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에이레네는 마르코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쾌활한 아가씨로 여러 가지 자잘한 도움도 많이 주고 식견이 넓어 좋은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어쩐지 얼굴이 익더라니, 두 분이 참 닮으셨네요. 미인 자매군요.”
“어머나.”
시녀가 입을 가리더니 손부채질을 파닥파닥했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 빙글 웃었다.
이번에는 시종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크흠, 어딜 가던 길이면 빨리 가시오. 지금 전하께 가는 길이니.”
나타샤는 내가 황태자를 만나러 왔다는 사실이 기쁜 건지 아까보다 더 홍조를 띤 얼굴로 작별 인사를 고했다.
“시간을 빼앗으면 안 되겠군요. 저도 마침 심부름을 가던 길이라.”
“예, 그럼 다음에.”
“아, 왕자님. 혹시 예언자님을 만나면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전부 무시하세요.”
“예?”
예언자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마주칠 일이 있을까 싶다마는, 나타샤는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한국식 점쟁이 같은 사람인가?
그러나 나타샤의 대답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분은 전하의 짝으로 지지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신데, 저는 왕자님 편이거든요.”
“예에?”
“나쁜 분은 아니지만 약간 머리가 이렇게 된 것 같아요.”
나타샤가 제 관자놀이에 검지를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니 그분이 무슨 말을 해도 그냥 무시하는 게 왕자님의 정신건강에도 좋을 거예요.”
이봐요, 예언자가 하는 말을 어떻게 흘려들어!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바람과도 같은 속도로 사라졌다.
시종이 “저저, 무례하고 방정맞은!” 하며 내 눈치를 봤다.
“예언자가 뭡니까?”
“관심 안 두셔도 됩니다. 왕자님.”
어색하게 웃은 시종이 발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그러니까 더 관심이 가는데요.”
“그녀는 가끔 예언을 하는 마녀일 뿐입니다.”
딱딱하게 말한 시종은 내 등을 떠밀듯 서둘렀다.
마녀라고?
하긴 마법도 쓰고 본 적은 없지만 마물도 있다는데 마녀도 있을 수 있겠지.
시종은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게 파렴치한 범죄인 것처럼 굴었다.
회랑을 지나며 만나는 사람들이 화들짝 놀랄 정도로 잰걸음으로 황태자의 연구실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헉, 헉 여깁니다.”
칼 린드버그만큼이나 운동 부족인 듯한 시종이 숨을 내몰아 쉬었다.
내 머릿속엔 온통 예언을 한다는 마녀와 그녀가 지지한다는 짝이 누군지에 대한 것들 뿐이어서 내가 왜 본성에 들어섰는지조차 잊을 뻔했다.
문을 두드리려는 시종의 팔을 덥석 잡았다.
“예언자가 지지하는 짝이 누군지 혹시 아세요?”
“저는 그런 것 모릅니다. 저는 황태자 전하 직속 시종이라. 나 원 참,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는지.”
우성 오메가 왕자님이 떡 나타나셨는데, 언감생심 베타를 짝으로 자꾸 들이민다고, 마녀는 미친 게 분명하다고 구시렁댔다.
방금 전에 모른다고 잡아떼 놓고.
어지간히 그 예언자가 못마땅한 모양이지.
예언자가 지지하는 짝이 베타라고? 그녀가 어떤 예언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언자가 말하는 짝이 황태자의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시종은 정말 두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자님, 부탁드리건대, 신경을 끊어 주십시오. 어쩌다가 한두 가지 맞는 예언을 하고는 성에 자리 잡은 사람입니다만, 하는 짓이 워낙 괴이쩍어 다들 피하는 여자입니다.”
생각에 빠진 날 불안한 눈빛으로 보던 시종이 목소리를 낮추고 제발 관심을 멈춰 달라고 사정했다.
“그렇지만 본성에 있는 것 보면 꽤 신뢰를 받는 모양인데…….”
“그것이…….”
그것이? 우물쭈물 뭔가 말하려고 하는 시종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자 문이 발칵 열렸다.
“여기서 뭐 합니까? 들어오지 않고.”
정말, 매우, 기분이 나빠 보이는 황태자가 흉흉한 눈빛으로 나와, 내가 잡고 있는 시종의 팔을 노려보았다.
* * *
“사람들과 쉽게 거리가 가까워지는 건 습관입니까? 아니면 처세술인가요?”
탕, 찻잔을 내려놓는 손길이 거세다.
본의 아니게 예언자의 정보를 캐내는 첩자 같은 모습을 보여 준 뒤라 찔끔하고 눈을 돌리는 내 앞에 황태자가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았다.
다리가 기니 두 번도 꼬이겠다.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심상찮은 황태자의 기색에 사과를 먼저 했다.
“죄송합니다, 그, 갑자기 궁금증이 도져서.”
“궁금한 게 있으면 내게 물어보면 되잖아요. 내가 말했잖습니까.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한다고.”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지.
황태자는 진짜 화가 난 모양이었다.
오늘은 나름의 화해를 도모하려고 부러 찾아온 건데 오자마자 화를 내게 만들다니, 나도 참 학습 능력이 없다.
“그냥, 우연히 예언자에 대해 듣게 돼서, 궁금한데 전하까지 귀찮게 할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황태자는 조금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말투가 누그러졌다는 거지 여전히 심통 난 것처럼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귀찮지 않으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나한테 물어봐요. 사용인들은 뭐 안 바쁘답니까? 성에서 제일 바쁜 사람들입니다.”
“그럼, 예언자에 대해 물어도 될까요?”
황태자의 눈이 대번에 뾰족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지 모를 ‘진짜 주인공’에 대해 나는 알아야만 했다.
막말로 결혼하고 애 낳고 나서 갑자기 나타나면 우리 애는 어떡하냐고!
……가 아니라 대뜸 악역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 그 주인공은 어떻게 하냔 말이야.
싸늘한 북풍이 방 안을 몰아치듯 황태자의 페로몬이 ‘또’ 맴돌았다.
시도 때도 없이 페로몬을 방출하는 건 나를 자극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건지 모르겠다.
오늘의 페로몬은 서늘했다.
모골이 송연하고 등에서 땀이 비죽비죽 나도 꿋꿋하게 앉아 있으니 결국 황태자가 휴, 한숨을 쉬었다.
“예언자라고 하지만, 아직 어린 소녀입니다. 어디 숲에서 배회하던 걸 발베니 대공작의 상단이 데려왔고, 그녀가 대공작의 상단에 화재가 날 것과 서쪽에서 마물 떼가 마을을 덮칠 것을 정확하게 예언한 덕에 피해를 줄였죠.”
“대단한 분이군요.”
“거기다가 기사단을 중심으로 전염병이 퍼질 것도 예측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성안에 들여놓았습니다.”
이것 봐. 그 정도면 진짜 예언자 아니야? 어쩔 수 없이는 뭐가 어쩔 수 없어.
대뜸 들이닥쳐서 도와달라 생떼를 부리며 눌러앉은 나보다는 그녀가 더 헤네켄에 도움이 되는 사람 같았다.
그럼, 그녀가 지지한다는 황태자의 짝이.
진짜 이 소설의 주인공이 분명했다.
언제 등장하는 거지?
황태자의 ‘대단한 알파라 아무도 만날 수 없어.’ 병을 고칠 수 있는 다른 오메가일까.
하지만 시종은 분명히 그가 ‘베타’라고 했다.
나중에 누이한테 물어봐야겠다. 정말 이 세상에 황태자를 감당할 오메가가 나뿐인 거냐고.
“그래서요? 예언자에 대해 궁금해서 여기까지 달려온 겁니까?”
황태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냥 뭐 하나 궁금해서 들여다보러 왔어요.”
솔직한 심경을 밝히니 황태자가 놀란 듯 멈칫했다.
매번 신기할 정도로 사실만을 말해 주는 황태자에게 의뭉스럽게 굴고 싶은 마음은 이제 없었다.
나는 아니라고 해도, 여기 상식으로는 내가 황태자에게 연애 상대니까.
나 싫다는 사람 나도 싫고.
나 좋다는 사람은 나도 좋고.
원래 그런 거 아니냐고.
불꽃 튀고 꽃잎이 흩날리는 사랑의 징조는 없었지만 그럭저럭 마음 나눌 정도는 됐다 이거야.
“뭡니까, 그게.”
황태자는 약간 부끄러운 것처럼 코끝을 긁적였다.
아, 또 귀여워 보인다.
남성 호르몬, 아니 페로몬 과다인 황태자의 행동이 마냥 싫지만은 않아서 큰일이었다.
“매일 먼저 찾아와 주셨으니까요. 그리고 거사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색해지고 싶지 않아서요.”
나도 모르게 히죽 웃음이 나왔다.
“그건 그렇군요.”
황태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의외로 단순한 사람이다.
“안 그래도 내일이면 완성될 것 같아 찾아가려던 참이에요.”
뭘?
오색 빛깔, 영롱한 돌 조각들이 가득 찬 진열장 사이에서 황태자는 자색의 투명한 돌을 집어 내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옆자리에 착석한다.
“이게 뭔가요?”
“한번 보세요.”
때마침 쏟아져 들어온 태양 빛이 돌 조각을 통과하며 테이블에 길게 연보라색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예쁘네요.”
“예쁜 것보다 마법적 효과가 탁월한 녀석입니다.”
마정석이구나.
복잡한 문양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나는 이내 한글을 잡아냈다.
돌 조각을 들어 살피던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황태자는 “역시…….”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어디에 있어도, 누구와 있어도.
문장이라기에는 다소 모호하고 시적인 표현의 수식을 읽어 내리고 간지러운 팔뚝을 긁어내렸다.
“마정석인가요?”
고개를 끄덕인 황태자가 다시 돌 조각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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