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여기 조리장에게 들었습니다, 린드버그가 형질자를 보존하려고 몹쓸 짓을 많이 했다던데, 어째서 지금 린드버그에는 형질자가 부족한 겁니까?”
오메가 사냥을 말하는 거구나, 하며 레아는 피식, 웃었다.
“그건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받은 저주야.”
“진짜 저주요?”
“그래. 너는 그 알파들이 데리고 온 오메가가 전부 오메가라고 어떻게 확신하니? 열성 알파는 우성 오메가에게 힘도 못 쓰고 벌벌 기는 처지인데.”
그녀의 눈이 명백한 노기를 띠었다.
늘 그녀와 닮았다고 생각한 레몬 사탕 같은 향기가, 페로몬이 분노를 가득 담고 터져 나왔다.
“솔기가 다 터진 포대에 밀가루를 담으려다 죄 쏟아 버린 꼴이지. 우성 형질자가 다 빠져나간 자리에 남은 쭉정이 알파들은 오메가를 다루기가 어렵다는 걸 깨달은 거야. 오메가나 알파나 비등한 마력이 있으니.”
목줄을 채운들 오메가를 함부로 다룰 순 없었다며 그게 제 발등을 찍은 거라고 레아는 말했다.
“그럼 그들이 데리고 온 건.”
“대신 베타를 낚아 올렸지.”
더 별로다.
형질자의 수를 보존한다는 건 핑계에 불과하고 그저 자신들의 탐욕을 채웠을 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평민의 대부분은 베타야. 얼마나 쉬웠겠니.”
“하지만 형질자를 낳으면 포상금을 줄 정도였다는데요? 하나도 못 낳으면 나라에서 뭐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
레아는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냐고.
“열성 형질과 베타가 결합하면 수십 중에 하나꼴로 형질자는 생겨. 그걸 핑계 삼아 줄줄이 애를 낳는 거야.”
정말 듣기 거북한 이야기다.
린드버그는 어디까지 막 나가려 했던 걸까.
“형질자가 아닌 자식은 쉽게 버리는 패가 되고.”
그녀는 시녀인 제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제니스와 눈이 마주치자 제니스는 급하게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남은 건 쓰레기뿐이지.”
레아가 히죽 웃었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웃었다.
마치 린드버그의 권력자들의 말로가 기대된다는 듯.
그러고 보니.
“제가 오메가라는 것을 몰랐을 때, 귀족들에게서 어떤 향기도 맡지 못한 건 혹시 그래서입니까?”
아드리안의 페로몬은 바로 맡아졌는데. 맡다뿐이냐 몸도 흐물흐물했었지.
가끔이지만 레아의 페로몬도 느꼈었다.
“열성은 페로몬 감지에 둔해져, 지금 린드버그 왕실엔 누가 오메가고 누가 알파인지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더는 남지 않았어.”
그게 저주가 아니면 뭐겠냐고 레아가 진심으로 즐겁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그건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럼 저는요? 저는 아직 그 히트라는 걸 겪지도 않았는데 혹시 오메가가 아닌 것 아닙니까? 제대로 감별할 사람도 없는데 누가 절 우성 오메가라고 말한 건가요?”
갑자기 손발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린드버그 왕실에서 나를 오메가라고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아드리안은 내가 자신의 페로몬에 주눅 들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 표현했지만 사실 그건 별 능력이 없는 베타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자꾸 아드리안에게 육체적으로 끌림을 느끼는 건 내가 오메가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아드리안이 내게 호감을 느끼는 건 내가 자신의 갈증을 채우고, 후계자를 낳아 줄 우성 오메가이기 때문인 건데. 모든 게 린드버그 왕국의 살찐 거짓말이라면.
주인공이라 생각했던 레아는 내 헛다리였고.
나는 가짜 오메가 노릇을 해 헤네켄을 어지럽힌 죄로 린드버그와 레아를 구하지도 못한 채 처음으로 되돌아갈지도 몰랐다.
운이 좋아 린드버그를 구하는 것까지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아드리안의 얼굴은 실망으로 일그러지겠지.
순간,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내게 아드리안의 아이를 낳는 것보다 더 큰 수모는 그것이었다.
사심이 있을지언정 호의로 발 벗고 나선 사람에게 베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차가운 손끝을 주무르며 레아의 답을 기다리는데, 그녀는 말 대신 손바닥으로 내 어깨를 때렸다.
아주 매서운 손길이었다.
* * *
레아 린드버그는 기가 차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제니스, 저 넘치는 상상력은 칼에겐 독이나 마찬가지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녀의 시녀가 테이블 위에서 재게 손을 놀렸다.
동감합니다.
“누가 봐도 ‘나 오메가요’ 하는 냄새를 풀풀 풍기고 다니면서 자기가 진짜 오메가가 맞냐니. 어이가 없어서, 원.”
연신 부채질을 하던 레아가 축 처져 발발거리던 아까 그 꼴을 생각하니 다시 분통이 터진다는 듯 말했다.
〈누구나 다 알게 페로몬을 흘려 대면서, 네가 오메가가 아니면 뭔데!〉
……하고 소리를 빽 질러 버렸다.
손을 올린 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녀석은 순순히 맞으며 토끼 눈을 했다.
무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누님이 그렇다면 맞는 거겠죠.’ 하고 더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는 돌아갔다.
“늦되다 늦되다 했더니, 기억을 잃고 터무니없이 순진해진 것 같은 건 나의 느낌일 뿐인가? 파득거리며 아무나 쪼고 다닐 때보다야 좋긴 하다만.”
레아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시녀는 그녀가 분통을 터뜨리는 걸 새삼스레 훑어보곤 다시 펜을 들었다.
왕자님께서 형질에 관한 것 전부를 잊어버리신 데다, 신체적으로 특별히 베타와 다른 점을 못 느껴서 더 그러신 듯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 페로몬을 누가 갈무리해 줬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동생 잘못 둔 죄로 하다 하다 별 뒤치다꺼리까지 다 한다니까.”
씩씩거리던 레아는 제 골이 당기는 느낌에 소파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녀의 동생은 금방이라도 만개할 꽃봉오리 상태였다.
황태자가 자꾸 자극하는데 본인은 자각이 없어 조심하는 척도 안 하니까.
린드버그에서는 이렇게까지 향기가 진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더라.
낙마 후였나. 하여간 그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페로몬을 흘리더니, 헤네켄에 오고 나서는 아주 본격적이라 레아가 매일 찾아가 페로몬을 갈무리해 주는 중이었다.
아드리안 헤네켄은 레아에게 고마워서 절을 해도 모자라지.
언젠가 진짜 가족이 되면 이 빚은 톡톡히 받겠다고 이를 갈았다.
“가끔 거꾸로 들고 탈탈 털면서 속에 있는 이야길 다 뱉으라고 하고 싶어.”
가슴을 치던 레아를 그녀의 시녀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주 어릴 때도 많은 걸 홀로 조용히 버텨 왔던 그녀였기에 제니스는 지금의 레아가 퍽 마음에 들었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레아의 시련을 지켜본 터라 칼 린드버그를 포함한 린드버그 왕실 전부를 증오하고 있던 제니스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칼 린드버그에 대한 앙금은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난 정말 걱정이야, 안 그래도 자기 처지를 자꾸 망각하는 녀석인데. 린드버그에서 히트라도 터지면 어쩌지?”
그게 레아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린드버그 왕국의 소식은 헤네켄의 정보통을 통해 한차례 걸러 레아와 칼에게 들어왔다.
열두 군데의 폭동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왕도까지 번지려는 이 시점에 왕실이 너무 잠잠해 수상쩍다고 생각했다.
키치너의 사병들이 성안으로 들어간 이후엔 문을 단단히 닫아 잠그고 헤네켄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이제 와서 민심을 신경 쓴다?
용 콧구멍에 콩을 집어넣고 돌아왔다는 무용담만큼이나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이렇게 불안한 상황에서 곧 히트가 터질지도 모르는 칼을 린드버그에 보내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제니스는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주인의 괴로움을 덜고 싶다.
곰곰이 생각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칼 린드버그 왕자의 상태와 돌연변이 오메가인 저의 처지가 딱히 다르지 않다 느꼈다.
우성이지만 히트가 오지 않는 왕자와, 알파를 흥분시키지 않는 페로몬을 가진 자신.
감히 비교할 거리가 되지 않지만.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를 긁고 지나가고 레아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거사를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히트 사이클을 먼저 여기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적당한 때, 적당한 장소에서요.
탁, 하고 펜을 내려놓은 제니스가 싱긋 웃었다.
레아는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동생을 기어코 새끼 용의 품에 안착시켜야 하는 운명인가 보다.
* * *
기묘한 느낌이 드는 아침이었다.
당장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몸이 나른해서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어 오전 내내 방에서 뒹구는 중이었다.
“왕자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아침으로 가져온 오믈렛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누워 있으니 마르코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음, 괜찮아. 아픈 건 아닌데. 좀 기운이 없어.”
몸살인가 봐.
“최근 하는 게 많아서 고단하셨던 모양이에요. 혹시 몰라 요깃거리를 챙겼으니 여기 두고 나갈게요.”
“끄응.”
내도록 옆에 붙어 있던 엘리자벳을 마르코가 일어나라고 채근해서 데리고 나갔다.
간단히 집어 먹을 만한 샌드위치와 작은 스콘류가 식욕을 돋웠지만 손은 뻗지 않았다.
식욕은 있는데 움직일 수 없다.
어째 사타구니가 간지러운 것 같아 다리로 베개를 휘휘 감고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집중했다.
최근에 스트레스가 심하긴 했나 보다.
몸살이 다 걸리고 말야.
아니, 아프다기보다 게으른 것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약간 건조한 바람에 섞여 들어오는 들풀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것 같고.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데 성스러운 기분이 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이상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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