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네 처음은 그분께, 그분께 넘겨야 했는데.”
그분이 누군데.
왕비는 이제 왕자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벨벳의 우아한 드레스가 먼지로 엉망이 되는 것도 아랑곳 않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제 자신은 끝이라는 둥, 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공포와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분이 누구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추궁할 법도 한데 왕자는 가만히 있었다.
한참을 몸부림치던 왕비가 조금 잠잠해지자 그제야 왕자는 입을 열었다.
“키치너와 어머니는 도대체 무슨 관계입니까? 어머니는 무엇을 하려고 하셨습니까.”
대놓고 묻는 왕자 때문에 왕비는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이내 체념한 듯, 옥새의 위치를 옮기려고 했다고 순순히 털어놓았다.
키치너가 자리를 비웠을 때 옥새의 위치를 바꿔 놓는 것, 그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뒤늦게 맛본 영광의 맛이 지나치게 달콤했나요? 그건 진짜 당신의 것도 아닌데요.”
왕자는 차갑게 말했고 왕비는 어깨를 감싸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키치너가 어머니를 왕비로 대우해 주기는 했습니까?”
기사는 저렇게 냉기가 흐르는 왕자를 처음 보았다.
“별것도 아닌 자리 때문에 그렇게 어린아이에게 약을 먹이고, 딸을 핍박했습니까?”
“대신 네게는 전부 다 좋은 것만 해 주었잖아. 갖고 싶다는 것은 다 가지게 해 줬고. 아아, 큰일이야. 널 빼앗긴 걸 알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
기사는 왕자에게만 들리게 ‘제정신이 아니군요.’라고 말했다.
방금 전까지 도자기 인형처럼 아름다웠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추했다.
왕자는 기사에게 그녀를 기절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서서히 쓰러지는 왕비를 둘러멘 기사가 그녀를 구금하고 왕자는 옥새를 챙겨 바로 린드버그 성을 빠져나갔다.
왕비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수선을 피워도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게 씁쓸할 따름이었다.
“왕비님께서 왕자님께 약을 먹인다는 걸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기사가 물었을 때 칼 린드버그는 우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진 그렇게 의연해 놓고.
“사실 얼마 안 됐습니다.”
반년쯤 됐겠지.
칼 린드버그가 된 후 단 한 번도 개인적인 만남을 하지 않았으면서, 어쩌다 마주치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처럼 굴다가. 또 시간이 지나면 감감무소식.
그런 어머니가 주에 한 번 마르코에게 보약을 들려 보냈다.
비록 소설 속이긴 해도. 그게 독약일지 아닐지 못 알아볼 정도로 눈치 없는 자식은 아니었기 때문에 받는 족족 내다 버렸었다.
“독약도 아니었고 페로몬의 냄새를 바꾸는 용도였다고 하더라고요.”
이것도 레아에게 오메가와 알파에 대해 배우며 알았다.
〈너, 페로몬이 변했어.〉
레아는 말했다.
“예? 그런 걸 뭐 하러 합니까?”
기사가 의아하게 물었으나 칼도 그 부분은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그 가짜 보약 이후로 왕자는 키치너, 왕비, 왕의 세 관계에 주목했다.
왕은 왕비를 늘 갈망하는 표정으로 봤지만 왕비는 키치너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왕이 아파 자리보전하고 드러누울 때조차 키치너가 왕비의 방을 들락거리는 모습도 봤으니.
대외적으로 키치너와 왕비는 남매 사이였기 때문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외부인인 칼 린드버그의 눈에는 그것이 이상해 보였다.
잠깐이긴 해도 칼 린드버그가 혹시 키치너의 자식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었다.
왕비와 키치너의 관계는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지저분했다.
그녀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그녀가 사실 몸과 기술을 팔던 집시촌 출신이며, 그녀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키치너의 첩으로 팔렸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외모는 아름다웠고 우성에 가까운 오메가였지만 신체적인 결함이 있다는 그녀를 키치너는 당시 왕자였던 현 왕에게 주었다.
키치너는 왕비의 출신을 흠잡으며 계속 겁박해 왔다.
겁박보다는 가스라이팅에 더 가까워서 왕비는 자신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감각도 무뎌진 상태였다.
심지어 왕은 남자 구실을 못 하게 된 지 오래됐고 왕비의 히트 사이클은 멈추지 않았으니, 키치너가 찾을 때마다 거부할 수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마르코가 고작 굶주림에서 그를 구제했다는 이유로 칼 린드버그에게 맹목적인 충심을 바치듯, 그녀는 반복되는 히트 사이클에서 그녀를 구하는 키치너를 우상처럼 숭배했다.
구구절절 묻지도 않은 사연을 읊어 댄 그녀가 기절한 후, 불시에 빠져나가는 왕자 일행을 보고 사람들이 마법을 발동하려고 애를 썼지만 린드버그의 성에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재밌게도 발베니 대공이 린드버그에 납품해 온 마정석에 조금씩 함정을 파 두었다.
헤네켄 내부에서 생산하고 납품하는 마정석을 지닌 자가 근방에 있으면 직접적인 마력의 주입이 없인 발동되지 않았다.
린드버그에서 직접적으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왕비가 유일했는데, 그녀는 안타깝게도 심신이 미약한 상태였다.
왕자가 옥새를 들고 헤네켄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다른 기사들에게 전달하자마자 린드버그 내의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린드버그의 영주들을 구금한 헤네켄의 병사들이 일제히 성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주린 배를 먼저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처음으로 따듯한 옷을 걸쳤다.
헤네켄에서는 마지막으로 정예부대를 파병했다.
수가 많아 마법진을 타지는 못했지만 모두 기수라 하루 만에 국경을 넘었다.
피 흘림을 최소화한다는 취지에 걸맞게 임시 영주를 세우고 레아 린드버그의 입회하에 귀족들의 잘잘못을 가리는 재판을 열 예정이었다.
왕자가 성을 빠져나갈 때, 용병들과 헤네켄 기사들의 몸싸움이 한 차례 있어서 피를 보긴 했다. 용병들의 터무니없는 언행이 꼴 보기 싫었던 기사들은 이때다 싶어서 검집째로 용병들을 두들겨 팼다.
조금씩 멀어지는 성을 뒤로하고 진으로 달리기 시작할 때 왕자가 기사를 불러 세웠다.
“왕족을 구금할 때는, 어머니만큼은 관대히 대우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재판이 진행되기 전까지는 감시 외에 다른 짓은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왕자가 우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게 다 잘 끝났는데도 찝찝한 표정의 왕자를 기사가 걱정스럽게 돌아보았다.
* * *
“칼 린드버그.”
“누님.”
헤네켄의 마법진 근방에서 기다리던 레아가 칼의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키치너가 사라졌어.”
“사라졌다고요?”
“응, 키치너의 사저를 살피던 사람들이 전해 왔대. 지금 수색하고 있대.”
다른 놈은 몰라도 그놈은 꼭 잡아야 하는데, 하던 왕자가 품에서 옥새를 꺼냈다.
“누님 이거 받아 주십시오.”
“네가 직접 가지고 가지 그러니?”
“저는 달리 할 일이 좀 있어서요.”
“네가?”
이제까지 할 일을 실컷 해 놓고 무슨 할 일이 또 있다는 건지.
레아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 * *
그리고 왕자는 사라졌다.
아드리안 헤네켄 황태자의 탄신 연회 단 하루 전의 일이었다.
헤네켄 황실은 발칵 뒤집혔다.
원래대로라면 문서에 옥새를 찍은 후 린드버그로 향했어야 했던 레아는 헤네켄에 발이 묶였다.
아드리안은 온몸에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계속된 불안은 이것 때문이었구나.
한쪽에서는 키치너 재상이 사라진 것과 왕자의 행방불명을 엮어서 꿍꿍이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했지만 의심에 그쳤다.
황성에서 직접 왕자를 만난 사람들이라면 왕자가 꿍꿍이를 지니기엔 너무 순박하다는 걸 알았고 왕자는 헤네켄으로 들어온 후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납치와 같은 범죄에 연루된 것 아니냐는 건, 누나인 레아 린드버그가 “옥새를 건네주고 할 일이 있다며 말을 달려 어딘가로 사라졌다.”라고 순순히 진술하며 무마되었다.
“정말로 그가 어디로 간 건지 모르십니까.”
아드리안은 3일째 레아를 찾아왔다.
“몰라요.”
레아는 3일째 이어지는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했다.
왕자는 그날, 마법진 근처에서 한참 머뭇거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레아가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은 채 옥새를 내밀었다.
그리고 기사들에게 먼저 성으로 가라고, 하루라도 빨리 문서에 서명하고 린드버그를 정상화시켜야 한다며 재촉했다.
그리고 본인은 레아에게, 잠깐 여행을 하고 싶다 말했다.
왕자가 무슨 여행이냐고, 네가 평민인 줄 아느냐고 화를 내도 꿋꿋했다.
매일 하는 농담인 줄 알았다.
한참 말을 달리던 중 앞서 달리던 레아는 후미에 따라오는 왕자의 말이 주인도 없이 홀로 달리는 것을 발견했다.
“차라리 근방의 마을에서 사라졌다면 오히려 찾기 쉬울 텐데, 문제는 황성 근처에서 없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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