스로 뻣뻣해지는 목덜미를 주무르던 레아는 칼의 개미 목소리를 듣고 실소를 지었다.

“죽을 만큼 싫은 건 아니지만 무섭단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이가 나올 구멍이 하나뿐인데, 거기는 아이를 낳고 나서도 평생 써야 하는 기관인데, 어떻게 하냐며 웅얼거린다.

진짜 무서운 듯 손가락까지 꾸물거리며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걱정 마렴, 다 할 수 있으니까. 대륙 전체를 통틀어 남성형 오메가가 2천 명이란다, 다들 아이 낳고도 멀쩡히 잘 살고 있으니까.”

“그런가요.”

아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짓는 동생이 참 귀여워서 레아는 처음으로 동생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얇지만 풍성한 모발이 손에 감기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갑작스러운 레아의 손길에 잠깐 당황하던 칼은 이내 눈을 감고 얌전히 머리를 맡겼다.

언제부터 이 악마가 귀여워 보였더라.

최근 칼 린드버그의 귀염성이 지나쳐서 그간의 악행을 잊을 정도였기 때문에 레아는 어색하게 손을 치웠다.

칼이 “기분 좋았는데.” 하고 아쉬워하며 손길을 따라왔다.

눈을 가늘게 뜨고 헤헤 웃는 게 저가 기르는 개랑 똑 닮았다.

내가 이런 애를 포식자의 입에 직접 넣었다고 이제 와서 죄책감을 느낀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인, 다음은 누이입니까?”

“으힉!”

칼 린드버그가 자리에서 튀어 오를 것처럼 놀랐다.

레아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방문 앞에 서 있는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사생활은 좀 보호해 주시지.”

“안타깝게도 여기가 전부 내 땅이라서.”

황태자는 픽 웃으며 레아의 불만을 묵살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문을 두드렸어요. 문이 열리고 나서도 방 안으로는 한 발짝도 안 들어왔다고요.”

약간 샐쭉한 투로 황태자가 칼을 보며 변명하듯 덧붙였다.

칼은 뒤늦게 자세를 고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동갑내기이긴 해도 저쪽은 엄연히 상전이었으니까. 레아는 가만히 있었지만 말이다.

“전하, 일찍부터 어쩐 일이세요.”

“부황께서 부르셔서 다녀왔습니다. 그분께서는 제게 이 일을 전권 위임하셨지만,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한지라 조언을 들을 것이 많거든요.”

황태자는 척척척 걸어 들어왔다.

다리가 길어 테이블까지 당도하는 데 고작 몇 걸음이 걸렸을 뿐이었다.

그가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치려다 말고 왕자의 메모를 곁눈질했다.

“여기서도 나름의 회의가 있었나 봅니다.”

“예, 뭐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내용이었는데요?”

“진짜로, 중요한 건 아닙니다.”

국혼 이야기가 나온 후로 처음 마주치는 황태자여서 뚝딱이가 되어 버린 왕자는 주섬주섬 종이를 치우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황태자가 예의 사람 좋은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곧 약혼자가 될 건데, 그 후로는 서로 비밀을 만들지 않기로 약속해 주시죠. 저는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라서요.”

자연스레 칼의 옆자리를 차지한 황태자가 부드럽게 그를 끌어당겨 앉혔다.

레아는 황태자가 저를 불편해하는 왕자의 태도를 눈치챘다는 걸 알았다.

“공주님께서도 아셔야 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는 왕자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네가 그 이유를 모르진 않겠지.

하며 황태자가 슬그머니 페로몬을 개방해 보였다.

“그렇지만 청혼은 제대로 하셔야죠.”

그가 감히 자신의 앞에서 우월한 알파임을 뽐내고 싶어 하는 황태자에게 레아도 자신의 페로몬을 개방했다.

황태자는 우습다는 듯 페로몬의 양을 늘렸다.

“그냥 혼인이 아니라 양국의 우호를 다지는 국혼입니다. 헤네켄은 뭐든 빠르고 정확한 것을 좋아합니다.”

황태자가 왕자의 등 뒤로 팔을 걸쳤다.

직접 살에 닿은 것도 아닌데 칼은 흠칫 놀랐다.

“대답은 보류합니다. 우리 애가 좀 늦되어서.”

레아는 건너편에서 칼 쪽으로 손을 뻗어 동생의 손을 잡았다.

세상 다정하고 우애 좋은 남매처럼 보였다.

화사하게 웃는 레아의 얼굴과 제 손을 번갈아 보던 칼이 아까처럼 얼굴을 붉히자 황태자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살을 맞대는 것까지 허락받지 못한 황태자의 패배처럼 보였다.

그러나 황태자는 정색을 하는 대신 더 환하게 웃으며 칼 린드버그와 한 뼘 정도 거리를 좁혀 허벅지를 부딪혔다.

“린드버그에서 신경을 많이 못 쓴 탓이겠지요. 걱정 마세요. 이제 저희 헤네켄에서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그윽하게 왕자를 내려다보았다.

칼은 시선을 피하려고 애를 썼지만, 얼굴이 얼굴인지라 이내 홀린 듯 사로잡혔다.

레아가 윗입술을 들어 올렸다.

대놓고 ‘너희는 왕자가 이 모양인데 뭐 했냐.’라고 묻는 것만 같아서 참을 수 없었다.

“이봐요, 아드리안 헤네켄 황태자 전하.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페로몬 방출은 실례 중의 실례입니다.”

황태자가 레아의 앞으로 쭉 상체를 내밀고 “실례, 제 페로몬이 워낙 강력해서.” 하며 건성의 사과를 했다.

갑작스러운 신경전에 당황한 건 칼 린드버그뿐이었다.

황태자는 아까 제가 만졌던 칼의 머리카락을 노려보고 있었다.

탐이 나 죽겠다는 시선이다.

레아는 지금이라도 다 물리고 동생을 데리고 도망가야 하는 건 아닌가 잠시 생각했다.

* * *

“기쁜 소식은 린드버그 왕실에서 헤네켄으로 곧 지원군을 요청할 모양입니다.”

“예상했던 바군요.”

정말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왕실을 지원하는 척 갔다가 기득권층의 뒤통수를 치고 그들의 창고를 여는 게 주된 목표였다.

나는 손을 살짝 들고 의견을 피력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헤네켄의 지원군 선봉에 제가 설까 하는데요.”

첩자처럼 조용히 가는 것보다는 대놓고 들어가서 훔쳐 나오는 게 나았다.

“음? 괜찮겠어요? 위험할 것 같은데.”

차라리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후에 다시 잠입을 하는 게 어떠냐고 황태자가 물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옥새의 위치는 매번 바뀌어요. 그래 봐야 성 안쪽이긴 해도요, 헤네켄이 린드버그 왕실의 편이 아니란 걸 눈치채면 키치너가 옥새를 들고 잠적해 버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성안에 아직 옥새가 남아 있을 때 찾아서 가져오고 싶어요.”

황태자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듯 팔짱을 꼈다.

별것 아닌 동작에도 흠칫하고 말았던 것이, 단단히 솟은 삼두근이 셔츠를 팽팽하게 압박하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와, 저 팔뚝으로 날 내리누르면 꼼짝없이 당하긴 해야겠다, 하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어차피 시간문제입니다. 키치너는 반드시 잡힐 거고요. 차라리 옥새를 새로 파죠.”

옥새를 새로 파자는 황태자의 말에는 레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헤네켄의 정당성이 의심받을 겁니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헤네켄이 린드버그의 공주와 왕자의 요청을 받아 도움을 주고, 그 대가를 받아 가는 형태여야 합니다.”

“맞아요, 주변국들이 모추 산맥을 호시탐탐 노리면서도 가만히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제국이 가만히 있었기 때문인데, 헤네켄이 마정석 욕심에 침략이라도 한 것처럼 비친다면 그들도 딴마음을 품을 거예요.”

잘못하면 오래 유지해 온 동맹이 파훼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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