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둘이 나란히 앉아 가지고 울먹울먹 왕자를 부르는 꼴이 웃기고 짠해서 벨프리가 결국 말을 걸었다.
“저기, 그렇게 울 필요 없어. 아드리안 전하께서 너희 왕자님 안 잡아먹는다.”
마르코가 히끅, 히끅 딸꾹질을 하며 벨프리에게 매달리듯 하소연했다.
“그렇지만, 제가 듣기로는 엄청난 고통을 동반한대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괴로워해야 한다고. 우리 왕자님은 곱게 자라셔서 고통에 아주 민감하신데…….”
아이고.
레아가 이마를 짚고 벨프리는 허허 웃었다.
마르코도 히트나 러트에 대해서는 무지한 베타지만 헤네켄으로 와서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는 중이었다.
짝 있는 오메가들이 주기적으로 히트 사이클 때문에 일을 쉬었는데, 그때마다 세상 해쓱한 몰골로 나타나서 허리가 아프네, 배가 아프네 했던 게 마르코를 괴롭게 만들었다.
마르코의 기준에서 황태자 이외의 알파는 다 멸치였다.
그런 알파들이랑 히트 사이클을 보내도 그렇게 아프다는데.
“황태자 전하는 태산만큼 크시잖아요?”
우리 왕자님은 저렇게 여리고 작고.
눈이 그렁그렁해서 황태자 전하께서 이성을 잃고 우리 왕자님을 깔아뭉개면 어떡하냐고 묻는다.
“그 정도로 차이가 나진 않아.”
칼 왕자가 나이에 비해 말라서 체구가 더 작아 보이긴 해도 누른다고 납작해지는 그런 건 아니란 말이야.
“기사님이 불기둥으로 코를 쑤시는 느낌이라고, 엉엉.”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꺼이꺼이 우는 마르코를 뒤로한 채 벨프리가 레아에게 속삭였다.
“린드버그에서는 왜 성교육을 안 시키는 겁니까.”
“왕자 교육도 저 모양인데 하인들 성교육을 신경 쓰겠습니까?”
당당하게 말하긴 했지만 레아도 민망해서 얼굴을 붉혔다.
내용이 민망한 게 아니라, 성교육 하나도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나라의 공주라서 민망했던 거다.
“왕자님에게 히트 사이클이 올 때마다 저렇게 울면 어떡합니까?”
“그때 되면 저 아이도 성장하겠지요. 아직 소년 아닙니까.”
“소년은 그렇다 치고 저 개는 또 왜 저럽니까. 히트가 길어지면 일주일도 밥을 안 먹겠습니다.”
덩치가 크고 북슬북슬하며 늑대를 닮은 왕자의 개는 원래 참 살가운 개였다.
다만 왕자가 황태자와 칩거한 이틀 동안은 레아 외의 인간이 다가가면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굴었다.
“……저 아이도 성장하겠지요. 정 안 먹으면 아까처럼 억지로 먹이면 됩니다.”
“우리 아드리안 전하께서 벌써 적이 생기고 말았군요.”
한숨과도 같은 벨프리의 말에 레아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았다.
안팎으로 진동하던 두 사람의 페로몬이 점점 수그러드는 기세여서 내심 긴장하던 레아도 조금 안심했다.
“린드버그엔 우선 왕자님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출정을 며칠 미루겠다 말해 두었습니다만.”
벨프리가 말꼬리를 늘렸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반응이었다.
어떻게 아픈지 어디가 아픈지 묻지도 않고 최대한 빨리, 꼭 왕자가 함께 린드버그에 도착해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벨프리의 질문에 레아가 팔짱을 끼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키치너의 진짜 목적은, 칼을 자신의 짝으로 삼으려는 게 아닌지. 저는 의심하고 있어요.”
그 노인네가?
벨프리가 순간 욱, 하고 구역질을 할 뻔했다.
“줄곧 심증뿐이었지만요. 저를 변방으로 치워 버리고 적당한 때에 칼을 물어 버리려고 기회를 보는 것 같았거든요.”
칼이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왕은 점점 무언가에 중독되어 갔다.
햇볕에 녹아 버린 마시멜로 같은 꼴로 생각도 말도 느려지고, 사실상 정치에서는 아예 손을 떼었다고 봐야 했다.
“키치너는 왕이 되고 싶지만, 린드버그의 후손이 아니어서 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증오하죠. 그런데 만약 칼이 자신의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를 발판 삼아서 완전한 실세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게 말이 됩니까? 키치너는 베타잖아요? 베타가 남성형 오메가를 임신시킬 수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벨프리가 제 아비보다도 한참 나이가 많은 비열한 생김새의 남자를 떠올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레아가 후훗 웃었다.
“그대가 모르는 린드버그의 정보도 있다니 신기한 기분인걸요.”
예?
“키치너는 열성 알파예요.”
머릿속이 급격히 바빠진다. 린드버그의 재상이 열성 알파라고?
“키치너는 본부인 외에 처가 열이나 돼요. 근데 형질자 자녀는 하나도 얻지 못했어요.”
그러니 가장 가까운 우성 오메가이며 왕족이기까지 한 칼 린드버그를 얼마나 원하겠냐고 레아가 말했다.
“그걸 알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랄한 벨프리의 말에 유쾌해진 레아가 하하, 하고 소리 높여 웃었다.
자기 부모 일이고, 나라의 위기인데. 레아가 너무 담담해서 벨프리는 기분이 나빠졌다.
벨프리가 이상한 눈초리로 자신을 보는 걸 눈치챈 레아가 웃음기를 거뒀다.
“린드버그의 형질자는 전부 쇠퇴의 길을 걷고 있어요. 키치너뿐일까요? 아버지도 마찬가진데.”
“그분이 열성 알파인 건 저희도 알지만, 대신 왕비님께서…….”
어쩌다 오메가를 잘 만났을 뿐이라고.
왕비는 외국인이었다.
그녀를 어디서 어떻게 데리고 왔는지 몰라도 왕비가 처음 린드버그에 왔을 땐 완벽히 키치너 가의 신분으로 세탁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키치너 재상은 칼 린드버그의 외삼촌이기도 한 셈이다.
“어머니는 본래 생식 활동을 할 수 없는 몸이었다고 하더군요. 키치너는 린드버그의 대가 완전히 끊기길 바랐던 모양인데, 갑자기 우성 형질자가 둘이나 생길 줄 알았겠냐고요.”
“끔찍하군요.”
“어머니도 귀족으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어 키치너에게 잘 보이려 애썼고. 아버지는 점차 미쳐 가고 있었죠. 제가 알파로 태어났을 때 키치너는 절망했을 거예요. 오메가인 칼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키치너는 무슨 수를 써서도 저를 죽였을 거예요.”
린드버그 왕실의 어두운 면은 실컷 봐 왔다고 생각했는데 파면 팔수록 수렁처럼 어두워서, 벨프리는 린드버그 왕조만큼은 망하는 게 좋겠다던 칼 왕자의 말이 이해가 갔다.
“그렇다고 자기 아들보다 어린 왕자를 상대로 그런 불충한 마음을 품는다고요? 그거 인간 맞습니까?”
이제 타국의 재상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짜증이 솟을 정도라서 벨프리 입에서는 연신 육두문자가 흘렀다.
“재상이라고 해도 이미 실세나 마찬가진데 뭐 하러 왕까지 되려고 한답니까. 그게 뭐 좋다고요.”
머리만 아프고, 자긴 줘도 안 가질 거라며 툴툴거렸다.
레아는 불현듯 이 예쁘장한 청년이 오메가였다면 참 좋았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오메가가 아니어도 베타 청년은 남자라도 넘어뜨리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찹찹 입맛을 다신 공주가 저와 눈을 마주치며 빙긋 웃자 벨프리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주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그게 사실이라면 왕자님이 린드버그에 가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흠,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일단 본인이 강하게 원하고 있어서요.”
본인이 직접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두고두고 저 마음에 한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무엇보다 황태자가 왕자가 가는 걸 가만히 방관하는 걸 보면 아주 위험한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일단 나오면 갈 수 있는 상황인지 물어나 보죠.”
황태자랑 이렇고 저런 짓까지 한 마당에 괜히 위험부담을 안으면서까지 떨어져 있고 싶진 않을 테니까.
원래 첫사랑이란 맹목적인 법이다.
레아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상황을 보던 벨프리가 주먹으로 제 손바닥을 탁 내리쳤다.
“하긴, 아기라도 생겼으면 말은 타면 안 되니까요.”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머리에 물을 흠뻑 뒤집어쓴 황태자가 걸어 나왔다.
젖은 몸에 그대로 옷을 걸쳐 입은 황태자가 걸어 나오자 그 외설스러움에 벨프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걱정 마. 아기가 생기려면 멀었어.”
“왕자님께서 물잔이라도 던진 겁니까?”
벨프리가 묻자 황태자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얼마나 만족스러운 웃음이던지 불시에 레아의 뱃속이 뒤틀렸다.
“얼마나 끈질기게 구셨으면 왕자님이 물을 다 끼얹습니까?”
끈질긴 건 벨프리였다.
그러나 황태자는 “물그릇 들 힘도 없을 텐데. 무슨 소리야.” 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힘이 다 빠질 정도세요?”
이런 야만적인.
“아기 생길 만한 일은 없었어.”
그럼 이틀 동안 틀어박혀서 뭐 했는데?
하여간 형질자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며 벨프리가 짜증을 냈다.
셔츠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닦을 생각도 안 하고 털썩 주저앉아서 히죽히죽 웃는 꼴이 정말 보기 싫었다.
황태자는 마르코에게 “들어가 봐도 된다.”라고 말했고 이때다 싶어 마르코와 엘리자벳이 쏜살같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시립해서 동태를 살피던 시종도 쫓아 들어갔다.
마르코를 들여보낸 아드리안은 벨프리에게도 심부름을 시켰다.
“지금 당장 린드버그에 전령을 보내 내일모레, 왕자하고 내가 같이 간다고.”
“예?”
한껏 들떠 있는 아드리안이 툭 내뱉은 소리에.
“뭐가 이상하냐? 칼하고 나 이렇게 됐으니까, 최대한 빨리 약혼을 해야겠지.”
곧 린드버그의 왕이 아니게 될 자들이지만 칼 린드버그의 부모가 거기 있었으니 구색이라도 갖추겠다는 황태자를 레아도, 벨프리도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키치너가 퍽이나 그걸 좋아하겠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기 생길 만한 일도 안 하셨다면서 무슨 놈의 약혼이에요?”
벨프리가 소리를 높였다.
황태자는 되레 벨프리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런 일이 없으면, 우리 둘이 보낸 시간이 통째로 없어지기라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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