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제 말 듣고 계세요?”
벨프리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아드리안이 심드렁히 대답했다.
“마법진을 ‘문’이라고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네. 왕자님은 수식을 읽을 줄 아는 게 분명합니다.”
“대강 예상했던 일이야.”
수식은 다른 이들에게는 기하학의 도형일 뿐이었다.
그게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표음 문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읽고 쓸 줄 안다 해도 한 눈에 의미까지 알아맞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수식과 함께 살았던 황태자도 최근에서야 의미를 부여하여 수식을 만드는 것을 배웠는데.
칼 린드버그는 어디서 그걸 배웠을까.
너무 욕심나잖아.
어디선가 나비가 날아들었다.
하얀 날개를 파득거리며 향기의 진원을 찾으려 애를 쓰는 나비가 귀여워 아드리안이 키득키득 웃었다.
나폴나폴 날던 나비는 왕자가 머물렀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곧 혼비백산하며 도망친다.
그럴 리 없겠지만 칼의 체취가 흐려지는 것만 같아 아드리안이 페로몬을 살짝 흘렸기 때문이다.
사실 페로몬에 민감한 건 인간보다 짐승이 한 수 위였다.
암수 불문 무리의 가장 강한 개체를 알파라 부르는 것도 인간보다 짐승이 먼저였다.
오메가가 유혹하면 알파는 지배한다.
그런 면에서 칼 린드버그는 독특했다.
지배하고 지배당하고, 그 어느 쪽에도 자신은 속해 있지 않다는 듯 달관한 눈빛이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
킁킁, 코를 찡긋거리며 눈을 휘둥그레 뜨고 볼을 발긋 물들이며 다리를 오므리면서도 압도당하는 기색이 전혀 없으니까.
“아드리안 전하.”
단단히 토라진 벨프리의 음성이 아드리안의 상념을 갈랐다.
“아아, 듣고 있어.”
“다음에 칼 린드버그 왕자님을 만나면 제대로 추궁을 해 보시란 말입니다.”
“추궁하면, 말해 줄까?”
아드리안은 왕자가 수식을 읽든 보든 상관은 없지만 그걸 왜 기를 쓰고 숨기려고 하는지는 좀 궁금했다.
건성으로 대답하는 아드리안의 태도에 벨프리의 입술이 대번 쭉 튀어나왔다.
“대답을 안 한다고 그렇구나, 하면 그게 추궁입니까? 그냥 질문이지.”
아드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칼이 수식을 읽는다 하더라도 마정석에 새기고 정제하는 작업에 대해선 문외한이 맞다.
그가 린드버그에 가서 고초를 당하지 않게.
쉽고 빠르게 일을 끝내고 그의 곁으로 돌아오도록 손을 써야 했다.
마정석의 장식은 은으로 하는 게 좋겠다.
보니까 단정한 옷차림을 좋아하던데 액세서리도 덜 화려한 것을 좋아할까?
자수정과 닮은 마정석에 은을 여러 겹 꼬아 단단하게 만들어 허리춤에 달 수 있게 해야겠다.
무게는 최소화해서 그가 그것을 달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계속 간직하도록.
걱정 반, 욕심 반으로 제작한 마도구가 사실 족쇄나 다름없다는 걸 그가 알아채지 못했으면 좋겠다.
황태자가 책상에 앉아 돋보기와 각종 도구를 늘어놓는데도 벨프리는 굴하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거기다 언제 응급처치 따위를 배웠답니까? 그것 말고도 재주가 아주 많으시던데요. 사용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랍니다.”
잡다한 재주를 어디서 배웠는지도 궁금하지만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배웠는지도 궁금했다.
“솔직히 저는 지금 왕자님 몸 안에 다른 영혼이 들어갔다 해도 믿겠습니다.”
마법도 과학이라 믿는 대쪽 같은 남자 벨프리 헨드릭. 그의 안에서 칼 린드버그 왕자는 점점 미지의 생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 다른 영혼. 그거 일리 있네.”
그렇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이야.
벨프리가 열을 내거나 말거나 온통 마도구에 정신이 팔린 아드리안이 종이를 펼쳐 무언가를 그리며 대꾸했다.
“칼이 숨기고 싶어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지만, 스스로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려 보지 뭐.”
이런 팔푼이를 보았나.
“벌써부터 이렇게 물러서야, 결혼하면 아주 쓸개도 빼 주시겠어요.”
결혼, 상상만 해도 좋다.
아버지인 글렌 황제는 어머니인 테레자 황후에게 백날 천 날 져 주지만 그는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물론 그가 절대 양보하지 못하는 몇 가지가 있긴 했지만. 예를 들면 테레자의 곁에 그보다 가까운 것 같은 사람이 있다거나 그녀의 건강을 해치는 어떤 습관 같은 것들.
“정작 왕자님은 준다 만다 말도 없는데 혼자 들떠서는, 불공평하지 않냐고요.”
연신 혀를 차 대는 목소리가 한껏 차가워지자 그제서야 아드리안은 눈을 들어 그의 젖형제를 보았다.
대대로 황실이 종교라면 열혈 신자를 자처할 헨드릭 가문의 막내아들이다.
태도야 어찌 됐든 그가 자신과 이 제국을 걱정하는 것은 분명했다.
“이봐, 걱정도 지나치면 독이야. 그가 나보다 마력이 세지고 힘이 세진들, 이 헤네켄이 꿈적이나 하겠냐고. 일단 지켜봐도 될 수준이잖나.”
정원의 풀을 좀 잘 다듬고, 응급처치를 할 수 있다는 게 제국을 쥐락펴락할 정도의 재주는 아니라고 덧붙이며 아드리안은 다시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결국 별 소득 없이 자리를 떠나며 벨프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분이 하필 우성 오메가라서 당신을 쥐락펴락하게 생겼으니, 그게 큰일이라고.
* * *
린드버그에서 지원을 요청한 날로부터 딱 열흘째 되는 날이 바로 내일로 성큼 다가왔다.
온갖 생각이 휘몰아쳐 심란한 마음을 달래며 계란을 탁 깨,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시켰다.
“왕자님께서는 참 대단하십니다.”
조리장이 박수를 짝짝 쳤다.
박수받을 일은 아닌지라 민망해서 손사래를 쳤다.
“이 정도는 제빵의 기본이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깔끔하게 분리하는 건 매일 요리를 하는 사람들이나 가능한 겁니다. 주방에 들어갈 일도 없으신 왕자님이 어쩜 이렇게 깔끔하게 분리시키는지. 허허허.”
왕자가 아니었다면 당장 사수를 자청했을 거라며 늘어지게 칭찬을 했다.
아까부터 하나 할 때마다 칭찬이 한 바가지 따라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은 건 빈말이 아니라는 듯 진심이 듬뿍 담긴 저 표정 때문이다.
만면이 웃는 상이라 그런지 그의 뱃살이 인덕으로 보일 정도였다.
“버터는 녹여서 넣습니까? 아니면 그냥 넣고 뭉개나요?”
“반은 녹여서 넣고 반은 일단 두세요. 이따 겹겹이 버터의 층을 쌓을 거니까요.”
그래야 딱 구웠을 때 결이 산다며 조리장이 시범을 보였다.
밀가루를 체에 탁탁 치고 휘휘 젓는 내 모습을 유심히 살핀 그가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다.
빵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말할 수 없어 가끔 주방에 간식을 만들러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타인의 몸을 훔친 신세라 지속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게 마음은 안 좋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리장의 표정은 의아함을 가득 담고 있었다.
본인이 알기로 린드버그 성의 조리장은 제빵 실력만큼은 최악이란다.
그건 정답이었다.
다른 건 다 맛있어도 이상하게 빵만큼은 별로였으니까.
달콤하고 부드러운 디저트도 없었다.
“아무래도 재료 수급이 어렵다 보니 그럴지도요. 부드러운 식감과 고소하고 단맛을 내려면 손이 많이 가는 재료가 필요하니까요.”
조리장의 말에 반쯤 동의했다.
나머지 반은 조금 틀렸다.
고급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긁어모으는 린드버그의 왕성에 재료가 없을 리 만무했지만, 문제는 조리장의 출신에 있었다.
손에 물을 묻히면 죽는 줄 아는 귀족들이 요리처럼 번거로운 일을 직업으로 삼지 않으니 자연스레 평민 조리장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재주가 많은 요리사도 자기가 한 번도 먹지 않은 음식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일 테지.
갑자기 식사량이 늘자, 마르코가 식사를 챙길 때마다 훔쳐먹는 건 아닐까 의심하며 따귀를 때렸다던 조리장이 떠올랐다.
그땐 그게 퍽 이상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도 그냥 피해자였다.
창고에 음식물이 썩어 나가도 평민들에게는 쌀 한 톨도 돌아가지 않는 주방에서 고기 한 점만 사라져도 매질을 당해야 했으니까.
나 같으면 벌써 요리에 독을 탔을 텐데.
어떻게 보면 그도 참 대단한 인재였다.
“지금 린드버그는 밀가루와 버터값이 아주 비싸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과나 제빵을 하는 사람이 손에 꼽는다 하고요.”
조리장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대량의 밀을 정제하려면 시설이 필요한데, 평민들은 그 시설을 갖출 공간과 기술이 부족해서요.”
“저런…….”
“버터도 마찬가지예요, 버터를 만들려면 소를 키워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자리 차지를 덜 하면서 번식 능력이 좋은 염소를 많이 키우거든요. 근데 아시다시피 염소의 젖은 버터나 크림을 만들기엔 적당치 못해서요.”
그리고 대부분 그런 가공품을 생산하기 전에 다 잡아먹어 버리고.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쓴웃음을 짓는 내게 조리장이 어깨를 두드려 보았다.
“왕자님은 박학하시군요.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런 왕자님께서 노력하고 계시니 린드버그의 사람들도 곧 편해지겠지요.”
두툼한 손바닥으로 도닥도닥 어깨를 두드리는 행동에 아주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얼굴은 가물가물해도 새벽에 일을 나서기 전 늘 이렇게 토닥여 주곤 하셨으니까.
“그랬으면 좋겠네요.”
스스로 들어도 쓸쓸한 대사에 조리장이 자신의 반죽을 내게 내밀고 내가 섞고 있던 반죽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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