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생각이 많을 때는 그저 반죽을 주무르는 게 좋습니다.”
봉긋하게 솟은 반죽에 손을 넣으며 라텍스 글러브를 그리워하는데 조리장이 좀 더 팍팍 치대라고 했다.
“왕자님께서 이렇게 헤네켄에 와 계시니 벌써 린드버그가 완전한 자유를 찾은 것만 같습니다 그려. 어머님께 왕자님이 여기 계신다고 하니 아주 기뻐하시더군요.”
“네?”
흐뭇하게 웃는 조리장에게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모르셨습니까? 저희 부모님은 린드버그 출신입니다.”
“어? 진짜요?”
그의 부모님이 국경을 넘을 때 조리장은 어머니의 배 속에 있었다고 했다.
“말은 이렇게 해도 헤네켄에서 나고 자랐으니 린드버그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관심은 많이 가지고 있지요.”
반죽을 퍽퍽 치대고 다시 발효를 시킨다고 천으로 감싸는 조리장을 흉내 냈다.
“저어, 혹시 부모님이 린드버그를 그리워하시진 않나요? 비록 그런 모양이긴 해도 고향이니 말입니다.”
“그럼요, 매일 그리워하십니다. 제게는 헤네켄이 고국이지만 부모님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지금은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셨습니다.”
조리장이 구석에서 작은 의자를 꺼내 와 앉으라고 권했다.
“어머님은 그러셨어요. 린드버그는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사는 곳이라고. 모든 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면 어떻게 살아지긴 했답니다.”
자신은 경험하진 못했지만 부모님은 꽤 고생하셨다고, 어찌나 끔찍하던지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고 했다.
“그런데 죽고자 하며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결국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으셨죠.”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조리장에겐 미안했지만 좀 더 캐묻고 싶었다.
린드버그의 역사서에는 없는, 날것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언제부터 린드버그가 저리됐답니까?”
차가운 물을 들이켜며 조리장이 곰곰이 무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답을 내주었다.
“급속도로 쇠약해진 건, 역시 마법사들이 구멍 난 독처럼 빠져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저희 할머니 세대였대요. 흔히 알파와 오메가는 마력을 지녔다 하죠. 그들의 개체 수를 유지하기 위해서 당시의 왕이 심한 짓을 했다더군요.”
나는 의자를 바짝 붙이고 어떤 짓이었냐고 물었다.
“본래 알파와 오메가는 각인을 하면 평생 서로의 페로몬에만 반응하니까요. 그렇게 되면 형질자의 출산율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베타와 형질자가 만나면 또 출산율이 떨어지고요.”
간절한 내 눈빛 때문인지 조리장은 주저주저하면서도 열심히 설명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억지로 출산율을 늘릴 순 없잖아요?”
조리장이 눈치를 보며 ‘상당히 껄끄러운 이야기’라 듣고 귀를 씻어 달라 부탁했다.
“그것이, 알파의 송곳니를 갈고, 오메가에겐, 그. 목줄을 채웠답니다.”
목줄을 왜 채워?
“가둬 둔다는 의미인가요?”
조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의적인 의미입니다. 오메가의 목뒤를 물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구속까지 한다는 뜻이었죠.”
“설마, 그런.”
뻐근해지는 목 뒤쪽을 주물렀다.
“린드버그도 일부일처가 기본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례적으로 알파에게만 여러 오메가를 거느릴 권한을 줬습니다.”
끔찍한 소리다.
가축도 그렇게 다루면 안 되는 건데.
인상이 찌푸려지고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치밀어 올랐다.
생각해 보니 린드버그의 귀족들은 첩을 셋, 넷 끼고 있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린드버그의 지금 왕이 왕비 하나만 두고 있는 게 이상해 보일 지경이었다.
“왕자님이 듣기에는 더 거북하실 겁니다. 스무 명이 넘는 오메가를 거느린 알파도 있었다 하고요. 형질자 자녀를 낳으면 포상금을 줬다 하니 그때 이른바 오메가 사냥이 자행되곤 했습니다.”
이런 미친놈들아!
“예전에는 평민 중에서도 형질자가 제법 있었다는데, 지금 많이 부족해진 이유가 그 때문일 거라고 저희끼리는 이야기합니다.”
다른 노력을 더 열심히 하지 그랬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사람을 거래하고, 자유를 빼앗나.
분노 때문에 몸이 떨렸다.
은근히 눈치를 보는 조리장은 화를 내면 입을 다물어 버릴 것 같아서 간신히 참았다.
“듣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군요.”
휴, 하고 조리장의 한숨을 쉬었다.
그 시기에 대부분의 형질자들이, 특히 오메가들이 린드버그를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했다고 했다.
“그리고 린드버그의 열성 알파들에게 잡힐까 두려워 우후죽순 짝을 맺었답니다.”
과연, 그래서 짝 없는 오메가가 드문 건가.
그럼 대륙을 넘어가면 어떨까.
아드리안의 짝은 그곳에 있을지도.
“그, 왕자님도 아시다시피 우성에 가까울수록 한 사람의 반려를 깊이 원한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아요. 그때 법에 반발해서 망명을 떠난 알파들은 거의 우성이었거든요.”
그런 면에서 아드리안 전하께서는 왕자님과 좋은 짝이 되실 거라고 강조했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지나쳐 고생하셨죠. 때맞춰 린드버그의 폭동이 일어나 왕자님이 이쪽으로 온 것은 운명임에 분명합니다.”
여기도 아드리안 열성 팬이 있구나.
그러면서 자기가 별소리를 다 한다고 우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리장은 참 아는 것이 많으시군요.”
“뭘요, 역사를 배우는 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입니다.”
조리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겉이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빵을 먹을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입맛이 죄 달아나 버렸다.
린드버그의 형질자 보존 계획은 분명히 망했다.
그리고, 헤네켄도 마찬가지로 형질자가 줄어들고 있다.
왜지?
* * *
“레아 누님!”
내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아니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갓 구운 빵을 품에 안고 회랑을 달릴 때 사용인들이 뒤에서 수군거렸지만 그까짓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문을 발칵 열고 들어서자 검을 닦던 레아가 귀를 후볐다.
“귀청 떨어지겠다.”
창가에 앉아 한쪽 발을 창틀에 올린 불량한 자세로 보석 매만지듯 검을 다루는 게 무섭도록 잘 어울렸다.
확실히, 치마 입고 마네킹처럼 서 있던 때와 차원이 다른 멋짐이었다.
레아가 등장하면 꺅꺅 신이 난 시녀들이 이해가 갔다.
“그, 전에 오메가가 부족하다 하셨는데 그거 왜 그런가요? 황태자는 자기가 오메가를 거의 죽일 뻔했다고 하던데.”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레아가 ‘아, 얘 기억상실증이었지.’ 하는 표정으로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애초에 같은 형질자여도 급이 달라서 그래. 열성이 우성을 아예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우성 오메가가 열성 알파를 만나면 히트 사이클이 잘 안 다스려지고, 우성 알파가 열성 오메가를 만나면 페로몬을 조절해야만 하니까.”
레아의 시녀가 그녀에게서 검집을 받아 들고 총총걸음으로 장식장 너머로 사라졌다.
“예전엔 그랬어. 알파는 오메가만 만나야 하고 오메가는 알파만이 짝이었지. 우성과 열성도 마찬가지지. 그렇지 않으면 서로 고통스러우니까. 그런데 요즘은 달라. 괜찮은 마정석을 구할 수 있다면 발정기쯤이야 버텨 낼 수 있거든.”
그녀는 제 책상에서 비단 주머니를 집어 들더니 작은 구슬을 꺼냈다.
그녀가 던져 준 구슬을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방심 금물, 억제 효과는 빠르게
“억제제야.”
“뭘 억제하는데요?”
칼 린드버그, 너 진짜 어떡하니.
레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성, 적, 충, 동.”이라 대답했다.
내 얼굴이 벌게진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마정석을 돌려주며 괜히 바지에 손을 닦았다.
“오메가용도 있으니 필요하면 황태자에게 말하렴.”
그가 네게 억제제를 쥐여 줄지 자기 자신을 쥐여 줄지는 의문이지만.
레아는 손에 턱을 괴고 푸흐, 하고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창에 비친 내 얼굴이 불타는 감이 됐다.
“열이 팔팔 끓고 눈앞에 있는 걸 죄 먹어 치우고 싶으면서, 완전히 소유하고 싶은 충동이 줄어들지. 그렇다고 아주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도 속은 답답한 듯 연초를 꺼내 물다가 날 보곤 다시 집어넣었다.
“좋은 상대를 만나서 러트도, 히트 사이클도 함께 보내면 더없이 좋겠지. 그 후에 가정도 꾸리고 말이야. 그런데 인간 사는 모양이라는 게 그렇잖아. 갑자기 베타를 사랑하게 되고, 우성이 열성을 사랑하게 되고.”
아니면, 누구와도 맺어지지 못하는 상태로 그 모든 충동을 홀로 견뎌야만 하든가.
그녀가 삼킨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만 같았다.
“순리를 거스른다는 게 늘 고통을 동반한다고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은 그것을 배신하며 살잖니. 그게 최근 범인류적으로 형질자가 부족해지는 이유야.”
그렇구나.
대충 이해는 간다.
오메가와 알파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오메가나 알파일 확률도 높아지지만, 오메가와 베타, 베타와 알파 사이에서 나오는 아이들은 비형질에 가까울 테니까.
누가 그걸 탓하겠어.
헤네켄이 자유연애를 방조하는 게 결론적으로 형질자 인구의 감소를 가져온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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