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 * *
만찬의 주체가 황제라는 것에는 좀 놀랐지만 신세 지는 입장에서 되레 인사가 늦었다.
자수가 들어간 소매가 인상적인 크림색 셔츠에 허벅지를 가볍게 조이면서도 착용감이 편한 바지를 입었다.
거기에다 밑창이 도톰한 워커에 초록색 로브를 두르니, 그럭저럭 왕자 같은 모양새가 됐다.
“오랜만에 꾸며 드리는 것 같아요.”
머리를 뒤로 삭삭 빗어 넘기며 마르코는 엘리자벳에게 왕자님의 옷에 털을 붙이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걸 알아들을 리 만무하지만, 엘리자벳의 눈에도 새 옷이 마음에 드는지 한발 물러서서 얌전히 앉았다.
“황후 폐하께서는 못 나오신대요.”
“안 그래도 임신 중이시라고 듣긴 했는데, 어디가 안 좋으셔?”
“그건 아니고요.”
뺨을 긁적인 마르코가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임신 기간 내내 안고 다니겠다 선언하셔서, 그렇다면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이겠다. 하며 두 분이 다투고 계시대요.”
황제의 애처가 기질은 본인도 인정하고 배우자도 인정하며 심지어 백성들까지 안다고 했다.
일부러 숨기지도 않는다고.
감히 황후를 넘보는 사람도 없건만 동네방네 제 사람이라고 소문내고 다니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후우, 황태자 전하께서 폐하를 많이 닮은 것 같던데.”
걱정을 담은 은근한 눈빛에 내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드리안은 좀 다정하고, 많이 착한 데다 오메가 연인에게 목말랐어서 그래.
그가 가끔 보이는 독점욕은 그냥 본능적인 거야.
내가 애매하게 웃자 마르코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전 왕자님 걱정뿐이에요.”
이러다가 약혼식 이후에 방 밖으로 못 나오실지도 몰라요, 하고 불길한 소리를 하던 마르코가 앗,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왕자님. 저 허리띠랑 장식을 깜빡했어요.”
빗을 내려놓은 마르코가 양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그냥 가면 안 되나?”
망토로 가리면 허리띠 같은 건 보이지도 않을 텐데.
“안 되죠. 허리띠는 정중한 차림의 기본이라고요. 지엄한 분들 사이에서 바지가 내려가는 참사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해요?”
누가 왕자 바지를 내리겠냐.
당황하는 나를 본척만척하며 마르코가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뒷모습이 어찌나 절박한지 허리띠를 찾는 것이 인생의 과업인 사람처럼 보였다.
음, 아무래도 정비를 좀 해야 할 모양이다.
아드리안과 몸은 한껏 가까워졌지만 실제로 그가 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 거리낌 없이 서로 조언을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가 되면 드레스룸과 침실을 분리하는 건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장식 하나를 까먹을 때마다 먼 길 가야 하는 사용인들을 위해서라도.
덜컹.
마르코가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문이 살짝 열렸다.
엘리자벳은 내 옆에 있다가 귀를 쫑긋 세우며 문을 경계했다.
아드리안에게 차마 못 한 시비 걸기를 저 사람에게 하려는 모양이라 목줄을 단단히 잡고 문가를 돌아봤다.
검은 피부의 황금색 눈을 가진 작은 여자아이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칼 린드버그.”
조그만 게 어른 이름을 막 불러. 그래도 귀여워서 봐준다.
몽실몽실한 머리를 양쪽으로 틀어 맨 게 예전에 유행하던 캐릭터를 닮았다.
“……누구세요?”
여자애가 천천히 문을 밀고는 들어와서 탁 닫았다. 소녀와 성인의 경계에 있어 나이를 쉽게 가늠하기 어려웠던 그녀가 엘리자벳을 보고 빙긋 웃었으나 엘리자벳은 그르릉하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소녀는 엘리자벳이 자신을 경계하는 게 서운한 듯 입술을 비쭉이곤 딱딱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난, 라시다 루루. 예언자다.”
* * *
예언자의 존재를 까맣게 있고 있었다니. 첫 히트의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다 잊고 있었다.
“네가 예언자구나.”
“겉모습은 이래도 속 알맹이는 나이가 너보다 많으니 반말은 삼가라.”
한 500년쯤 산 모양인지.
턱을 한껏 치켜올린 루루는 팔짱을 끼고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코웃음을 쳤다.
“칼 린드버그가 딴사람이 된 것처럼 변했다더니 그럴듯하긴 하네. 어디 봐. 이번에는 무슨 장난을 치려고 그러는 거야?”
아드리안도, 레아도,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벨프리도 변한 내가 장난을 친다 표현했다.
칼 린드버그가 이 소녀를 만난 적이 있던가?
“장난이라니?”
“다른 사람들은 속여도 나는 못 속여. 내가 모르는 건 있을 수 없어.”
이렇게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며 의심하는 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안타깝게도 내게 문제가 있다면 기억이 좀 부실해졌다는 것뿐이야.”
루루는 이거 잘 걸렸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아, 그런 ‘설정’이니?”
팔짱을 낀 루루가 기도 안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정말 기억을 잃었다면 어떻게 아드리안 헤네켄의 존재를 알고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을까? 우리 전하께서는 원래 네게 관심도 없었는데.”
그건 정곡이었다.
“……우연히 아드리안의 기억만 남아 있었을 뿐이야.”
“그렇게 친한 척 부르지 마!”
루루는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그녀가 하도 격앙되어 있어서 나는 그녀가 혹시 아드리안을 연모하거나, 숨겨진 전 여자 친구는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내가 전하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아? 그분의 행복한 마지막을 보기 위해 나는 살고 있다고.”
연모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분의 행복을 위해, 그분을 가만히 둔다는 선택지는 없어?”
남편이 될지도 모를 남자와 자고 나서, 그게 나쁘지 않았다고 인정하자마자 성가신 전 여자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사실 그것보다는, 아주 기분 좋은 꿈에서 현실로 곤두박질친 것만 같은 불쾌함이었다.
라시다 루루는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그분은 너와 엮이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네가 그분의 뺨을 때린 후부터 줄곧 걸림돌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지금도 그분께 폐만 끼치고 있잖아.”
루루가 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녀 앞에서 순순히 인정하자니 배알이 꼴렸다.
“그건 맞는데, 너의 그분이 내가 마음에 드신대. 이건 어떻게 해?”
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독기 서린 표정을 지었다.
“감히 예언자로서 말하건대, 이 세계에는 각자의 자리가 따로 있어. 기억을 잃었건, 개과천선을 했건. 네 자리는 전하의 옆자리가 아니야.”
그녀가 황태자의 짝으로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는 시녀의 말이 왜 이제야 떠오른 걸까.
“그럼, 네가 보는 내 자리는 뭔데?”
이건 순수하게 궁금해서 나온 질문이었다.
갑자기 소설 속에 들어온 나는, 주인공의 옆자리도 차지해서는 안 되고, 나 홀로 서 있기도 힘들다 말하는데, 도대체 내 자리는 어디야?
“네가 정말 정신을 차렸다면 린드버그를 구하고 나거든 그대로 처박혀 있든가, 여기서 멀리 떨어진 동네에 빵집이라도 차리든가 하면 되잖아!”
역시, 빵집이냐.
루루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나 때문에 제 자리를 잃고 슬퍼할 누군가를 걱정했다.
“그분이 오메가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었단 말이야. 어째서 여기 나타난 거야?”
잠깐만, 오메가가 된다고?
“누가 오메가가 되는데?”
라시다는 픽, 웃었다.
“누구긴 누구야, 황태자 전하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분만 바라보시는 분이지.”
가장 가까운.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아드리안의 곁에서 그만 바라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 젖형제가 아직도 베타로 남아 있는 게 이상할 지경이야.’
레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외모라고 생각했지.
벨프리는 잘생김과 아름다움에 뚜렷한 경계가 없는 얼굴이었다.
균형 잡힌 신체와 또랑또랑한 이목구비가 보는 이의 호감을 자아내는 인상이고.
아드리안에 비하면 제 나이 때의 풋풋한 청년이라 귀여운 맛도 있었다.
정계를 주름잡는 공작가의 삼남이고 황태자 앞에서도 주눅 드는 법이 없는 당찬 청년이다.
그런, 벨프리가 오랫동안 황태자를 연모했었고.
곧 오메가가 될 건데, 내가 끼어들어서 망쳐 버렸다.
어쩐지 처참한 기분이다.
“……그분이 오메가가 되는 날이 언제인데?”
내 질문에 루루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알면? 그 전에 죽여 없애려고?”
“내가 그분을 왜 죽이냐. 이전의 칼 린드버그가 아니라니까.”
“그걸 어떻게 믿어?”
“믿고 말고는 네 자유지. 나는 지금 헤네켄의 도움을 꼭 받을 일이 있고.”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분은 결혼과 더불어 아이를 낳아 줄 오메가로 ‘칼 린드버그’를 원했다.
“황태자는 내가 필요하다던데, 그 사람도 우성의 오메가가 되는 것 맞아?”
“당연한 것 아냐?”
“하…….”
생각해 보니 그러네.
우린 서로가 형질자라 끌렸고, 황태자는 우성의 후계자가 필요할 뿐일지도 몰랐다.
루루는 별걸 다 궁금해한다고 툴툴거리면서도 두 사람 사이의 궁합이 최고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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