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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36화 (36/150)

36화

* * *

이동은 순조로웠으나 칼은 몇 주 만에 돌아온 린드버그가 전보다 훨씬 더 황폐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죄다 쓰러져 버린 옥수수 대와 추위를 이기지 못해 밭에 불을 놓는 사람들을 보며 초조해지는 마음을 달랬다.

“없는 살림에 들고 일어서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굶어 죽는 사람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달리던 기사가 창백한 칼에게 말했다.

허공을 달리던 말이 땅으로 가까워질 때쯤 누군가 무리를 향해 돌을 던졌고. 그걸 신호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칼을 잡아먹을 것처럼 몰려들었다.

“다 죽이고 빈 껍데기만 가져가라!”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냐다!”

눈가가 움푹 들어가고 낫을 든 손이 해골처럼 빼빼 말랐어도 기세만큼은 드셌다.

개중에는 아주 어린 아이를 업은 여인들도 많았는데, 아이들이 목을 가누지 못하고 늘어져서 매달린 모습을 보니 칼의 마음이 요동쳤다.

“헤네켄에서 연애 놀음이나 할 때가 아니었네.”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건지, 아니면 표정으로 유추한 건지는 몰라도 기사는 “곧 헤네켄의 병사들이 와서 정리할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라고 그를 위로했다.

결국 왕성에 도착할 때까지 다시 하늘길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칼 린드버그 왕자님이시다!”

“문을 열어라!”

왕성의 성벽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전과 사뭇 다른 때깔을 지니고 있는 것도 칼은 눈여겨보았다.

“병사들을 다 갈아 치웠군요.”

“대부분 용병이라 합니다. 린드버그에는 귀족을 위해 봉사할 사람이 더이상 없어 급하게 타국에서 용병을 들여왔다고 해요.”

아무리 그래도 제 나라 성을 외국인 용병에게 맡긴다는 게 말이 되냐.

용병들은 칼 린드버그의 외모를 보고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희롱이 다분한 농을 지껄였다.

헤네켄의 기사들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같이 검을 다루는 입장에서, 군주에 대한 기본적인 예도 지키지 않는 태도에 분노한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외설스러운 동작을 하며 노골적으로 왕자를 쳐다보던 용병들이 누군가 성안에서 걸어 나오자 자세를 똑바로 했다.

말에서 먼저 내린 기사가 뒤이어 내려오는 왕자를 도우며 귓가에 속삭였다.

“소식통에 의하면 린드버그의 기존 군사들 월급의 두 배씩을 주고 고용했다더군요.”

“자국민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네요.”

칼이 이를 으득 갈았다.

기사는 쓰게 웃으며 표정 관리를 하라고 덧붙이고는 물러섰다.

“이거 이거! 무사하셔서 다행이군요. 왕자님.”

키가 껑충 크고 여전히 신경질적인 인상을 가진 남자가 왕자를 끌어안을 것처럼 다가와 팔을 벌렸다.

“키치너 재상.”

칼은 슬쩍 옆으로 피했다.

“갑자기 그렇게 사라지셔서, 신이 걱정이 많았습니다. 고초를 당하지는 않으셨습니까?”

키치너의 뱀 같은 눈이 왕자의 목덜미를 살피고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재상이야말로, 혼자 성을 지키느라 힘드셨겠소. 이제 내가 왔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당연한 말씀을,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폭도들을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 고민하느라 잠을 설친답니다.”

개자식.

근심 하나 없는 모습으로 껄껄 웃는 재상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은 칼이 콧대를 치켜들었다.

“헤네켄의 기사들이 본때를 보여 줄 테니, 걱정 관두시고 오늘부터 발 뻗고 주무시오. 나도 먼 길 달려오느라 피곤하니 얼른 방으로 가고 싶군요.”

키치너는 암요, 암요, 하면서 왕자를 방으로 모시라 고함을 쳤다.

칼은 매의 눈으로 성의 사용인들이 전부 바뀌었다는 걸 짚어 냈다.

“기사님들은 따로 머물 곳이 있으니 그쪽으로 이동해 주시겠습니까?”

표정 없는 시종이 걸어 나와 왕자를 뒤쫓아 가려는 기사들을 저지시켰다.

“어디?”

칼이 묻자 재상이 대답했다.

“타국의 기사를 성안에 들여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따로 건물을 지어 두었으니 그쪽으로 모십죠.”

외국인 시종이며 병사가 여기저기 포진해 있는 건 괜찮고?

칼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턱짓을 해, 가장 가까운데 있는 기사 둘을 지목했다.

“이 둘은 내 쪽으로 보내. 시중을 들 사람이 필요하다.”

키치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중을요? 시종이 있는데 뭐 하러 기사를 씁니까?”

“토 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오며 가며 안면을 익힌 사람이 좋지 생판 모르는 사람 손 타는 게 좋겠어?”

그러면서 키치너에게 고개를 가까이한 칼이 표독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왕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옅은 채취에 잠깐 황홀한 듯 코를 움찔대던 키치너는 왕자가 속삭이자, 이 왕자님, 다행히 여전하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헤네켄에서 기사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알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눌러 보겠나. 내가 헤네켄에서 무시를 하도 당해서 말야. 한번 본때를 보여 주고 싶어.”

작지 않은 소리에 두 기사가 와륵 미간을 구겼다.

키치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둘을 빼고 나머지는 다 이동하라고 재차 명령했다.

“한밤중에라도 부르면 뛰어와야 하니 가장 가까운 데 배치시키게.”

칼의 명령에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오찬을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휴식을 취하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탈 줄 모르는 말 위에 있느라 엉덩이가 부서질 것 같아. 피부도 다 상했어.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향유를 바른 뒤 꼬박 하루는 쉴 예정이네, 두 분 전하께도 그리 전해.”

키치너는 이런, 귀한 왕자님의 귀한 엉덩이가 상하면 안 되죠, 하면서 슬쩍 왕자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이게 바로 토악질 나는 포인트다.

전우영이 칼 린드버그의 몸으로 눈을 뜨고 난 뒤 키치너는 몇 번 마주치지도 않았지만, 마주칠 때마다 희롱을 해 대었다.

당장이라도 손목을 꺾고 싶었지만 칼은 대의를 위해 참아 냈다.

탁.

문이 닫힌 뒤 기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방의 네 귀퉁이를 살피며 마정석을 놓았다.

혹시 있을지 모를 감시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귀도 막고 눈도 감으라는 수식이 쓰여 있는 마정석을 놓고 긴장이 풀린 칼이 침대를 두고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대충 상황을 알고 왔어도 대단히 놀랍군요.”

노련하고 나이가 많은 기사의 말에 칼이 쓰게 웃었다.

“저도 새삼 놀랐습니다.”

“저는 알파에게서 저런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다른 젊은 기사가 혀를 내둘렀다.

“아, 오메가라고 하셨죠?”

“맞습니다. 열성이긴 하지만요.”

“저는 다른 기사들이 거기서 무슨 고초에 빠지지나 않을지 걱정입니다.”

칼의 말에 노련한 기사가 히죽 웃어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헤네켄이 어떤 나라입니까. 정보의 나라입니다.”

은제 갑옷 사이로 볼록 튀어나온 것을 천으로 둘둘 감싼 팔목이 나왔다.

“저희끼리는 연락할 방법이 다 있습니다.”

“그거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왕자님.”

기사들은 작게 웃으며 걱정이 많은 왕자 대신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욕실에 쫓아 들어온 칼이 한사코 말렸지만, 기사는 “시중을 들긴 해야죠.” 하며 소매를 걷어올렸다.

* * *

당분간 좁고 허름한 방에서 고생해야 하는 기사들을 배웅하고 방에 누웠다.

벽과 지붕만 있으면 다 똑같은 방이라고 기사들은 꾸벅 인사를 하며 나갔다.

이 방은 변한 게 없었다.

저 정체불명의 미남 조각상도 그렇고, 화려한 벽지와 천장의 무늬도 그렇고.

밖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는지 용병들의 언성이 높아지며 거친 말이 오갔다.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헤네켄이 그리웠다.

아드리안의 상처받은 얼굴과 단정한 벨프리의 얼굴도 함께 스쳐 지나갔다.

“소설 속으로 들어온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왜 아직도 나는 외부인 같고. 이방인 같고.”

소리 내어 말하니까 더 쓸쓸했다.

레아와 마르코, 그리고 엘리자벳이 없으니 이 성은 더욱 삭막했다.

몸을 둥글게 말고 베개에 코를 박으며 아드리안의 냄새를 기억에서 몰아내려고 애를 썼다.

아.

나는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구나.

레아에게 몰두해 잘해 주고 싶어서 애를 쓰고, 헤네켄에서 아드리안을 만난 후에 그와 가정을 꾸리는 것에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던 이유가 이 넓은 방에서 작게 웅크리니 명확히 떠올랐다.

나 외로웠나 봐.

“재영아.”

저 세상에도 없고, 이 세상에도 없는 유일한 혈육의 이름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리웠다.

따듯한 헤네켄성의 사람들과 섞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거기는 내 자리가 아니다.

빨리 옥새를 찾아서 레아에게 넘겨주고 어디든 가야 했다.

뭘 해 먹고 살아야 하는지도.

넓은 침대가 차가워서 이불을 한껏 모아 둥지를 틀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안 해 본 알바가 없다.

마늘 농장에서 종일 허리 한번 못 펴 본 때도 있었고 가공육 만드는 공장에서 종일 고기만 썰던 때도 있었다.

자꾸 빵 얘길 해서 다른 사람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빵 공장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다.

시급도 좋았고 냄새도 좋았고, 푹신푹신 따듯한 것을 만드는 곳이라 그런지 사람도 따듯했기 때문이었다.

거길 그만둔 건, 소방공무원에 합격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한 건 고작 반년이었지만.

살기 위해서 했던 모든 노력이 여기서도 빛을 발할지 모르겠지만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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