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38화 (38/150)

38화

하루를 소득 없이 보내고 잠을 잘 수 없었던 왕자가 결국 기사 하나를 대동하고 어두운 성내를 헤집기 시작했다.

사용인들이 거주하는 층을 지나 성내 유일하게 있는 탑을 의심하며 북쪽으로 향하던 중에 칼이 조용히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했다.

“형질이란 건 좋은 점도 있지만 진정한 사랑을 찾기엔 그다지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그의 곁을 지키던 오메가 기사가 화들짝 놀랐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깊이 사랑하는 상대가 아니어도 페로몬이 작용하면 그냥 잘 수 있잖아요. 그러다 각인하면 서로 떨어지지도 못하고.”

말하는 왕자가 어쩐지 우울해 보여 기사가 신중히 말을 골랐다.

“왕자님, 혹시 불안하십니까?”

같은 오메가로서의 직감이 왕자가 황태자와의 관계에 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정곡을 찔린 듯 어깨를 움칠 떨던 왕자가 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불안이랄 게 뭐 있습니까. 그냥. 해 본 소리예요.”

흐음, 콧소리를 내던 기사가 잠시 생각했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 왕자님은 무엇이 불안하실까.

왕자가 헤네켄으로 오게 된 경위와 황태자가 가진 배경을 생각해 보자.

기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왕자와 황태자 사이에 부족한 것은 유대감이었다.

떠밀리듯 헤네켄으로 와서 불시에 마주한 두 우성 형질자는 서로의 강한 페로몬에 끌렸으나 실제로 유대감을 쌓을 시간도 사건도 부족했을 터였다.

눈앞의 왕자님은 아마도 그런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타입인가 보다.

황태자 전하야 누구와도 이어지지 않을 거라 포기하던 찰나에 왕자님이 나타나셨으니, 끌림을 거부할 필요도 없으셨겠고.

앞서 걷는 왕자가 숨이 찬 듯 잠깐 멈추자 기사가 뒤에서 왕자의 등을 살짝 받쳤다.

“본능으로 산다는 형질자라도 마음이 오고 가는 것 정도는 분간합니다. 왕자님.”

“예?”

왕자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고 기사는 제 연인이 극찬하는 선량한 미소를 되돌려 주었다.

“저희가 말하는 페로몬의 상성이 단순히 흥분을 유발하고 말고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또 뭐가 있는데요?”

왕자가 고개를 기우뚱하는 모습에 기사가 속으로 침을 삼켰다.

오메가인 제가 봐도 왕자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팔다리가 길고 중성적인 얼굴이.

마른 몸에 점점 근육이 붙으면서 오메가나 알파나 가림 없이 홀리고 있었다.

외모뿐만이 아니다.

제2 기사단장이 극찬하는 순발력과 대범함. 어디서 쌓아 왔는지 모르는 경험에 따른 지식 수준도 상당했다.

형질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하는 고민이다.

이 사람이 내 페로몬에 ‘유혹당한’ 건 아닌지.

다만 그 고민이 20살이 넘으면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는데, 왕자님의 히트가 늦었다 보니 이제 와서 고민이 되는가 보다.

기사는 오메가 선배로서 왕자에게 어떤 조언을 해 줘야 할지를 골랐다.

“싫은 사람의 페로몬이, 아니, 그저 그런 사람의 페로몬이 황홀하게 느껴질 때도 있나요?”

왕자의 질문이 귀여워 기사는 한 발 앞서 올라가 왕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역해서 얼굴 맞대고 숨쉬기도 싫은걸요.”

왕자가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손을 잡았고 둘은 함께 계단을 올랐다.

“당연히 좋아한다는 감정이 있어야 그 향기마저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거죠. 그게 페로몬이든 그냥 체취든 간에요.”

왕자가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제 마음을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고민하며 시작한 사람들이 오래 잘 살던데. 징하게 붙어 계시다 관에도 같이 들어가실 건가 보군.’

기사가 흐뭇하게 웃었다.

* * *

헤네켄의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높다면 린드버그의 북쪽 탑은 그 반의반도 안 되는 크기라 기사는 별 어려움 없이 올랐지만, 기초체력 미달의 왕자는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황태자 전하를 감당하시려면 운동량을 늘리셔야 한다고 첨언을 하려던 기사는 전하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하고 놔두었다.

왕자의 손에 쥐어져 있던 공명석이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기사와 칼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했다.

둘은 조용히 탑의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고리를 살피던 기사가 당황하며 속삭였다.

“자물쇠가 열려 있습니다.”

“키치너가 실수로 잠그지 않은 걸까요?”

늙은 여우가 괜히 여우겠는가.

그가 자신이 죽고 나서 무덤이 도굴되는 걸 염려하여 출구가 없는 무덤을 미리 만들어 놨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다.

기사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끼이익.

문이 천천히 열리고 칼 린드버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왕자.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왕자의 눈이 휘둥그레해지고 기사는 팔목을 감싸 쥐었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니라 왕비였다.

기사는 왕비와 왕자를 번갈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자지간인 걸 숨기기 어려울 정도로 닮았다.

왕은 씹다 버린 개껌같이 생겼어도 왕비는 여전히 화사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딘가 초조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왜, 이 밤중에 여기까지 올라왔습니까.”

“어머니야말로 여기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왕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내가 먼저 물었습니다! 왕자. 타국의 기사를 대동하고 여기서 무얼 하려고 했습니까.”

웅웅 공명하는 작은 돌을 소매 안에 감추며 왕자는 자연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왕비가 문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면.

“어딜 들어가려는 겁니까?”

두 남매에게 물려준 풍성한 금발과 파란 눈은 빛 한 점 없는 탑에서도 자체 발광했다.

“확인할 것이 있어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들어가 봐도 될 것 같군요.”

왕자가 기사에게 눈짓했고 기사는 잽싸게 왕비의 입을 막고 안쪽으로 당겼다.

먼지 냄새가 풀풀 나는 작은 공간에서 왕자 소매 안에 있던 공명석이 요동을 쳤다.

“으, 으읍!”

“죄송합니다. 왕비 전하.”

눈가에 눈물이 고인 왕비가 사과하는 기사를 노려보았다.

그사이 칼은 방을 휘저으며 작은 상자를 찾아냈다.

힘주어 잡아당겨도 열리지 않는 상자를 유심히 살펴보던 왕자가 상자 측면에 쿡 박힌 마정석에 집중했다.

소생은 적자의 피로.

칼 린드버그야 적자가 맞으니, 피를 떨어뜨리란 말인가.

마정석의 윗부분이 평평하지 않고 살짝 오목한 모양인 것에 확신을 얻은 왕자가 기사의 허리춤에 매달린 단도를 빌렸다.

“왕자님!”

날카롭게 잘 벼려진 칼은 힘을 잘못 주면 아주 깊은 상처가 난다.

걱정한 기사가 왕자를 멈춰 세웠지만 칼은 거침없이 손가락 끝을 찔렀다.

“괜찮아요.”

“으읍!”

단도의 끝이 왕자의 손가락 끝에 닿자 왕비가 발작이라도 하듯 몸을 움직였다.

기사와 왕비의 힘의 차이는 너무 커서 이만큼도 벗어나질 못했지만 말이다.

칼은 손끝을 따 붉은 피가 새어 나오는 걸 확인하고 오목한 부분에 가져다 댔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보관함이 열리고 영롱한 자태의 커다란 옥새가 등장했다.

수식을 읽을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편한 일이다.

모르는 사람이 해독하려면 한참을 헤매야 하는 것을 한 줄 읽은 것만으로 원리를 알아내는 건 상당히 대단한 일이었지만, 칼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말았다.

내심 이것이 사람들을 홀리기 위한 가짜 보관함이면 어쩌나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진짜 최종’이 나타났다.

옥새가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왕자는 바로 보관함을 닫았고 미처 스며들지 못한 피를 옷으로 닦아 냈다.

“문을 막고 어머니를 놔주십시오.”

“괜찮을까요?”

“괜찮을 겁니다.”

아마도.

기사가 왕비를 놔주자마자 왕비는 보관함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칼이 그 앞을 막아섰다.

“그걸 어쩌려고 그래요!”

왕비가 외쳤고 칼은 “헤네켄에 가져갈 겁니다.” 하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왕비가 왕자의 멱살을 쥘 것처럼 가까이 다가갔다.

“왕자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아요?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네가 감히, 네가 감히.

하며 부들부들 떨던 왕비가 이어지는 왕자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주저앉았다.

“나라를 파는 게 아니라 고치려는 겁니다. 어머니야말로 왜 그러십니까?”

왕비가 확 굳어 버렸다.

“여기서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어머니는 옥새를 만지지도 못하는데.”

“나는, 그냥……. 그냥…….”

말을 더듬던 왕비가 갑자기 코를 킁킁거리고는 얼굴색을 달리했다.

엄청나게 두려운 것을 본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왕자에게 달려들었다.

기사가 그를 막아섰지만 팔을 뻗어 왕자의 옷깃을 잡아챘다.

“왕자, 설마. 황태자와!”

“저리 비키십시오!”

“너나 비켜!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

왕비의 손톱에 목덜미를 긁힌 왕자를 온몸을 보호하며 기사가 왕비의 팔을 잡아 밀쳤다.

왕비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네 몸에서 악취가 진동을 하는구나! 황태자에게 네 처음을 준 거지? 그런 거야? 이 몸이 어떤 몸인데! 그걸 그렇게 함부로 굴려!”

칼은 눈썹 하나 꼼짝 안 하고 왕비의 추태를 지켜보았다.

왕비는 비교적 정상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착각이었나.

“어린 네게 약을 먹여 가며 페로몬을 감췄는데! 그렇게 발정이 오지 못하도록 막았는데.”

이제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기 시작하는 왕비를 보며 난감한 것은 기사뿐이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을 감추다니.

보통의 약으로 할 수 없는 건데 그걸 어릴 때부터 먹였다고?

왕자의 표정을 살폈지만 왕자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