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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31화 (31/150)

31화

왕자님이 동의한 일은 맞냐고 물었더니 아주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 아기가 생길 일이 없다는 건 그냥 농인 거 아냐? 진짜 짝이라도 맺은 거냐고!

벨프리의 얼굴이 뒤늦게 사색이 됐다.

녹초가 돼서 쉬고 있을 왕자의 목뒤를 살피며 흔적을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진짜 짝을 맺은 거라면 약혼을 서둘러야 했다.

일단 두 분 폐하께 말씀을 드리고, 언제 어떤 식으로 공표를 할지 아버지와 의논을 하고, 동맹국들에겐 전문을 보내야 했다.

혼비백산한 벨프리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나가 버리고 둘만 남은 자리에서 아드리안은 언제 실실거렸냐는 듯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공주, 혹시 어린 시절 칼에게 무슨 일이 있거나 하진 않았지요?”

황태자의 셔츠 깃 사이에서 칼의 것으로 보이는 잇자국을 발견한 레아는 제 동생이 마냥 어수룩하지는 않구나, 하는 짧은 감상을 마쳤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아드리안은 한숨을 푹 쉬고 제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실은 말입니다…….”

이어지는 황태자의 말에 레아가 핫, 하고 웃음을 삼켰다.

제가 하는 행동이 유혹인 줄도 모르고 날뛰던 왕자가 결정적인 순간에 “무서우니까 멈춰, 멈추라면 멈춰.” “당장 안 멈추면 다음은 없어!” 하고 되지도 않는 협박을 했단다.

“그래서 관뒀나요?”

레아의 질문에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에 들떠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긴 했지만 황태자는 멈췄다.

그러고는 미안해진 왕자가, 왕자가…….

황태자는 얼굴을 확 붉히며 제가 나온 방문을 집어삼키듯이 노려봤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아직도 욕심이 나 죽겠다는 시선이다.

“완전한 거절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건 다 괜찮다고 해 줬거든요.”

다른 거 뭐.

레아는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황태자는 자세히 설명하길 그쳤다.

완강히 거부하는 그 상황에도 사랑스러워 죽을 뻔했다며, 얼굴을 붉히는 꼴이, 칼이 사람을 하나 망쳐 놨다 싶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말투나 무게감은 이런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였나.

지난밤을 곱씹듯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황태자가 다시 정색을 했다.

“진짜 무슨 일 없어요? 뭐 트라우마 될 만한 일이라거나.”

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뻔했다.

자기가 오메가인 것도 잊어버린 동생이 이성이 다 날아가는 그 와중에서도 두려움이 앞섰나 보다.

다른 의미로는 대단했다.

“일단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그럴 일은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히트가 늦게 와서 더 겁이 많은 것 같아요.”

아드리안은 그제서야 안심한 것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싫어서 거부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라고 하고.”

그게 그렇게 좋았냐?

첫사랑이구나. 푼수 같은 아드리안의 어깨를 두드린 레아가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군요.”라고 말했다.

이러나저러나 가족이 될 거라 생각하니 같은 알파여도 예쁘게 봐줘야겠지.

모처럼 경계심이 바닥으로 떨어진 두 우성 알파께서 시선을 교환했다.

레아는 그가 환희에 젖어 있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부러웠다. 사실 많이 부러웠다.

서로에게 첫 경험. 이보다 더 감격적인 순간은 앞으로 숱하게 찾아올 거다.

예감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리고 그만큼 고생도 많이 하겠지.

레아의 따듯한 시선에 약간의 동정이 깃들었다.

오메가, 그게 뭐야. 먹는 거야? 하는 표정이던 동생을 생각하면 이 잘생긴 제부-弟夫-의 앞날에 드문드문 자갈이 깔린 것만 같았다.

“힘내요.”

아드리안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힘내서 잘해 주려는 모양이다.

너무 직진하는 것도 지나치면 매력이 떨어지는데.

레아는 벨프리처럼 통통 튀는 사람이 좋았다.

* * *

격정적인 시간이 지난 뒤.

진한 현자 타임을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무덤덤한 스스로에게 좀 놀라는 중이었다.

간간이 습한 숨이나, 끈질기게 따라오던 손길을 떠올리면 민망함보다 그리운 감각이 먼저 따라 나왔다.

“기분 진짜 좋았지.”

엘리자벳이 끼잉 하고 울었다.

이틀 동안 저를 떼어 놓고 뭘 했냐고 책을 잡는 것처럼 옆구리를 물고 놔주질 않던 엘리자벳은 발뒤꿈치를 열정적으로 핥거나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그게 꼭 나쁜 짓을 검사하는 학주 같아서 웃겼다.

나는 앨리자벳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댔다.

“내게 남자를 좋아할 가능성이 있었다면, 조금 더 살아 볼 걸 그랬어. 그렇지?”

이전 생에서 말이다.

전 여자친구들에겐 상처만 줬었다.

그녀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건 아닌데, 전우영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산재해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동하지 않으니 몸은 자연히 따라가 주질 않아서 이만큼 강렬한 밤을 보내 본 적도 자연히 없었다.

그래서인가, 나는 꼭 전부터 황태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처럼 취해 있었다.

혹시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데 몰랐던 것뿐이라고.

물론 동성애자와 알파, 오메가의 관계는 그사이에 수십 피트의 골이 있었지만, 내가 오메가인 걸 차치하고서라도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이성을 다 찾은 후에도 아드리안이 키스를 하는 걸 자연스레 받아 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뭐.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고, 그보다 먼저 본능이 반응하는 건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경험이었다.

덕분에 사람이 어떻게 쾌락에 중독되는지도 알게 됐다.

“린드버그로 출발하시기 전에 만찬을 가지자고 하셨어요.”

마르코는 가까이 오지 않고 문가에 서서 외쳤다.

“마르코, 언제까지 삐쳐 있을 거야?”

작은 등이 움찔 떨리고는 “삐친 거 아녜요.” 했다.

누가 봐도 서운한 티를 팍팍 내면서. 곧 죽어도 아니란다.

엉엉 울며 달려왔던 마르코는 아드리안과 내가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며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부모의 애정행각을 목격한 자녀처럼 굴었다.

마침 아드리안의 커다란 셔츠를 걸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더 민망한 꼴을 보일 뻔했다.

“왜 그래? 내가 전하랑 그렇고 그런 게 충격적이야? 언제는 내가 발정기가 안 와서 예민해 걱정이라며.”

정곡을 찔린 마르코의 눈 아래가 또 퉁퉁 붓기 시작했다.

“알아요. 아는데도, 막상 이제 전하께서 왕자님의 가장 가까운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니 서글퍼서 그래요.”

참 나, 아직 애는 애다.

마르코의 입장에서 보면 내 기억에도 없는 시절부터 10년 가까운 시간을 왕자와 둘만의 섬에서 보냈다.

그러니 애착이 깊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저래서 장가는 어떻게 가려고 그러지.

“누가 그래? 아드리안이 나랑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된다고.”

“저 같은 베타가 뭘 알겠어요.”

뾰로통한 목소리에 나는 흐흐 웃으며 엘리자벳을 끌어안았다.

봉제 인형처럼 얌전히 안긴 엘리자벳이 턱을 핥았다.

“네가 장가가면 나는 뒷전이 되려나?”

내 말에 마르코가 화들짝 놀랐다.

“저는 왕자님을 두고 장가 따위 안 가요!”

“너 10년 뒤에도 그렇게 말하는지 두고 볼 거야.”

잠깐 멈칫한 마르코가 말을 바꿨다.

“가더라도 왕자님을 뒷전으로 미룰 순 없어요.”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에 웃음이 나왔다.

“맞지. 나도 그래. 마르코랑 엘리자벳은 내 가족이야. 세상에 가족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어딨어?”

마르코의 구겨진 미간이 조금씩 펴졌다.

“제니스 시녀님하고, 레아 공주님도요.”

작게 덧붙인 마르코가 신이 나서 만찬 준비를 하러 가겠다고 손발을 걷어붙였다.

* * *

마르코가 나가고 나서 찌뿌둥한 몸을 편다고 이불 속에서 스트레칭을 하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야.”

엘리자벳이 그르릉, 하고 이를 드러내다가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꼬리를 다리 아래로 감추고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저녁에 보는 것 아니었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틀을 뒹굴던 사이라 그런가 우리는 한결 편해졌다.

내 질문에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온 아드리안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도 보고 저녁에도 보고 싶어서.”

“누가 로맨스 소설 주인공 아니랄까 봐.”

“뭐야, 그게.”

10년쯤 떨어졌다 만난 사람을 보는 듯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는 침대가에 걸터앉아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팔을 주물렀다.

“몸은 좀 어때?”

“좋은데, 고관절이 좀 아픈 것 같아.”

“여기?”

아드리안의 손이 이불을 헤치며 들어왔다.

이제 아주 머뭇거리는 척도 안 하네.

빙글빙글 웃으며 고관절을 더듬고 주무르는 손길에 내가 키득키득 웃자, 엘리자벳이 끙 소리를 내며 내 품에서 빠져나갔다.

“아직도 린드버그에 직접 가고 싶어? 네가 싫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드리안과 이런 관계가 되었다고 모든 걸 아드리안에게 맡길 순 없었다.

아, 이 말은 어폐가 있다.

이미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는데 마지막까지 맡겨 버릴 순 없었다.

“괜한 자존심이라 생각하겠지만, 이것마저 안 하면 태어난 의미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 정도야?”

“응, 그 정도야.”

바보 같은 행동으로 내게 몸을 주고 떠난 칼 린드버그.

걔도 한 번쯤은 밥값을 해야 했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돌아올 수 있게 할게. 그러니까 약혼식은 그 뒤에 조촐하게 올리자.”라고 말했다.

“아, 맞다.”

어영부영 결혼하겠다고 대답하고 말았었지.

멈칫하는 내게 아드리안이 허벅지를 움켜쥐고 웃으며 물었다.

“설마, 후회하는 건 아니지?”

후회는 할 필요도 없고 하지도 않는데.

“아니, 후회 안 해.”

“그럼 됐어.”

아드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숱하게 닿았던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어색하게 치열을 더듬는 내 혀가 기분이 좋은 듯 아드리안이 그릉그릉 소리를 냈다.

돌아온 마르코가 깡, 하고 무엇을 떨어트릴 때쯤 긴 입맞춤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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