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황태자가 칼 린드버그를 만난 건 열 살 무렵이다.
어린 알파는 처음 만난 오메가를 새끼 거위처럼 맹목적으로 제 짝이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건 원작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거고.
“페로몬이랑 상관없이 사랑을 느낄 수도 있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모든 게 다 페로몬 때문이라고 한다면 베타와 결혼하는 수백 명의 형질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텐가.”
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엔 화학적 작용만 있었던 거다.
황태자가 사랑스러워 보였던 것도. 그 순간에 모든 걸 다 내어 줄 듯 굴 수 있었던 것도.
황태자의 마음이 제 것이 아닌 것 같아 서운해지려는 이 마음도.
“아드리안 전하. 역시 린드버그에는 저 혼자 다녀올게요.”
잠깐 호흡을 가다듬은 칼이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꼭 쥐었다.
“왜요?”
아드리안은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글렌 황제도 뜬금없는 왕자의 말에 “응?” 하는 표정을 지었다.
칼 린드버그는 만찬에서 아드리안을 만난 뒤 수십 분 만에 처음으로 그 앞에서 웃어 주었다.
“이 이상 번거롭게 할 수 없어서요.”
갑자기 선을 그어 버리는 칼의 태도에 머리 한쪽이 활활 타는 것처럼 된 아드리안이 장소를 망각할 뻔한 순간에.
누군가 만찬장에 들어와 황제에게 귓속말을 했고, “뭐? 황후가!” 하며 만찬장을 박차고 나갔다.
결국 만찬은 애매하게 끝을 맺었다.
“뭐야. 도대체.”
한사코 거절하는 왕자를 끌고 외성까지 온 아드리안이 칼에게 물었다.
“뭐가?”
칼이 말간 얼굴로 왜 그러냐고 시침을 뗐다.
그 때문에 환장한 아드리안이 칼의 팔을 잡아당겼다. 칼은 순순히 끌려왔다.
마르코가 사색이 되어 아드리안을 말려 보려 했지만 칼의 눈짓에 엘리자벳을 재촉해 방 밖으로 나갔다.
“지금 이 태도를 뭐라 설명할 거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칼 린드버그는 아드리안의 눈을 피한 적 없었는데 지금은 한숨을 쉬며 허공을 보았다.
“갑자기 무서워지기라도 한 거야? 내가 혹시 뭐 잘못했어?”
아드리안은 애써 화를 삭이며 물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늘을 가진 것처럼 기뻤는데.”
돌연 눈가가 촉촉해지며 쥐었던 손에 힘을 뺀 아드리안이 한발 물러섰다.
칼의 팔뚝이 너무 부드럽고 가녀린데다 미세하게 떨렸기 때문이었다.
“린드버그를 구하고 싶어서 좋아하지도 않는 나와 밤을 보낸 걸 후회하고 있는 건가?”
그건 네 얘기 아니야?
벨프리에게 향하는 마음을 접으려 나를 좋아하는 척한 건 아니야?
그는 널 받아 줄 상태가 못 되니까. 그를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자꾸만 엉망이 되어 갔다.
벨프리는 곧 오메가가 될 텐데. 그럼 내가 꼭 옆에 없어도 되는데.
칼은 제 처지가 불쌍했다.
그리고 동시에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황태자를 불쌍히 여겼다.
“그런 거 아니야.”
아드리안의 페로몬은 불안을 가득 담고 칼을 더듬었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이틀 전의 열기가 다시 단전에 모인 칼은 황태자를 달랬다.
그날은 용케 끝까지 가지 못했지만 이번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지도 몰랐다.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리려면 칼 린드버그는 그러면 안 되는 역할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가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데. 거기에 아드리안까지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헤네켄에 그 빚을 어떻게 갚아? 그러니까 신중하게 가자고요.”
칼은 애써 담담히 웃어 보였다.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했지만 그 웃음에 매달려 불안을 가라앉힌 아드리안은 벽에 기대 있는 칼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들고 길게 입을 맞췄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칼이 자기 입술을 소매로 살짝 닦아 내는 작은 몸짓에도 서운함을 느낀 아드리안이었지만 티 내지 않았다.
“린드버그에서 돌아오면 더는 참지 않을 거야.”
그때가 되면 네 옆에는 다른 오메가가 있을 텐데.
칼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빈말 아니야. 정말 난 당신이 마음에 들었고. 우린 좋은 짝이 될 수 있을 거야.”
분명 칼은 웃고 있고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아드리안은 자신의 말이 허공을 맴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부디, 조심히 다녀오시길.”
아드리안은 자신의 바람이 듬뿍 담긴 마도구를 칼의 허리춤에 달았다.
칼은 매끈한 마정석의 표면을 더듬다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생일, 미리 축하해. 생각해 보니 그땐 내가 린드버그에 있을지도 몰라서.”
뭐라도 주고 싶은데, 이런 형편이라.
머쓱하게 웃어 보이는 칼 때문에 아드리안은 네가 무사히 돌아오면 그게 선물이라고 농을 했다.
쌀쌀한 밤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 * *
“제가 없으면 누가 왕자님을 챙겨요?”
마르코와 엘리자벳도 두고 가겠다는 말에 마르코는 아예 엎드려서 엉엉 울었다.
“난 지금 친정 나들이 가는 거 아니고, 조용한 전쟁 치르러 가는 거거든? 너 있으면 거슬려서 안 돼.”
마르코가 충격을 받은 듣 넋을 잃었지만 오늘따라 비장함이 넘쳐흐르는 칼의 말을 거스를 순 없었다.
벨프리가 마침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마르코는 벨프리에게 자신이 따라갈 수 있게끔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벨프리도 고개를 저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동쪽 둑방이 무너지며 홍수가 났고 황태자는 급히 황제의 명을 받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가까이서 지켜보는 레아와 벨프리까지 불안하게 만들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칼은 무덤덤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벨프리는 칼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곁눈질을 했지만 칼에게 그것마저 간파당했다.
“아닙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두 사람은 린드버그 왕성 내부 설계도를 짚으며 동선을 짰다.
“왕자님께서는 일단 성에 들어가시면 예의 그 방약무인한 왕자님을 연기해 주십시오.”
“그건 자신 있습니다.”
일전에도 해 본 적 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의 엉망진창인 마음을 가지고 거기 가서 왕이나 재상을 만나면 싫어도 뾰족한 티가 날 것만 같았다.
아주 작정하고 패악을 부려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하루 이틀은 움직이지 마시고 그냥 계세요. 저희가 그사이에 군사를 움직여 각 영주를 안심시키며 성난 민중을 제압하는 척을 할 거니까요.”
황태자와 밤을 보낸 후 어딘가 분위기가 달라진 칼을 벨프리는 연신 훔쳐보았다.
늘 정돈된 외모와 차분한 몸가짐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대면 착 달라붙을 것만 같은 섹시한 기운이 흘렀다.
순응한 건지, 아니면 체념한 건지.
뭔가를 한바탕 비운 것 같은 달관한 눈에는 대신 총기가 흘렀다.
“헨드릭 소공자?”
넋을 잃고 왕자를 관찰하던 벨프리가 앗, 하며 소매로 입을 가렸다.
침이라도 흘렀을까 걱정한 탓이었다.
칼은 그 태도를 조금 다르게 이해했다.
내심 기쁜 것 아닐까.
기쁜데 티 내면 나한테 미안해서.
동상이몽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드리안의 다정함이 이제 다른 사람에게 향할 거라고 생각하니 불유쾌한 감정이 다시 엄습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건 이틀 뒤입니다. 성주를 포박하고 창고가 열릴 동안 각 성벽에 파발을 올리지 못하도록 병사들을 포진시킬 거고요. 키치너 재상을 잠깐 왕성 밖으로 나오도록 유도할 생각입니다.”
“어떻게요?”
“사저에 불을 지르려고요.”
“엇?”
칼이 당황하자 벨프리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발베니 대공의 상단이 들어오면 가장 많은 사치품을 사들이는 것은 키치너 일가였다.
성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나 다름없는 키치너의 성은 그의 자랑이고 전부였다.
“재상이 단 하나 못 가진 게 왕관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가 가진 다른 것보다 귀하냐. 그것도 아닙니다.”
벨프리는 발베니 상단에서 가공된 마정석을 전부 쓸어 가는 키치너가 그것을 사저에 보관해 뒀을 거라고 확신했다.
“사저에 불을 지르고 마정석이 몽땅 도난 위기에 처하면 제아무리 왕관에 집착하는 키치너도 불안해서 찾아가야겠죠.”
“그럼 저는 그사이에 옥새를 찾아오면 되는 거군요.”
“네.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최대 사흘입니다.”
“사흘이면 충분해요.”
칼이 자신 있게 말했다.
벨프리는 또 다른 마도구를 꺼냈다.
“이것은 공명하는 보석입니다. 헤네켄의 옥새와 공명할 수 있는 수식이 입력되어 있으니 쥐고 다니세요.”
헤네켄의 옥새와 린드버그의 옥새는 같은 종류의 마정석이라, 헤네켄의 옥새를 분실했을 때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건데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며 벨프리가 웃었다.
“헤네켄은 이렇게 다양한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린드버그를 진작 침략하지 않고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반투명한 공명석을 보며 칼이 지나가듯 한 말에 벨프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헤네켄은 타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나라거든요.”
한마디로 지금까진 눈치가 보여 안 했을 뿐이라는 거다.
“그래도 이렇게 왕자님이 자진해서 명분을 만들어 주시니 그것도 헤네켄의 복이죠.”
도면을 챙기던 벨프리는, “아니, 황태자 전하의 복이겠군요.”라고 정정했고.
칼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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