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무책임한 소리를 해서 미안합니다.”
진심이었다.
선뜻 그의 기대치를 채워 주지도 못하면서 그의 결핍을 가벼이 여겼던 내가 진짜 악당 같았다.
어쩔까.
적당히 옆을 차지하고 있다가 진짜 주인공, 아니 오메가 주인공이 나타나면 피해 주면 될까?
그렇게 아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냥 순응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오순도순 살아가게 되는 걸까.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기도 벅찬 내가 감당할 만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재영이가 애타게 원하던 ‘꽁냥꽁냥, 해피엔딩.’은 누구와 누구의 이야기였던 걸까.
결론은 여전히 모르겠다.
고작 편지 한 장으로 날 선뜻 돕기로 결정한 다정한 주인공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게 뭐가 되든 간에요.”
내 손바닥에 뺨을 대고 얌전히 서 있던 황태자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 * *
오랜만에 연무장에 등장한 황태자 때문에 기사단원들은 허리에 힘을 주고 훈련에 임했다.
린드버그의 왕자가 온 후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조금 해이해진 참이었다.
목검이 아니라 진검으로 더미를 박살 내기 시작하는 황태자는 평온해 보였지만 속이 절절 끓었다.
물을 것도 없이 칼 린드버그 때문이었다.
그를 좋아하냐, 사랑하냐 하면 ‘아직은’ 아니었다.
그러나 곧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그가 가까이서 움직이고 있으면 말초신경이 다 그쪽으로 쏠렸다.
예의가 바르고 뭐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태도에도 마음이 동했다.
자기 주변 사람을 잘 챙기며 잔정을 흘려 대는 것은 못마땅했지만, 아드리안이 그의 사람이 되면 아드리안에게도 그렇게 해 줄 거라고 생각하니 약간 가슴이 뛰었다.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가늠을 할 수 없는 언행에 번번이 휘둘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 것보다 발그레한 뺨이랑 아득하게 푸른 눈으로 저를 응시하면서.
‘우리가 형질자라는 걸 차치하고서도 내 미래에 너는 없어.’ 하고 단언하는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여 절망스러웠다.
잠깐 멈춰 선 아드리안이 그가 더듬었던 자기 뺨을 만졌다.
부드러웠지. 좋은 냄새가 났지.
동갑에다 작고 연약한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그 손에 뺨을 비비며 날 좀 위로해 달라 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었다.
아니. 당장이라도 그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어 버리고 싶었다.
왕자는 발정이 오지 않았다고 했다.
평균 열다섯 살쯤 첫 히트를 겪는 우성 형질자들을 생각하면 늦어도 심하게 늦은 편이었다.
마력이 감지되지 않는 것도 그 탓인 것 같았는데 아드리안은 그 점이 굉장히 이상하고 의심스러웠다.
우성 오메가가 아닌데, 오메가인 척 린드버그가 저를 속이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했지만 첫 만남에 그가 진짜 우성 오메가라는 걸 아드리안은 확신했다.
그에게서 페로몬이 풀풀 퍼지고 있었으니까.
당장 히트 사이클에 돌입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그런 왕자를 여태 가만히 놔둔 것 보면 린드버그 놈들은 다 코가 삐뚤어진 게 분명했다.
아니면 제대로 된 형질자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든지.
퍼뜩 정신을 차린 아드리안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니지, 왕자가 린드버그에서 히트 사이클을 겪었다면 끔찍했을 거다.
누군지도 모를 알파 자식이.
우성은 때로 베타도 유혹할 수 있다 하니 베타를 들이밀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누군지도 모를 말 뼈다귀가 그의 몸을 더듬는 상상을 하니 머리에서 열이 팍 올랐다.
황후가 요만큼 눈을 돌리는 것도 참지 못하는 글렌 황제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
뛰어난 거랑 별개로 베타보다 본능이 앞서는 알파들은 짝인 오메가가 나타나면 이렇게 초조해지는구나.
슝, 슝 검이 바람을 가를 때마다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더미들을 보며 기사단장이 혀를 찼다.
“전하께서 오늘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가 보군.”
황태자의 넘치는 힘은 기사단에서도 알아주기 때문에 황태자용 더미를 따로 제작하는 장인단이 따로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내일 밤샘 작업에 들어갈 판이었다.
“먹잇감이 눈앞에 있는데 손도 못 대고 계시니 이해는 갑니다.”
때맞춰 연무장에 도착한 벨프리가 중얼거렸다.
“헨드릭 소공자! 어서 오시오.”
기사단장은 반갑게 벨프리를 맞았다.
“오늘도 고생이 많으십…….”
“전하를 어서 모시고 가 주게, 우리 기사들이 납작해지기 전에.”
벨프리가 인사를 채 마치기도 전에 기사단장은 벨프리의 등을 밀었다.
“아니, 저보고 저 더미처럼 뎅강 썰리라는 말씀이십니까?”
발바닥에 힘을 준 벨프리가 마침 두 동강이 나는 가짜 인간을 보며 사색이 됐다.
“공자는 베타라 모르겠지만, 지금 황태자 전하께서 우리 기사들을 다 죽이려 한단 말일세.”
단장은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이마에서 땀이 뻘뻘 나는 단장을 흘긴 벨프리가 저만치 포진해 있는 기사들을 넘겨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들 중 몇 명의 열성 알파들이 코피를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단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니까 제가 아드리안 전하가 오실 땐 가급적 연무장을 비우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벨프리가 혀를 찼다.
기사단장은 우는 듯 웃는 듯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기사들 중 절반이 전하를 흠모하니 어쩔 수 없죠.”라고 말했고 벨프리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황태자의 강함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끌어당기는 힘도 있었다.
특히 혈기 왕성한 젊은 기사들은 황태자의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는 걸 손꼽아 기다릴 정도였으니, 황태자가 연무장에 등장하면 연심과 결이 다른 핑크빛 기류가 널리 퍼졌다.
“린드버그의 왕자님과 다투기라도 하셨답니까? 근래 들어 가장 기분이 나빠 보이시더군요.”
어느새 다가온 부단장이 코피를 슥 닦아 내자 벨프리가 한 걸음 옆으로 이동했다.
페로몬에 짓눌려 허덕거리면서도 열렬히 사모한다는 표정을 감추질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년 문과 톱에 체육계랑은 거리가 먼 벨프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이었다.
아드리안 전하가 좀 멋지기로서니, 제 몸이 망가지는데도 기를 쓰고 곁에 있으려는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그 왕자님이 전하와 싸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두 분은 아직 교제하는 사이도 아닌걸요. 하고 덧붙이니 부단장이 “네에?” 하며 놀랐다.
“교제를 안 하신다니, 왕자님이 요즘 페로몬을 여기저기 흘려 대는 통에 기사들이 가까이 가지 못할 정도라던데, 가장 자주 붙어 계시는 전하께서는 괜찮으시답니까?”
부단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꿀 바른 금사 같은 머리카락부터 미려하지 않은 구석이 없는 외모와 더불어 달콤한 향기까지 풍기니 알파 비율이 높은 귀족들은 외성 근처에 가기를 꺼려 했다.
그분이 그냥 평민이었으면 큰 고초를 치렀겠지만, 그분의 짝으로 내정되어 계신 분이 저 아드리안 황태자인데 실수라도 했다간 삼대가 멸족당할지도 몰랐으니까.
벨프리는 칼 린드버그 왕자가 그렇게 인기가 많았던가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가끔 기사들이 넋을 잃고, 가끔 시녀들이 호들갑을 떨긴 했지만.
그냥 좀 이쁘장한 남자 아닌가?
심지어 오메가치고는 키도 골격도 큰 편이었다.
벨프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다 부단장이 엄지를 치켜올려 보였다.
“근처에 가면 아주 좋은 향기가 납니다. 어느 정도냐면 나비를 불러 모을 정도이죠.”
“흐음, 그 정도입니까.”
벨프리는 왕자 근처에서 잘 말린 빨래 냄새밖에 못 맡아 봤다.
“그분이 흘리는 건 페로몬뿐만이 아니지.”
단장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럼 또 뭘 흘린다는 말입니까.”
이상한 데서 어수룩한 왕자님이 저 모르는 사이 무슨 실수라도 했을까 걱정스러운 벨프리가 물었다.
둘만의 은밀한 비밀을 교환하듯 눈빛을 주고받는 단장과 부단장 때문에 대놓고 불쾌한 얼굴을 한 벨프리가 뚱한 얼굴을 했다.
“뭘 또 흘리냐니까요?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죠?”
왕자가 전처럼 망나니가 아닌 건 벨프리도 잘 알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 사이에서 태어난 삼 남매 중 유일하게 베타인 벨프리는 페로몬의 작용을 이론으로만 알고 있었다.
우성 오메가인 왕자가 누군가를 유혹하기로 작정한다면 여기 있는 기사들 중 반은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부분을 이용해 무슨 일이라도 꾸미려는 건 아닐까.
의심이 뭉게뭉게 피어나려는 찰나 단장이 손을 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데, 그런 건 아니오.”
“그럼 뭡니까.”
결국 벨프리가 가슴을 치며 답답함을 호소하자 머뭇거리던 부단장이 대답했다.
“정을 흘리고 다니십니다. 아주 가랑비 같은 잔정이요.”
“예?”
얼빠진 벨프리의 대답에 부단장이 큭큭, 웃었다.
“그분이 여기 온 뒤로 하루도 빠짐없이 연무장을 뛰시는 거 알고 계십니까? 아침, 저녁으로요.”
벨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마른 분이 황태자 전하와 자신을 비교라도 하는 건지, 체력 단련에 목숨을 건 것처럼 밤낮으로 뛰고 맨손 운동을 한다는 건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가끔 벨프리가 용건이 있어 들르면 그는 정체불명의 동작으로 맞이하곤 했으니까.
그의 하인이 저건 프랑크고 저건 데들레프트래요, 하며 자랑스럽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분은 아무리 봐도 오메가 같지 않더라고요.”
부단장이 말하자 단장이 정정했다.
“오메가 같지 않다기보다는 전반적으로 귀족답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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