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 *
황제는 황태자와 무섭도록 닮은 얼굴이었다.
거기에다 예상보다 더 젊은 남자라서 칼 린드버그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잘 태운 듯 까무잡잡한 피부와 곱슬머리도 유전이었던 모양이다.
마치 모든 것을 감정하는 듯 눈으로 잠깐 칼을 훑어본 그는 이내 사람 좋은 웃음으로 악수를 요청했고 칼은 조금 주눅이 들어 양손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머리에 쓴 황금의 관만큼이나 위용이 넘치는 황제를 칼 왕자가 동경하는 눈으로 바라볼 때 아드리안은 제 안의 질투를 달래려고 이를 악물었다.
“이제야 얼굴을 보는군, 황후의 배가 예상보다 빨리 불러 와서 말이지.”
자리에 없는 황후를 상상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표정을 짓는 황제는 세렝게티의 수사자 같았다.
“아닙니다, 실은 제가 먼저 알현을 요청드렸어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칼이 딱딱하게 굳자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돌려 말하는 것과, 시간을 끄는 것을 싫어해. 그만큼 허례허식도 싫어하지. 왕자와 내가 무슨 사이라고 시간을 할애하며 불편한 만남을 하겠나.”
황제의 말은, 이제는 너와 내가 무관한 사람이 아니니 시간을 냈다는 말하고 똑같았다.
이 호의도 다 내가 아들과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겠지.
아드리안을 힐긋 쳐다본 칼이 씁쓸히 웃고 다시 황제에게 말했다.
“그래도 도움을 받는 처지라서 감사를 표하고 싶었는데. 빈손으로 와서 염치가 없었습니다.”
이건 칼의 진심이었다.
황제에게도, 황태자에게도.
황태자의 상대가 레아인 줄 착각하고 있었을 땐, 이를테면 소설의 가장 답답한 구간을 축소시킨 것만으로도 보답한다 생각했다.
그러나 벨프리가 황태자의 상대역인 걸 알고 나니 칼 린드버그는 제가 정말 호의에 기댔을 뿐인 것 같아 더 작아졌다.
착잡하게 가라앉는 칼의 기분을 눈치챈 아드리안이 테이블 아래로 그의 손가락을 두드렸고 황제는 “왕자가 참 생각이 많네.” 하고 포도주를 들이켰다.
“우리가 린드버그를 돕기로 결정한 데는 물론 바라 마지않던 황태자의 짝으로 그대가 합당하다는 이유가 컸지만.”
아드리안이 뿌듯하게 칼을 바라보았고 칼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것과 별개로 우리가 피를 나눈 형제라 그래.”
칼이 화들짝 놀라며 레아를 바라보았지만 레아도 처음 듣는다는 얼굴이었다.
황제는 빙글빙글 잔을 돌리며 피처럼 붉은 포도주가 만들어 낸 소용돌이를 감상했다.
“린드버그의 전신인 린드와이어 황제와 헤네켄의 초대 황제가 형제였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는 할머니가 손주에게 하는 옛날이야기처럼 말을 꺼냈다.
“헤네켄의 초대 황제와 린드와이어의 초대 황제는 이부형제였어. 여신이 지상에 내려와 인간과 사랑의 빠져 처음 낳은 아이가 린드와이어의 초대 황제가 되었지, 문제는 인간의 수명이 짧은 고로, 노쇠한 남편이 먼저 죽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여신이 스스로 소멸하려고 하자 천상에서는 다른 여신을 내려보냈다고 해.”
다른 여신은 그녀가 소멸하지 못할 이유를 만들기 위해 각고로 노력했고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을 잉태시켰다.
“헤네켄보다 린드와이어의 역사가 훨씬 긴 것은 그사이에 수 대의 시간의 차이가 있어서 그래. 형제긴 형제인데 나이 차이는 조부와 조손만큼 났다고 해야 하나.”
두 여신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인간보다는 신에 가까웠기에 장수했고 신력은 인간의 몸을 거치며 마력으로 변했다.
그리고 두 신의 성별이 같았던 탓에 엉뚱한 축복 하나가 더해졌다.
그게 바로 성별에 관계없이 마력이 넘치는 인간들끼리 서로를 끌어당기고 출산을 하는 형질자가 나타난 것이다.
“린드와이어의 황제는 헤네켄의 황제를 질투했어. 마력 면에서 이쪽이 훨씬 앞서 나갔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한쪽은 인간과 신의 결합이고 다른 쪽은 신과 신의 결합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힘의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마력이 넘치는 인간들만 살고 있을 땐 수식 따위 필요가 없었어. 직접 쓰면 되니까. 마정석은 더욱 필요가 없었고.”
식당의 문이 열리고 시종들이 웨건을 줄줄이 끌고 들어왔다.
입이 까끌까끌한 칼이 손을 대지 못하자 아드리안은 안절부절못하며 음식을 덜어 그의 그릇에 옮겼다.
황제는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문제는 둘의 다툼이 길어지고 세대가 변하는 동안에 마력이 점점 옅어졌던 거야.”
한쪽은 싸움을 걸고 한쪽은 방어하고 하는 동안에도 아이들을 계속 태어났다.
마법을 직접 사용할 수 없는 자손들을 위해 새로운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신들은 힘을 합쳐 둘을 중재하고 그 증표로 옥새를 나눴다.
마정석과 수식을 쓰는 법을 알려 준 것도 여신들이었다.
소임을 다하고 지친 여신들이 하늘로 올라가고 남아 있는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발전을 꾀했다.
이제 마력이 없는 인간도 마법을 쓸 수 있는 시대로 넘어가는 순간이었지만. 안타까운 건 린드와이어의 마법사들 중 일부가 그 때문에 자신들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린드와이어의 마법사들이 마정석을 공유하지 않으려 국경을 닫아걸고 자기들끼리 옳네 그르네 다툼을 하는 사이 헤네켄은 마법을 나누며 번성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칼 린드버그? 마법사가 월등히 많았던 린드와이어와, 헤네켄. 그중에 쇠퇴하는 것이 린드버그가 된 건.”
황제는 대뜸 질문을 던졌고 칼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고 운을 띄웠다.
황제가 오호라, 하고 감탄하는 사이 칼은 기억을 더듬어 예전에 읽었던 책을 떠올렸다.
적자생존에 대한 이론이 판을 칠 때, 역으로 운명에 순응하고 제 것을 나눌 줄 아는 다정한 종이 결국 오래 살아남는 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이론에 관한 책이었다.
배움이 짧은 것을 보완하고 싶어 닥치는대로 책을 읽던 때에 가장 재밌게 읽었던 책이었다.
“두 무리의 짐승이 있어요.”
레아는 칼이 황제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봤다.
“한 무리는 야생성을 유지하며 자신보다 약한 개체를 쫓아내고 하나의 우두머리가 다른 모두를 지배해요. 우두머리의 자식 외의 다른 자식들은 모두 죽거나 쫓겨나요.”
칼은 제 접시 위의 채소를 양쪽으로 나눴다.
“다른 한 무리는 우두머리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는 지배자의 역할보다는 길잡이 역할에 충실했어요. 먹이를 찾아 연약한 개체와 나누고 자유로운 연애를 권장해요.”
아드리안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칼을 살폈다.
아까 데면데면하게 구는 모습에 서운했던 게 잊혀질 정도였다.
“기시적으로 봤을 땐, 강한 우두머리 아래에 강한 개체들이 오래 살아남을 집단 같지만, 결국 다정한 우두머리가 이끄는 집단이 더 많은 세대를 걸쳐 살아남는 거예요. 공격과 패배로 얼룩진 역사보다 훨씬 다양한 경험들을 서로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지혜가 쌓이는 거고요.”
그러면서 인간의 역사도 결국 마찬가지 아니겠냐고 되물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세 알파는, 힘으로는 그보다 한 수 아래일지 모르나 기죽지 않고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한 오메가의 음성에 푹 빠졌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생명을 가진 것이나, 아닌 것이나 늙고 쇠약해지는데, 공포는 순간을 지배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립해 있는 기사와 사용인들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민망해진 칼이 볼을 긁적이며 “센 바람에 단단한 나무가 먼저 부러진다는 말도 있잖습니까.”하고 마무리했다.
칼의 말이 끝나고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황제는 껄껄껄 웃었다.
“그게 지금 헤네켄의 정신이야. 헤네켄 황실에서 우성 형질자를 고집하는 건 마력 보존 따위 때문이 아니네. 어찌 된 영문인지 우성의 알파만 줄줄이 태어나는 통에, 열성이나 베타가 배우자로는 적합하지 않았을 뿐이야. 단 두 세대만 지나도 마력은 쓸 데가 없을지도 몰라.”
아드리안은 칼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가 올라오는 것을 홀린 듯 바라보다 그의 얼굴이 점점 기쁨으로 물드는 것을 잡아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술렁이는 건지.
아드리안은 테이블 아래 얽혀 있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칼은 피하지 않았지만 마주 잡아 주지 않았다.
황제는 제 아들이 이 청년에게 대놓고 빠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기분이 좋아진 황제가 주방장의 조리 실력을 자랑하며 화기애애한 만찬 분위기가 이어졌다.
디저트가 나오고 달콤한 술에 칼이 조금 취했을 때쯤 황제는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신이 인간보다 더 욕심이 많고 집착이 심한 존재라는 거 알고 있나? 우성의 형질자일수록 그 모체인 신을 닮아 제 것에 대한 집착이 심하지.”
황제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아들을 응시했고 아드리안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칼 린드버그는 대번에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 제가 알파가 아니라서 잘 모르는 걸 수도 있는데.”
레아는 동생이 제발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했다.
아드리안의 얼굴에 불안이 드리웠기 때문이었다.
칼은 취한 것 같았고, 그녀는 그의 취한 모습은 처음 보니까.
“알파는 언제 자기 짝을 알아보나요?”
“으음?”
황제가 재밌다는 얼굴로 아드리안과 칼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 오메가나 짝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난감한 주제의 이야기를 할 때 손가락을 꿈질거리는 것이 버릇인 듯했다.
황제는 턱을 쓰다듬었다.
“보통은 첫눈에 알아보지. 페로몬의 상성이라는 것이 있잖아. 처음 만난 오메가에게 마킹당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페로몬은 매력적이라고 느끼지 못할 때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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