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네가 있으면 아드리안 전하는 그 사람이 오메가가 되어도 너를 버릴 수 없어서 외면해야 해.”
오메가가 된 벨프리가 아드리안의 사랑을 갈구하다가 엉뚱한 알파와 연결되거나, 이뤄지지 않는 사랑을 저주하며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것 따위가 떠올랐다.
소설의 스토리 라인은 말하자면 이 세계의 우주인데, 그것들이 합심해서 벨프리와 아드리안의 사랑이 진짜 사랑이다 말하면 그게 운명이고 진짜인 것이다.
심지어 눈앞의 소녀는 황태자의 열혈 팬으로 여러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예언자였다.
나?
나는 어쩌다가 소설 등장인물이 되어서 쓸데없는 정의감에 불타올라 주변인과 스스로를 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그마저도 혼자 못해서 주인공에게 손을 벌렸고. 그 대가로 사랑 없는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니까 이물질은 이만 사라져 줬으면 좋겠어.”
이물질.
재영이가 소설 속 칼 린드버그를 부르던 말이다.
맞네. 이물질은 나다.
머리가 차가워서 시릴 지경이다.
악역이 정신 좀 차렸다고 주인공의 자리를 넘보면 또 다른 트러블이 생길 뿐이었다.
“그럼, 그 사람이 언제 오메가가 되는지 정도는 알려 줘.”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루루를 쳐다보았다.
내 눈빛에 그녀가 조금 움찔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나는 사람 좋은 척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대가를 약속했어. 약속도 안 지키는 무책임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 그에게 진짜 짝이 될 사람이 정해져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람이 나타날 즈음에, 내가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될 때. 조용히 사라져 줄게.”
루루는 눈을 크게 떴다.
네가 감히 그런 말도 할 수 있느냐 묻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약간 주저하다 대답했다.
“다음, 전하의 생일. 일주일이 채 안 남았어.”
어라. 얼마 안 남았네.
“그가 오메가가 되려면 무슨 조건이 필요한 거야? 황태자는 이번에 나와 함께 린드버그에 가겠다고 했는데.”
루루는 사색이 되어 무조건 말려야 한다고 말했다.
“베타가 오메가가 되는 건 드문 일이지만 종종 있었어. 형질자가 태어나는 집안의 베타가 엄청난 양의 페로몬을 흡수하면서 기질이 변하는 거야. 그러려면 무조건 전하는 벨프리 곁에 있어야 해!”
루루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쩌지. 벨프리가 오메가가 되지 못하면 전하는 영영 누구와도 짝을 맺을 수 없어.”
그녀의 머릿속에는 내가 우성 오메가인 건 아에 남아 있지도 않은 모양이다.
혼자 사색이 되어 오두방정을 떠는 루루를 불러 세웠다.
“내가 갑자기 그에게 린드버그에 혼자 가겠다고 하면 어떤 이유를 대도 순순히 납득하기 힘들 거야. 그러니 가짜 예언이라도 해 주든가.”
약혼까지 진행하려고 마음먹은 황태자가 사정이 있어 혼자 가겠다고 하면 퍽이나 그래라 하겠다.
차라리 예언자가 ‘너는 생일에 나라를 떠나면 지진이 일어난다.’ 하고 못을 박아 주는 게 낫지.
한 번 차가워진 머리는 다시 달아오르지 않았다.
“그런 생각도 할 줄 알아? 역시 야비한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이 밤톨만 한 게.
“내가 정말 야비하면 어떻게든 그를 데리고 린드버그에 가겠지. 좋은 마음으로 도우려 하는데 초 치지 말아 줄래?”
빈정거리던 루루가 금세 샐쭉해져서 뒤돌았다.
“흥, 그럼 그렇지. 네가 황태자를 진심으로 사랑할 리 없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럼 내가 황태자를 사랑해서 그가 원작의 상대방과 연결되지 못하도록 다시 방해라도 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게 진짜 ‘칼 린드버그’의 불행한 엔딩을 초래하는 걸지도 모르는데?
기분이 나빠진 내가 “입조심.” 하고 조용히 말하자 루루는 다시 입술을 삐죽였다.
귀엽게 봐 줄 수 있는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얄밉기만 했다.
“네가 정말 변했다면, 황태자 전하의 앞길을 막지 않는 걸로 증명해 보여. 난 그렇게 알고 갈게.”
루루는 내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한참 어린 여자애한테 미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게 웃겨서였다.
그것도 단 며칠 연인인 척한 황태자를 놓는 게 아쉬워서.
예언자인 그녀는 칼 린드버그가 행했을 온갖 나쁜 짓은 다 봤을 테니. 그녀가 나를 싫어한다고 해서 내가 상처받을 일은 아니었지만.
상처받았다.
그녀의 신랄한 말도 상처였고, 아드리안이 날 좋아하는 이유가 달리 대체할 존재가 없어서일 수도 있다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아니지, 이것도 다 페로몬의 작용일지 몰랐다.
분명 방금까지 살을 맞대고 체온을 나눴던 상대가 순식간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내가 이런 문제를 누구에게 시원히 털어놓고 의논할 사람이 있나?
여기가 소설 속이라는 건 나만 아는데.
나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
벨프리가 진짜 주인공이라면, 더더욱 황태자의 옆을 차지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벨프리도 싫어하지 않았으니까.
레아의 자리를 찾아주기로 했던 것처럼. 벨프리의 자리도 찾아주면 되는 거다.
그래, 그게 뭐, 별거냐.
조금 쓸쓸한 기분은 들지만 애초에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잖아.
* * *
루루가 사라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코가 땀에 흠뻑 젖어서 뛰어 들어왔다.
“죄송해요! 많이 늦었죠. 갑자기 문고리가 고장 나는 바람에요.”
그래도 시녀 누나가 와 줘서 살았다고 말하며 웃는 마르코는, 그 시녀 누나가 문고리를 고장 냈을 거라고는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 갑자기 배가 아픈 것 같아.”
이런 마음으로 아드리안을 만나야 한다니.
끔찍해서 꾀병을 부려 봤지만, 그것도 비참한 것 같아 관뒀다.
무거운 마음으로 나가니 벌써 마차가 당도했다.
오랜만에 몸의 곡선을 드러내는 드레스를 입은 레아가 서 있었다.
“너 무슨 일 있어?”
“네, 아뇨.”
내 애매한 대답에 레아가 쿡쿡 웃었다.
웬만하면 따라 웃고 싶었는데 마음이 엉망진창이라 웃지 못하고 시선을 떨궜다.
“너, 정말 이상하구나.”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그녀에게 부탁 한 가지를 했다.
“누님. 나 말을 번복하게 돼서 미안한데요. 린드버그에 갈 때 차원문까지만 따라와 주실 수 있어요?”
어찌나 길을 잘 닦아 뒀는지 덜컹거림 하나 없는 마차 안에서 레아가 고요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이유는 묻지 마?”
“……아뇨. 만에 하나를 위해서요.”
갑자기 제가 헤네켄으로 못 돌아가거나 할 수도 있잖아요.
우물쭈물 늘어놓는 변명에 레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황태자가 허락을 할까. 너와 둘이 가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던데.”
고작 이틀 만에 사람을 그렇게 푼수로 만들어 놓더니, 안에서 마력이라도 쓴 거냐고 물어 왔다.
그것은 마력이랑 상관없는, 아, 상관없지는 않나? 그냥 페로몬의 작용이었을 뿐이다.
차가워진 머리로 되짚어 보니 우리의 밤에 페로몬 외의 어떤 인력도 없었다.
열로 달아오른 머리로 황태자는 내게 호감을 말했고 나도 엉망진창 녹아서 네가 싫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때 황태자의 표정은 정말 기뻐 보였지만.
그뿐이다.
“황태자는 아마 못 갈 겁니다.”
담담하게 말하자 레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말 같은데.”
그녀는 네 확신이 어디서 나오냐고 물었다.
그가 진짜로 좋아하게 될 사람과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는 노릇이라 나는 또 다른 핑계를 댔다.
“황태자라는 자리가 그렇잖아요. 나라의 기둥이고 미래인데. 남의 나라에, 그것도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곳에 가는 걸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깊은 한숨과 동시에 마르코는 나와 레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황태자를 밀어내면 뭐가 달라져?”
도무지 네 생각을 알 수 없다는 레아의 속내를 읽었지만 나는 애매한 미소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 레아가 말했다.
“정말 황태자가 함께 가지 못한다고 한다면 내가 따라가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야, 혹시 네가 이제 와서 겁을 집어먹고 안 가고 싶다고 말한들. 우리가 자의로 린드버그를 떠났고 그 결과 많은 것이 달라질 거라는 것도 변함없는 사실이지.”
마차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레아의 손을 잡아 주러 다가왔지만 레아는 혼자 바닥을 딛고 섰다.
나는 여전히 마차 안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네가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넌 제 몫을 했다고 봐. 그러니 한 번쯤은 도움이나 대가를 떠나서 황태자와 네 사이를 돌아보는 게 어때?”
그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돌아섰고 나는 정문에서 뛰어나오는 황태자를 쳐다봤다.
견장까지 달린 감색의 제복이 지독하게 잘 어울리는 남자가 나를 보며 환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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