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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18화 (18/150)

18화

대륙의 수십 개의 국가들은 헤네켄과 린드와이어 두 제국 간 힘의 균형으로 다툼 없이 유지되고 있었는데, 가뜩이나 쇠퇴하기 시작한 린드버그 때문에 아슬아슬하던 걸 헤네켄 제국이 중심을 잘 잡아 주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갑자기 헤네켄이 린드버그를 치고 모추 산맥까지 가져가면 주변국들의 반발이 거세져 다른 문제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제국 걱정까지 해 주다니. 감격스럽군요.”

황태자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옥새에 대해 알게 된 건 정말 소 뒷걸음질로 쥐를 잡은 격이었다.

소설 전개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린드버그의 문서고를 뒤지면서 린드버그의 공문서들에 한글이 쓰여 있는 도장이 찍혀 있다는 걸 발견한 후였다.

헤네켄에서 넘어오는 문서에도 똑같은 도장이 찍혀 있었고 덕분에 그게 옥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도장이 없이는 결코 공문서로 인정받지 못했다는데.

하필이면 도장에 한글로 ‘진짜 최종 수정, 정당한 피를 잇지 못한 자가 만지면 지옥 감.’이라고 적혀 있었던 거다.

지옥을 간다는 게 진짜인 건지, 아니면 단순 협박인지 궁금했다.

내용보다 패키지를 중시하는 제품 디자인처럼 예쁜 폰트로 새겨서 흐린 눈으로 보면 그럴싸하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수식이 지나치게 직관적이었다.

그 수식의 효력이 말 그대로라면 키치너가 여태 왕족 뒤에서 재상 노릇을 하며 버텼던 것도 이해가 가고 왕족의 성 밖 출입을 엄격히 금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간단히 말하면, 린드와이어 황가의 피를 잇지 않은 그가 옥새에 손을 대면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거다.

내가 옥새의 실물을 본 건 딱 두 번으로.

한때 엉덩이 종기로 앓아누운 왕의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었고, 마지막으로 봤을 땐 왕보다 키치너가 더 자주 앉아 있는 집무실 서랍에 있었다.

“헤네켄 황실에서도 ‘진짜 최종’이랑 비슷한 옥새를 쓰고 있죠?”

그걸 달리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 별명을 붙인 건데 황태자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을 들었다.

“‘진짜 최종’이요?”

네가 생각해도 이름이 좀 그렇지?

최종의 최종의, 진짜 최종 문서가 아니면 찍지 말라는 얘기잖아.

못 무른다고.

“아, 옥새 말입니다.”

“비슷한 걸 쓰고 있긴 합니다만, 그건 왜요?”

잠깐 침묵하던 황태자가 대답했고 나는 “황족이 아닌 사람이 만지면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묻고 말았다.

황태자는 “삼대가 저주받는다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외부인이 만진 적이 없어 실제로 저주를 받는지 어떤지는 헤네켄에서도 확인해 본 바가 없다고 덧붙인 황태자는 “다음에 한번 시험해 보고 싶군요.”라고 말했다.

누구를 써서 시험해 보려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의 명복을 빈다.

“그러나 너무 오래된 물건인데다 황위가 전복될 경우를 대비해서 새 옥새를 제작하려고 준비 중이었죠.”

탄탄한 헤네켄 황실이 쉽게 전복될 리는 없지만 언제까지나 헤네켄의 피를 이은 사람들이 황좌에 앉지는 않을 거라고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국가 원수가 바뀌어도 사람의 삶은 유지되어야 하니까요.”

과연, 주인공이구나.

대수롭지 않게 황실 전복을 운운하는 황태자에겐 자신감과 더불어 백성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황실 분위기가 묻어났다.

왕실이 곧 나라의 기둥이고 전부라 말하는 린드버그 왕국을 생각하니 또 착잡해진다.

이렇게 일일이 비교당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한 가지 정도는 린드버그가 더 나아도 되지 않냐고.

레아를 슬쩍 보니 나랑 똑같은 심경인 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황태자는 다리를 꼬고 짧게 박수를 한번 쳐서 분위기를 전환했다.

“일단, 폭동이 지나치게 빨리 번지는 감이 있어 그러는데,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양쪽이 피를 많이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심각합니까?”

“전시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습니다. 지금은 단순 국지전에 불과하거든요.”

황태자는 턱에 한쪽 손을 얹고 폭동이 일어나는 곳을 지도에 표시했다.

“총 열두 곳입니다. 그중 세 곳의 영주가 탄압을 시도했고 나머지는 그냥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탄압을 시도했다는 세 곳은 전부 왕도 근교의 영지였다.

“그러나 재상이 제 사병을 성 안쪽으로 불러들이고 있으니 왕도 안쪽으로 폭동이 번지면 대규모 진압이 이루어질 겁니다. 그럼 장비도, 기술도 없는 평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겠지요.”

왕도의 근교야 그렇다 쳐도 지방 귀족들이 의외로 적극적인 탄압 시도를 하지 않는 건 어째서지.

“지방 귀족들은 평민이랑 옷깃만 스쳐도 전염병이 옮아 죽는 줄 아는 사람들이야. 큰 피해를 보지 않는 한 절대로 전면에 나서지 않을 거야.”

레아가 말했고 황태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헤네켄에서도 아주 오래전엔 그런 미신을 믿었습니다.”

내 착잡한 표정을 본 두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날 위로하려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단순 미신은 아닐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니?”

“깨끗한 물도, 건강한 먹거리도 부족한 평민들이 다양한 전염병을 지니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의외의 소리에 놀란 두 사람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나 전염병이 옮을까 조심해야 하는 게 그들이 지금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아니죠.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 하니까요. 그게 린드버그의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예요.”

게다가.

“면역력이 약한 평민들이 되레 귀족을 피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점까지 와서 피하는 것 외에 하는 일 없는 귀족들은 정말이지 한심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군요. 헤네켄에서는 귀족이 평민에게 쓸데없는 질병을 퍼뜨리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 보겠습니다.”

황태자가 호쾌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주인공을 끌어들이기로 한 나의 선택은 후회를 남기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제 단 하나의 문제만 남았는데.

“어쨌든, 칼 린드버그 왕자. 앞으로 열흘 정도는 말 타는 연습부터 하셔야겠습니다.”

바로 이거다.

내가 말을 탈 줄 모른다는 점.

큰일을 치러야 하는데 꼴사납게 기사님의 뒤에 매달려 가고 싶지 않았다.

마차에 실려 이동하는 것은 더욱 탐탁지 않았다.

“물론 승마를 가르쳐 드리는 것은 접니다.”

황태자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가 한가해서 좋아해야 하는지, 난감해야 하는지…….

레아가 본인이 하겠다고 나서서 다시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그렇다 치고 레아는 여기 와서 점점 제 나이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린드버그 정상화가 한발 앞으로 다가왔다.

* * *

“여기선 고삐를 쥐기보다 살짝 힘을 빼 줘야 합니다.”

“예예.”

도로 연수는 절대 가족이나 친구한테 배우지 말라고 했다.

그 철칙 때문에 승마 선생님 자리에서 밀려난 레아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승마만 똑바로 가르쳐라.’라고 엄포를 놓다시피 했다.

황태자의 승마 속성 과외 덕에 이틀 만에 말을 타고 가볍게 달릴 수 있게 된 건 좋았다.

다만 속도가 점점 붙을 때마다 겁을 집어먹은 내가 자꾸 고삐를 당겨 말의 성질을 돋웠다.

말이 투레질을 하며 앞발을 치켜들었으나 쏜살같이 달려온 황태자 덕에 다치는 일은 없었다.

황태자는 허둥지둥거리는 나 대신 내 고삐를 잡아채 말을 진정시켰다.

착착 접어 올린 셔츠 때문에 그의 하박 근육에 핏줄이 한껏 섰다.

침을 꿀꺽 삼키며 애써 고삐로 시선을 돌리고 나 때문에 성질이 난 말의 얼굴을 두드렸다.

“미안…….”

작게 속삭이자 황태자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나 또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얇은 셔츠 사이로 비치는 두툼한 근육도 그렇고 승마 바지 때문에 도드라지는 올라간 엉덩이나 탄력적인 허벅지 같은 게 자꾸만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었다.

이 이상 증세는 승마를 배우기 시작한 이후부터 확연히 나타났다.

예비 매형이라 생각했을 땐 ‘잘생긴 총각’에서 감상이 멈췄다면 지금은 ‘저 손이 내 손목을 잡는다면,’ ‘저 허벅지로 내 다리를 내리누른다면.’ 하는 구체적인 상상까지 진행이 가능했다.

땀을 닦으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는 것도 유죄고, 싱긋 웃으며 손을 겹치는 것도 유죄다.

전재영이 TV에 나오는 예쁜 여자 연예인들을 보면서 ‘언니, 날 가져요.’ 하고 자주 감탄했었다.

그때는 재영이의 감탄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내가 완전 ‘형, 날 가져요’ 상태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물론 잘난 얼굴 때문만은 아니었다.

레아가 말한 것처럼 수컷 태가 팍팍 나는 페로몬 향이나, 황태자라는 범접할 수 없는 지위가, 남자로서의 내 동경심도 함께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보세요, 힘은 이렇게 빼는 겁니다.”

황태자의 손이 부드럽게 손등을 쥐어 와서 숨을 삼켰다.

조심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악력이 확연히 느껴져서 자꾸만 의식이 됐다.

검을 자주 쥔다더니 손바닥이 딱딱하다.

물렁한 부분이 하나도 없이 잘 구운 도자기 같은 몸이 부럽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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