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네가 내 역량을 과소평가하는구나!”
좀처럼 언성을 높인 적 없던 레아가 목소리를 키우자 칼이 억울한 듯 같이 목소리를 키웠다.
“그런 거 아니에요. 누님은 마법도 쓸 줄 아시고 승마도 검술도 저보다 한참 위지만!”
칼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옥새를 찾으러 다녀오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헤네켄의 병사들을 줄줄이 끼고 가는 길이다.
칼 린드버그는 귀족 도감을 뒤지며 반드시 처단당해야 할 사람, 그리고 일단 두고 볼 사람을 직접 나누었다.
어디 도감만 뒤졌겠나.
한 해에 한 권, 총 12년에 걸쳐 작성된 회계장부와 실록까지 전부 뒤졌다.
별로 참석하고 싶지 않은 연회에 얼굴을 비치고 귀족들과 말을 섞었던 것도 다 이날을 위해서였다.
칼 린드버그가 레아를 그곳에 가라고 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좋든 싫든 피를 보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아직 어린 레아를 그 진창에 밀어 넣고 싶지 않았고, 두 번째는 지금의 칼 린드버그가 칼 린드버그의 몸은 가지고 있지만 속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라 왕과 왕비를 구금하는 데 거리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저는 누님이 린드버그를 얼마나 위하는지 알아요. 만에 하나 제가 잘못되더라도 이쪽에서 다음 일을 도모해 주십시오. 그게 린드버그를 위한 일이니까요.”
원래 린드버그 사람도 아닌 전우영이 고작 몇 개월의 세월로 린드버그에 대한 애국심이 생길 리 만무했다.
오로지 동정과 호승심 반반으로 일을 벌인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그 책임을 지고 싶었다.
레아가 아드리안의 상대역인 줄 알고 있었을 때야, 린드버그의 빈 왕성을 적당한 성품의 귀족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레아가 제왕의 기질을 타고난 알파라는 것을 안 지금은 그녀의 방 안에 숨겨져 있던 수많은 정치 관련 책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그녀가 타는 목마름으로 바라는 것이 무언지도.
칼 린드버그는 린드버그의 무사와 평안을 누구보다도 바랐을 단 한 사람에게 걸맞는 자리를 탈 없이 돌려주어야만 했다.
칼의 고집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던 레아 린드버그가 숨을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멈췄다.
칼 린드버그가 연민과 애정을 담아 저를 보는 눈빛이 꼭 손아래 동생을 보듯 했기 때문이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의지할 사람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자신하며 살았지만 아주 깊은 곳에 간직했던 외로움을 관통하는 시선이었다.
“그러니 누님, 제가 다녀올게요. 제가 정치를 압니까, 제왕학을 압니까? 누님과 저는 지니고 사는 책임의 무게가 다르잖아요. 그러니 한 번쯤은 진짜 왕자 노릇 좀 하게 해 주세요. 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레아가 이마를 짚으며 작게 신음했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철이 들었다고.
네가 언제부터 내 생각을 그렇게 했다고.
네가 언제부터.
“털끝 하나라도 다쳐 돌아오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레아는 결국 울먹이고 말았다.
칼이 환하게 웃었다.
만년 소년 같은 때 묻지 않은 미소에 레아는 더욱 할 말을 잃었다.
폐쇄적인 문화를 간직한 린드버그에서 여성형 알파로 태어난 자신이 받았던 핍박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저게 오메가였다면. 평범한 여성이었다면 쓸모가 많았을 텐데.〉
〈하필 우성 알파라, 곁다리로 시집을 보낼 수도 없고.〉
매일 저주처럼 들었던 말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쓸모란 시장에 팔려 나가는 가축처럼 혼인으로 값을 매기는 것뿐이었다.
열성 알파인 아비는 딸을 두려워했다.
우수한 오메가였지만 팔리듯 시집온 어미는 그 영광이 바랠까 봐 딸을 외면했다.
우성 오메가로 태어난 칼은 헤네켄을 견제하기 좋은 패로 쓰였지만, 그녀의 것이면 무엇이든 빼앗아야 직성이 풀리는 되바라진 아이였다.
린드버그의 귀족들에게 우성 알파는 경계의 대상이나 되었다.
말을 늦게 배우라고 붙여 놓은 벙어리 시녀는 성의 다른 권력자들에게 매질을 당하면서도 무수히 많은 종류의 책을 날랐다.
말을 배우기 전에 글을 배웠고, 뒤에서 조용히 힘을 키우려 노력했다.
레아가 우성알파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면 핍박이 거세질까 두려워 억지로 페로몬을 누르고 침묵한 세월이 거의 5년에 달했다.
그쯤 되니 이제는 핍박을 넘어서 공기 취급을 받았다.
탐욕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백성들을 알면서도 웅크리고 언제 올지 모를 때를 기다리면서, 울지 않으려고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손톱을 박았는데.
칼은 레아가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 부분까지 금방 알아챈 모양이었다.
“걱정 마세요. 편애하던 아들에게 통수 한번 맞아 보라죠.”
누님이 자유를 빼앗기고 고통받았던 시간만큼 가둬 둘 거라며 호언장담하는 칼의 말에, 레아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 작게 웃었다.
* * *
벨프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드리안의 뒤를 따르면서 이번에야말로 칼 린드버그 왕자가 큰일 났다는 생각을 했다.
왜, 왕자는 다른 곳에서 살 생각을 하는 걸까.
그 자신에게도 아드리안은 필요한 상대인데.
하도 냉기가 풀풀 날리기에 당장이라도 왕자를 찾아가 심문할 줄 알았지만, 황태자는 의외로 자신의 방에 처박혔다.
벨프리는 안심하는 자신이 좀 이상하다 여겼다.
아드리안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모든 이의 선망의 대상이었다가 정작 자신이 원하는 한 사람이 그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걸까.
“왕자의 행보가 역시 수상하지 않습니까? 좀 더 뒤를 캐 볼까요?”
벨프리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황태자 때문에 벨프리는 닦던 모노클을 놓쳤다.
데굴데굴 굴러 황태자 발치에 닿은 모노클을 집어 들며 벨프리가 “객관적으로는 아주 매력적인 분이시죠.” 하고 대꾸했다.
빈말은 아니었다.
후, 하고 한숨을 쉰 아드리안이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열이 하도 올라 찝찝함도 증발해 버린 듯했다.
아드리안은 왕자의 변화를 믿었다.
연기라고 해도 저 정도의 연기면 속아도 기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만 왕자는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걸까.”
힘과 능력 면에서 훨씬 우위를 차지하는 아드리안이 왕자를 함부로 다루지 못할 이유는 없었었다.
다만 그러고 싶지 않아서 참아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안은 왕자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같이 느껴졌다.
벨프리도 그 부분이 참 궁금했다.
왕자가 원하는 것이 지나치게 서민적인 부분 말이다.
린드버그의 광영과 자신의 안녕을 위해.
황태자가 린드버그에 찾아왔을 때 그를 무력으로 억류한다거나, 헤네켄에 오자마자 황태자를 꼬셔 각인을 하고 그것을 빌미로 원하는 걸 얻어 낸다거나 하는 상황이 더 자연스러울 정도였는데.
하지만, 제 상상이 지금의 칼 린드버그와 퍽 어울리지 않아서 벨프리가 헛웃음을 쳤다.
“워낙 제멋대로인 인생을 사셨던 분이라 무료한 나머지 색다른 즐거움을 꾀하는 건 아닐까요?”
아드리안의 눈이 벨프리를 향했다.
“고작 즐거움을 위해 칼 린드버그가 제 인생을 걸어?”
우성 오메가인 것 빼고는 아무것도 못 하던 왕자가?
“아니면 정말로 린드버그의 평화를 꾀하면서 전하와 짝이 되는 건 싫으실지도요.”
벨프리는 모노클을 끼우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친우이며 주군인 황태자의 어깨가 볼썽사나울 정도로 축 처진 탓이다.
“어차피 왕자님은 전하와 혼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헤네켄이 린드버그를 돕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저야 뭐, 손 안 대고 모추 산맥을 꿀꺽 삼키게 되니 그걸로도 됐습니다만.
벨프리는 아무렇게나 던져진 황태자의 망토를 주워 들었다.
“일단 짝을 맺으면 번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왕자님은 전하 옆에 영원히 머물러야 합니다. 너무 깊은 생각은 하지 마세요.”
벨프리의 말에 힘이 빠진 아드리안이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칼 린드버그가 자신의 옆에 영원히 있는 것.
나쁘지 않은 미래였지만 그렇게 끌려가듯 진행되는 건 뭔가 부족했다.
물론 제안한 것은 아드리안 자신이었지만 반쯤은 왕자도 바라던 일이라 생각해서 요구한 것이었다.
내키지 않는 그가 억지로 제 옆에 머물러 있는 건 아드리안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이왕이면 자신과 칼 린드버그 사이에 더 끈끈한 무언가가 있으면 좋을 텐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번 일은 왕자님의 계책이기도 하지만 헤네켄에는 더 없는 기회잖습니까. 눈엣가시인 린드버그 왕조를 싹 밀어 버리고 마정석도 가져오고요, 전하께서는 바라 마지않았던 짝을 얻을 기회이니 금상첨화죠.”
모두 다 헤네켄이 자력으로 이룰 수 있었던 것들이긴 해도 왕자가 움직이면서 훨씬 ‘좋은’ 형태로 얻을 수 있게 됐으니 큰 수확은 맞지.
벨프리는 그 점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아드리안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기가 찬 벨프리가 황태자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전하, 왕자님이 전보다 상태가 훨씬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의구심은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일이 끝날 때까지는요. 하고 황태자 앞에 선 벨프리는 제 손수건을 꺼내 아드리안의 얼굴을 닦아 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 아니라면서요.”
벨프리에 말에 아드리안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집착한다니 알파나, 오메가 사정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툴툴거린 벨프리가 돌아서 방을 나갔다.
황태자가 저렇게 무르니 자신이라도 깐깐하게 굴어야 했다.
벨프리가 나간 후에도 계속 누워 있던 아드리안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집착인가, 내가 알파라서, 저쪽이 오메가라서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본능일 뿐인가?”
아드리안의 공허한 혼잣말이 방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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