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 *
“처음에 옥새를 보관할 때 함을 두 개를 만들었어요. 그건 당연히 분실이나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서였고, 둘 중 비어 있는 함이 열리면 다른 하나는 위치가 이동합니다.”
미우나 고우나 황태자가 지금 가장 빠져 있는 상대라 벨프리는 왕자에게 와서 작전의 세부 사항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내가 본 건 다행히도 옥새의 실물이었습니다. 오히려 보관함을 보질 못했군요.”
“두 번 다 왕이 직접 사용했습니까?”
“네, 키치너의 시선 안에 있긴 했지만요. 옥새 자체는 린드버그 왕족이 아니면 건드리지 못한다고 해도 보관함은 누구나 만질 수 있으니, 혹시 키치너가 보관함을 들고 왕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왕자의 말에 벨프리는 일리는 있지만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 부분은 레아도 찬성했다.
“키치너가 좀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인물이긴 해도 모든 걸 무시하고 재상 자리에 있을 순 없어. 이러나저러나 작위 찬탈권은 국왕에게 있고 옥새는 그의 권한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는 물건이니까. 만약 키치너가 그것을 제 소매 안에 넣는 만행을 누군가 고발이라도 한다면 그대로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지.”
키치너가 가져다주는 정체불명의 물담배에 중독되어 있는 왕이 그랬을 리는 없지만, 일단은 그랬다.
호오, 하고 고개를 끄덕인 칼 린드버그가 테이블에 코를 박았다.
중요한 이야길 들을 때 메모를 하는 게 왕자의 습관인 듯 오늘도 왕자는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다.
벨프리는 그런 왕자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진짜 최종, 일단 성안에 있음. 왕족의 피를 이은 사람만 만질 수 있음, 마지막으로 확인한 곳 집무실 책상 두 번째 서랍. 가짜 보관함 위치 모름.
글씨체는 나쁘지 않지만 두서가 없고 별이며 밑줄이 여기저기 그어져 있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왕자는 왜 옥새를 ‘진짜 최종’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지칭하는 거지?
“그런데, 그 ‘진짜 최종’이라는 건 뭡니까?”
벨프리가 묻자 왕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옥새 이름인데요.”
“옥새 이름이요?”
레아도 벨프리도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짓자 왕자가 돌연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이거 뭐가 있구나.
왕자가 손을 저으며, 그냥 별명이라고 얼버무려도 벨프리의 굳은 입가가 풀리지 않았다.
린드버그에서 옥새에 이름을 붙였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 그러고 보니 왕자는 너무 자연스럽게 옥새를 ‘진짜 최종’이라고 몇 번 불렀다.
“왕자님, 혹시 수식을 읽을 줄 아십니까?”
“네? 아, 아뇨?”
얼씨구? 이젠 아주 눈을 데구루루 굴리고 입술을 깨물고 난리가 났다.
지난번에 아드리안 전하께서도 물으셨지, 수식을 읽을 줄 아냐고. 그때도 왕자는 그런 것 읽을 줄 모른다고 했다.
수식을 ‘보는 것’과 ‘읽는 것’은 완전 다른 차원의 문제였기 때문에 벨프리는 어떻게든 캐 보고 싶었다.
“크흠, 어쨌든 옥새 보관함의 원리는 ‘문’과 동일합니다. 왕자님 기억나시죠?”
벨프리가 모르는 척 주제를 바꾸자 티 나게 가슴을 쓸어내린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네켄이랑 린드버그를 연결하는 그 마법 문 말이죠?”
걸렸다.
벨프리의 눈꼬리가 대번 날카롭게 위로 올라갔지만 왕자는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레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왕자를 훑었다.
그게 무슨 원리냐고 해맑게 묻는 왕자는 벨프리가 보기에 등 뒤에 칼을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벨프리는 금방 표정을 숨겼다.
“다른 좌표에 있는 두 물체가 똑같은 마법 효과를 보려면, 동일한 재질의 마정석에 똑같은 수식을 그려 넣고 동일한 개수로 맞춰야 양쪽이 함께 발동됩니다.”
“오오…….”
왕자는 다시 손을 바쁘게 놀렸다.
“거기다가 물체가 이동을 하려면 이동을 하려는 좌표에도 마정석이 있어야겠죠. 시소 같은 겁니다. 한쪽이 들리면 한쪽은 내려가야죠.”
종이 위에 왕자가 시소를 그렸다.
“내다 버린 뒤 영영 찾을 필요가 없는 물체라면 수식이 틀려도 상관없습니다만.”
오호라, 하고 왕자가 탄성을 질렀다.
“그렇다면 가짜 옥새함을 발견하더라도 그걸 열면 진짜는 가짜 옥새함이 있던 자리와 동일한 수식에, 동일한 마정석이 있는 자리로 옮겨 가겠군요.”
“맞습니다.”
왕자는 다시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벨프리를 의식한 듯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다 쓰고 있긴 했지만 벨프리는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진짜 최종, 마정석 찾기, 가짜와 진짜는 같은 마정석이 있는 자리에, 아마 어이없는 문장일 듯.
문장.
벨프리의 모노클이 날카롭게 빛을 반사했다.
‘왕자가 수식을 읽는다. 마법은 쓸 줄 모른다며!’
벨프리는 레아를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쳐다봤지만 레아는 꼿꼿한 자세로 받아쳤다.
‘숨기는 게 있으면 네가 어쩔 건데?’
벨프리가 눈에 힘을 좀 더 줬다.
‘히트가 한 번도 안 왔다는 것도 거짓말 아니야? 마력이 없다는 것도 거짓말 아니냐고!’
레아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 그러니까 거짓말이면 네가 어쩔 거냐고?’
종국에는 페로몬까지 얹어서 보내는 당당한 시선에 벨프리의 기세가 좀 수그러들었고 둘의 신경전에 별 관심을 주지 않은 왕자가 손을 들어 질문을 던졌다.
“진짜를 한 번에 찾으면 가짜는 구태여 찾을 필요가 없겠죠?”
“둘 다 찾으면 좋기야 하겠습니다만. 혹시 진짜를 먼저 찾게 되면 보관함은 버리고 옥새만 들고 오십시오.”
“그렇죠? 누가 가짜 보관함을 열면 진짜가 이동해 버릴 테니까.”
왕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또 궁금한 게 있는데요.” 하며 손을 올렸다.
한껏 예민해진 벨프리가 “또 뭡니까.”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왕자는 세상 조심스럽고 어색한 말투로 “근데, 오늘 전하는 안 오십니까?” 하고 묻고는 긴장한 듯 허벅지에 손바닥을 닦았다.
그게 이제 궁금하냐.
왕자 때문에 김이 샌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 * *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는 본성의 첨탑을 보며 내가 입을 딱 벌리자 옆에 붙어 있던 시종이 뿌듯하게 가슴을 폈다.
“압도적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헤네켄의 상징이며 자랑이죠.”
“과연 그렇군요.”
외성에서 본성의 입구까지 말로 수 분, 정원을 지날 땐 마차로 갈아타고 또 수 분, 별로 멀지 않다 생각했던 건, 원근법이 무시될 만큼 컸기 때문이었나.
매일 출근 도장 찍듯 외성에 나타나던 황태자는 지난번의 어색한 헤어짐 뒤로 외성을 찾지 않았다.
그래 봐야 이틀이긴 하지만 어딘가 찝찝하고 불편한 마음에 벨프리에게 물었는데, 그는 뭔가 말을 하고 싶어 입술을 달칵거리다가 이내 체념한 듯 말했다.
〈전하께선 지금 연구실에 틀어박혀 계시니 직접 찾아가 보시지요.〉
허가나 감시가 필요한 건 아닌지 걱정하는 내게 벨프리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왕자님은 허가가 필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하와 혼인 약속을 하셨던 건 기억하고 계시죠?〉
질책을 담은 목소리에 레아가 ‘소공자, 먼저 주제 파악을 하세요.’라고 냉랭하게 말해서 분위기가 일순 험악해졌었다.
괜한 얘기를 꺼내 두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벨프리는 이내 ‘죄송합니다.’ 하고 먼저 자리를 떠 버렸다.
레아는 우리가 비록 소국이지만, 엄연히 왕족이고 저쪽은 그냥 귀족이니 좀 더 당당히 굴어도 된다고 나를 위로했다.
제국의 공작 집안이, 어디 ‘그냥’ 귀족이겠냐마는.
외부인인 내가 본성에 들락거리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 같았고, 초대받은 적도 없었기에 알아서 주의하고 있었던 것이 무색하도록 쉽게 문을 통과했다.
본관의 내부는 깨끗하고 심플했다.
화려하고 조잡한 린드버그의 왕성이 떠올랐다.
사용인들이 무릎이 닳도록 바닥을 닦았지만 거의 매일 술에 취한 귀족들의 구둣발로 더러워졌던.
“어머, 왕자님!”
심란한 마음으로 회랑을 지나는데 처음 보는 시녀가 달려와서 치마 양쪽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예, 아. 안녕하세요.”
“또 그러시네, 왕자님께선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하시면 된다니까요.”
시녀는 꺄르르 웃었다.
상당한 미인이다.
레아에 비하면 소박하긴 하지만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한 게 딱 내 스타일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그녀를 본 기억이 없어 멀뚱히 서자 시종이 그녀를 나무랐다.
“누가 이렇게 방정맞게 말을 겁니까. 무례하게.”
“이런, 실례했군요. 죄송해요. 왕자님.”
전혀 죄송하지 않아 보이는 만면에 미소 띤 얼굴이어도 괜찮았다.
“제가 누군지 기억이 전혀 안 나신다는 눈치시네요. 저는 본관 꼭대기 층의 수석 시녀인 나타샤이고, 예언자를 모시고 있어요. 왕자님의 침실 시녀가 제 친동생이라 종종 가서 수다를 떨곤 했죠.”
그녀는 본관에서 나를 만날 줄은 몰랐다며 진짜 반가운 듯 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주 마주치는 시녀들 중에 그녀와 닮은 아가씨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의 이름이, 아마.
“아 설마, 에이레네의!”
“맞아요!”
내가 맞힌 게 기쁘다는 듯 방방 뛴 시녀는 시종의 헛기침 소리를 들으며 다시 차분히 손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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