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25화 (25/150)

25화

“칼은 평민들이 왜 마정석을 사용하기 어려운지 압니까?”

마정석을 가져가며 살짝 닿은 손가락 끝이 간질거려 한쪽 손으로 가리며 “아뇨.” 하고 대답했다.

“수식이 입력된 마정석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쓸 만합니다만. 순도 높은 은과 금. 크리스털 같은 다른 보석류와 함께 쓰는 게 훨씬 좋거든요.”

황태자는 제 허리춤에 달고 있는 작은 단도를 내밀었다.

“한번 들어 볼래요?”

황태자의 말에 덥석 칼을 쥐며 나는 감동하고 말았다.

단도를 보고 감동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내가 유약해도 타국의 왕자인데, 그 앞에서 칼을 내미는 대범함과 신뢰에 감동한 거다.

찡한 코끝을 만지며 그윽하게 황태자를 쳐다봐 주었다.

완전 자기 사람이다 이건가. 괜스레 뿌듯하고 든든한데.

“왕자가 단도를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군요. 다음에는 검을 선물하겠습니다. 아주 가벼운 걸로요.”

단도를 더듬으며 흐뭇해하는 나를 광적인 단도 애호가로 보는 시선이 날아왔다.

“그런 건 아니지만…….”

머쓱하다.

단도로 시선을 내렸다.

칼자루 끝에 붉은 마정석이 박혀 있다, 칼자루 자체는 철이지만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점이 놀라웠다.

어디 보자.

강인한 배려심

이건 제법 마법 아이템 이름 같고 좋네.

보니까 주절주절 말이 많은 수식은 고릿적의 방식이고 최근의 수식은 비교적 간단히 설정하는 모양이다.

“마정석 안쪽이 반투명하죠? 하단에 순금을 붙여 둬서 그렇습니다. 만약 이 칼 전체를 금으로 만들었다면 마법 효과는 세, 네 배까지 풀쩍 뛰겠습니다만, 사용하기도 전에 분실되거나 휘어지겠죠.”

“그쯤 되면 마정석 가격보다 금값이 더 나오겠는데요.”

내 말에 황태자가 그게 정답이라고 했다.

“그래서 제국에서 고안하는 방법은 마정석의 마법 효과를 아주 적정한 선까지 증폭시키는 광물을 마도구 일부에 붙이는 겁니다. 평민들에게 판매되는 마도구는 흔한 광물을 이용해서 시세를 더 낮춰 공급하고요.”

아, 그렇구나.

린드버그에서 사용되는 마정석은 모양이 어땠더라.

마도구의 형태보단 마정석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까 그건 무슨 효과가 있어요?”

황태자에게 단도를 돌려주며 아까 그 자주색 마정석에 대해 물었다.

“왕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제가 나타나는 효과요.”

“예에?”

그게 뭐냐, 램프의 요정. 아니 마정석의 요정 아드리안 헤네켄인가.

문지르면 갑자기 뿅 튀어나오나?

“사용법은요?”

문지르기인가. 기대에 찬 내 눈빛을 뭐라 해석한 건지 황태자는 씨익 웃어 보였다.

“왕자가 일정 수준 이상의 이상 신체 반응을 호소하면 알아서 제가 알 수 있도록 해 놨습니다.”

안 그래도 혈혈단신으로 린드버그로 넘어가는 게 불안했는데.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저도 배우면 할 수 있습니까?”

수식이 기본적으로 한글인데다 새기기만 하면 되는 작업이니 프로세스만 알면 나도 편한 것 몇 개 만들어서 들고 다니고 싶다.

황태자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배우고 싶어요?”

“네!”

“린드버그에서 무사히 돌아오면, 수식 보는 법부터 알려 주겠습니다. 아주 노련한 마법사들도 수식 보는 법을 몰라 마정석 가공을 꺼려 하니까요.”

“마력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마력의, 마 자도 느껴 본 적 없는 내가 걱정하니 황태자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왕자가 마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가까이 다가온 황태자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건 정말 달갑지 않았다.

잠깐 스친 것만으로도 찌릿하던 손이, 아예 잡히자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며 온 신경이 거기에 쏠렸다.

내 몸 이래도 되냐?

그것보다 황태자여, 사귀지도 않는 사이에 이렇게 손을 덥석 잡아도 되는 거냐고!

“왜 마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형질자라면 누구든 마력을 보유하고 있는 게 상식인데.”

아, 맞다.

나는 오메가고 또 마법사였다.

황태자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하, 한 번도 써 본 일이 없어서요. 우연으로도 마법이 나온 적이 없어서.”

붙잡힌 손에서 땀이 나고 열도 나는 것 같고 그 위를 덮고 있는 황태자 손등의 불거진 핏줄도 좀 부럽고 해서 자꾸만 떨어지던 시선이 다음 말에 퍼뜩 황태자와 마주쳤다.

“정제되지 않은 마정석이 그냥 쓸모없는 돌에 불과하듯 마력도 갈고닦아야 눈에 보이는 마법으로 나타나죠. 왕자는 지금까지 마법을 배운 적이 없을 뿐입니다. 발현이 늦은 것도 그래서인 것 같아요.”

아, 그래서.

황태자가 은근히 손등을 문질렀다.

등골이 오싹하고 하체로 피가 몰릴 것만 같아 무릎을 모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황태자가 내 몸을 덮을 것처럼 가까이 당겼다.

황태자가 가까워질 때마다 폴폴 좋은 향기가 나는 것도 모자라서, 그의 홍채의 색이 다채롭게 변한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페로몬 효과와 마력 감응은 결이 비슷해요. 혼자 버티는 것보다 누가 도와주면 금방 터득한다는 점이 그래요. 타고난 기질이 좋으면 더 폭발적으로 성장하죠.”

칼은 기질이 좋으니까 조금만 자극해도 폭발하듯 터질 거라고 장담한다.

귓가에 입술을 바짝 대고.

내가 고개를 조금만 움직이면 닿을 것 같은데.

“안팎, 양쪽 다 해당되는 말이에요. 그리고 그걸 할 수 있는 건 아마도 나뿐이죠.”

귓가에 속삭이는 황태자는 그, 이렇게 표현하면 정말 그렇지만 악마 같았다.

목덜미에 코끝을 가져다 대고 흐읍, 숨을 들이켠 황태자의 고막을 울리는 목소리는 다분히 유혹적이어서 어깨가 자꾸만 솟았다.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이고, 양쪽이 다 뭐냐.

변태 같은 이 행동도 잘생긴 놈이 하니 그냥 악마의 유혹이다.

아니, 이 별것 아닌 행위에 제멋대로 전율하는 내 몸이 문제다.

아직 황태자에게 결혼하겠다는 확답을 준 것도 아니고 우정과 신뢰 외의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도 아닌데, 이런 애매한 상태로 그저 몸이 원하는 대로 닿아 버려도 괜찮은 걸까.

황태자가 나를 보는 시선에 정염과 열정이 들어 있는 건 분명하고, 때로 첫사랑처럼 풋풋하지만.

그게 칼 린드버그의 껍데기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그 속에 들어 있는 나도 포함인지 궁금했다.

귓가에 계속 무언가를 속삭이는 음성이 모든 걸 내려놓고 순응하라는 것만 같았다.

안 돼, 쫓아가지 마.

결국 양 무릎을 비비며 어쩔 줄 몰라 하다 벌떡 일어나 황태자의 옆에서 벗어났다.

더 붙어 있다간 입술이라도 문지를 것만 같았다.

그럼 진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다.

아쉬운 듯 빈손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황태자가 또 입술을 비죽였다.

그런 것 좀 하지 말라니까!

노련하거나 어수룩하거나 어른스럽거나 애 같거나. 하여간 하나만 하라고.

“벌써 가려고요?”

“에, 엘리자벳 간식 시간이에요. 잘 지내고 있는 것 봤으니 돌아가 보겠습니다.”

“……개 간식을 왜 왕자가 직접 챙겨요?”

얼토당토아니한 내 변명에 어이가 없다는 듯 황태자가 물었다.

“걔가 좀 까다로워서…….”

“안 그래 보이던데…….”

황태자는 미간을 좁혔다.

제대로 봤다.

걔는 아무한테나 가서 꼬리를 흔들고 반긴다.

그런 성품이니까 과거의 개떡 같은 칼 린드버그도 좋다고 따랐지.

마르코랑 똑같다.

“어쨌든, 그래서 이만 돌아가 볼게요. 또 봅시다.”

“잠깐만요.”

“예?”

사람을 불러 세워 놓고 가만히 서 있던 황태자는 “우리 이제 서로 편하게 지내면 어때요?” 하고 물었다.

“어떤 게 편한 건데요?”

의아해서 물었다.

“쓸데없는 격식 차리지 말고, 왕자가 일전에 말했던 것처럼 친구처럼 지내요.”

그러면서 자긴 이제 나를 ‘칼’이라 부를 테니 본인도 ‘아드리안’으로 칭해 달라고 말했다.

더불어서 공적인 자리가 아니면 존대도 관두자고 했다.

거절할 이유도 없어 그러마 했더니 황태자는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 황태자도 많이 외로웠구나.

형체 없던 그의 외로움이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기분이다.

나는 나가려고 문을 열다 말고 황태자에게 확답을 받았다.

“나, 마정석 가공 기술 가르쳐 주는 거 꼭 약속해요. 아니. 부탁해.”

“얼마든지.”

확실히 말을 놓으니 좀 더 거리가 좁혀지는 기분이 들었다.

난 희희낙락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기술은 버릴 게 없지, 거기다 그게 어렵고 희소성이 높을수록 가치는 올라간다.

별다른 재주가 없는 게 천추의 한이어서 그런가 이제야 시야가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황태자에게 진짜 상대가 생기면, 어쩌면 나는 성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나는 듯 가벼웠던 발걸음이 부지불식간에 느려졌다.

아까부터 가슴 언저리가 답답했다.

* * *

왕자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벨프리가 황태자의 방문을 두들겼다.

아드리안은 잔잔히 떠다니는 왕자의 페로몬을 음미하고 있었다.

이렇게 흘리면서, 까닥하면 히트가 올지도 모를 사람을 린드버그로 보내는 게 달갑지 않은데 본인은 그런 것도 모르고 칠렐레팔렐레 다닌다.

지금까지 만나 본 오메가라고 해 봐야 어머니, 그리고 헨드릭 공작 등 이미 짝이 있는 사람들 뿐이어서 아드리안에게도 칼은 첫 오메가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칼 린드버그에겐 아드리안 헤네켄이 처음 만나는 제대로 된 알파였다.

그러나 그를 볼 때마다 흥분하는 자신이 초라할 정도로 칼은 무덤덤했다.

움찔거리며 피하려 하는 건 생존본능 같은 것이다.

언제건 목뒤를 물어뜯기고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 칼 린드버그 정도면 침착한 것이라고 헨드릭 공작은 말했었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그가 불나방처럼 돌진하길 바란 건 아니지만.

아니, 지금은 불나방처럼 돌진해 주길 바라고 있다.

벨프리는 왕자가 수상하다고 몇 번이고 말하는 것이 귀에 안 들어오는 것도 그 때문일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