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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19화 (19/150)

19화

“내 말 듣고 있어요?”

“예, 예예.”

“한번 같이 달려 보죠. 감각만 익히면 그다음은 금방이니까요.”

어어, 오지 마라.

“저, 괜찮은데요. 알아서 다시 해 볼게요.”

“뭘 알아서 합니까?”

“아니, 말도 둘이 타면 힘들 테고.”

코웃음을 친 황태자가 시선으로 ‘이게?’ 하고 말을 가리켜 보았다.

헤네켄은 말도 엄청 컸다.

장성한 남자 둘이 앉아도 짐을 실을 공간이 남긴 했지만 같이 타는 건 좀 그랬다.

훌쩍 올라탄 황태자의 탄탄한 가슴이 등에 닿아서 본능적으로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러나 황태자는 그걸 용인하지 않을 셈이었나 보다.

“바람의 저항을 최소로 하겠다는 겁니까? 좋은 시도였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황태자의 손이 불쑥 앞으로 나와서 내 가슴을 뒤로 당겼다.

파드득.

손이 닿은 부분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이것도 내가 오메가인지 뭔지라서 그런 건가.

예민하게 굴 필요가 없는데 신경이 자꾸 곤두서서 돌아 버리겠다.

입술을 깨물며 이번에는 엉덩이를 움직여 앞으로 이동했다.

뒤에서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한 음성이 들렸다.

“후우, 왜 그래요?”

아, 한숨도 쉬지 마.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결국 고삐를 쥔 채 뻣뻣하게 굳어 버린 나 때문에 황태자가 “오늘은 그만해요.”라고 말하고 말에서 먼저 뛰어내렸다.

민망해서 죽을 것 같았다.

기껏 가르쳐 준다는 사람 앞에서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혔으니까.

황태자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리면서 작게 “미안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미안할 것은 없지만, 도대체 왜 그래요? 내가 당장 왕자를 어떻게 할까 걱정돼서 그래요?”

황태자는 정확히 봤다.

나는 생리적인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게이가 되느냐, 마냐의 성향적 문제가 아니었다.

이전 생에서도 여자와 진지하고 긴 연애나, 불타는 사랑 따위는 해 보질 못했으니 의외로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자를 한번 만나 볼까.’ 하고 생각하는 것과 당장 ‘남자의 몸으로 아이를 낳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상상만 해도 두렵고, 어려웠다.

내 스물일곱 해의 평범한 남자로서의 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바꿔야 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왕자도 일전에 말했다시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잖아요. 준비도 안 된 당신에게 억지로 아이를 가지라고 종용하진 않을 테니 안심하란 말입니다.”

황태자는 놀랍게도 토라진 것 같았다.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황태자의 체향에서 ‘나 지금 단단히 삐쳤어.’ 하는 느낌이 팍 들었다.

그게 머리가 아니라 단전을 직격한다는 점이 단순한 냄새와는 달랐지만.

이런 게 페로몬 효과인가.

레아가 그랬다.

아주 강한 형질자는 페로몬으로 감정을 전달하기도 한다고.

마법이나 텔레파시 같은 구체적인 것은 아니지만 ‘위압, 분노, 슬픔, 동요. 기쁨.’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거다.

황태자의 페로몬은 내게 ‘약간의 슬픔과 동요.’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 마음을 동요시켰다.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양쪽으로 말고삐를 쥐고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황태자를 잰걸음으로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뭐가요.”

황태자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나는 말도 해야 하고 황태자도 따라잡아야 했기 때문에 약간 헐떡거리면서 황태자를 달랬다.

“그쪽이, 아니 전하께서 절 어떻게 할까 봐 그런 게 아니고.”

걸음을 늦춘 황태자가 승마장 입구에서 시종에게 고삐를 건네곤 휙 돌아봤다.

“그럼 뭐냐고요. 지난번부터 은근히 날 피하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쌓였구나.

만날 때마다 능글거리던 황태자가 오랜만에 제 나이로 보였다.

“싫어서 피하는 거랑은 좀 다릅니다. 그 뭐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부부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어색하기도 하고…….”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변화하는 게 난감하기도 하고.

“될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될 거예요.”

불퉁한 목소리로 정정하는 황태자가 약간 귀여워 보인 탓에 긴장이 살짝 풀렸다.

“물론 교환 조건이니까 당연히 따라야 하는 거지만요.”

그래도 겁나는 건 겁나는 거라고 솔직하게 말하려는데 황태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교환 조건이 아니었다면 그대와 나 사이엔 아무 일도 안 생겼을 거라고 확신하는 말 같군요.”

삐뚜름하게 문 입술 끝에 매달린 서러움이 보이는 것 같았다.

머리 하나는 훌쩍 큰 덩치 좋은 청년의 등을 쓰다듬어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앞서 나가려는 손을 꽉 쥐었다.

잘생긴 게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건 이런 걸지도 모른다.

스물일곱 해.

그저 그런 인생을 살아온 나를 원하는 잘난 남자.

약간 뿌듯하기도 하고. 이게 뭔가 싶고. 이래도 되나 싶지만 기꺼이 응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자꾸 생긴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그래, 사나이 전우영.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임신 좀 하고 출산 좀 하면 어떠냐.

다들 애 낳고도 잘만 산다잖아.

어? 결혼도 뭐, 하면 그만이지.

황태자의 배우자가 어떤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짐작은 간다만, 노력과 근성으로 어떻게든 하고.

사실 성을 나가도 딱히 할 건 없었잖아?

황태자 말처럼 빵은 여기서도 구울 수 있지.

아이는 황태자를 닮을까, 나를 닮을까.

아들이면 황태자를 닮고, 딸이면 칼 린드버그를 닮아라.

아니지, 황태자의 외모를 지닌 여자애라면 꽤 멋진 아가씨가 될 거야. 레아처럼.

흔들림 없는 눈빛의 황태자를 앞에 두고 공황에 빠져 상상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여자든 남자든, 사람이 됨됨이가 좋아야 매력적인데 거기에 외모까지 탑재하면 금상첨화지.

내게 황태자는 버거운, 아니, 감지덕지한 상대일 것이다.

멍하니 서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눈 딱 감고 만나 보자.’까지 간 날 보며 황태자는 더욱 흉흉한 기운을 내뿜었다.

“어차피 그대를 감당할 수 있는 알파는 나밖에 없고 날 감당할 수 있는 오메가도 당신뿐이에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장 접는 게 좋을 겁니다.”

날 지나치는 그의 잇새로 뿌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감당이 가능한 오메가와 알파.

서로에게 유일무이하다는 건가.

근데 왜 원작에서는 칼 린드버그가 만년 악역으로 생을 마감한 거지.

순간 번뜩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레아 린드버그가 여주가 아니어도, 황태자에겐 다른 짝이 있었다.

칼 린드버그가 그토록 방해해도 끊어지지 않는 질긴 사랑의 상대가.

지나친 상상 때문이었는지, 한쪽 가슴이 욱신 아파 오는 것만 같았다.

그럴 필요 없는데.

팩, 고개를 돌리고 잰걸음으로 승마장을 빠져나가려는 황태자의 손을 잡았다.

황태자는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전하를 감당할 오메가가 또 있으면, 국혼 대신 다른 걸로 이 빚을 갚아도 됩니까?”

정리도 되기 전 불쑥 튀어나온 내 말에 황태자의 목에 핏대가 불거져 나왔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황태자는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았다.

네가 뭔데 날 이렇게 밀어내느냐고 책을 잡는 것만 같다.

“잘 들어요.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이 대륙이 나를 감당할 수 있으면서 짝이 없는 우성 오메가는 셋뿐이에요.”

황태자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하나는 발현도 안 했지만 우성으로 추정되는 어린애이고, 하나는 오늘내일하는 노파죠.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당신입니다.”

황태자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그들 외의 열성 오메가와 결혼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한 자, 한 자. 씹어 뱉는 황태자의 입술이 떨렸다.

“열여섯, 첫 러트 때. 나는 상대방을 딱 죽기 직전까지 내몰았어요.”

‘어떻게요’라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하지 않았다.

황태자는 다시 한 걸음 다가왔고, 우리 사이에는 이제 한 뼘 남짓이 남았다.

“오해하지 마세요. ‘관계’는 없었거든요. 부황께서 친히 날뛰는 날 제압했고, 그 후로 본 성에는 오메가가 근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래 풍화되어 매끈하게 닦인 유리알처럼 빛나던 눈동자가 천천히 어두워지면서, 마치 내가 그 속에 침전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 러트가 오기라도 하면 일주일을 묶여 있어요. 난 두렵거든요. 고작 번식을 위한 행위를 위해 누굴 죽일지도 모르는 나 자신이.”

황태자의 몸에서 팍, 하고 페로몬이 터져 나왔다.

그의 역린을 건든 죄로 나는 그 페로몬을 다 받았다.

사실 내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백단향과 편백이 오묘하게 섞인 욕조에 톡 쏘는 허브 하나 올리고 몸을 담그는 기분이랄까.

오히려 더 맡고 싶고, 닿고 싶은 그런 향기인데.

그의 말대로 내가 ‘유일한’ 상대라 그런 걸까.

페로몬으로 어떻게 사람을 죽을 만큼 몰아가는 건지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황태자에게서 향기가 날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던 레아나 다른 기사들이 떠올랐다.

문득 바닥을 내려다보니 줄지어 지나가던 개미 떼들이 혼비백산 흩어진다.

“내가 이만큼 가까워도 당신은 괜찮잖아요.”

만면에 괴로워 죽겠다는 기색을 띤 황태자가 위협이라도 하는 것처럼 으르릉거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로 불쌍했다.

이렇게 잘생기고 몸도 좋은데, 창창한 나이에 평생 짝도 없이 홀로 늙어 죽을 거라고 결정했었던 모양이었다.

홀린 듯 손을 뻗었다.

본능이 반 이상이었고, 동정이 좀 섞였다.

괴로워하는 황태자의 뺨을 더듬었다.

황태자는 피하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그의 뺨을 더듬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에서 치워도 석상처럼 가만히 서서 나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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