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그때를 상기하니 다시 골치가 아파진 레아가 제 이마를 두드렸다.
급하게 말에서 내려 봤지만 사람들이 몰린데다 체스판보다 복잡한 골목이 많은 탓에 찾을 수 없었다.
뒤늦게 황성에 소식이 전달되고 각 성벽에 왕자의 용모를 묘사한 초상화를 배포했다.
황태자는 탄신 연회의 중단을 알렸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예정에 없던 러트 기간이 찾아온다거나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으면 경사는 쉽게 뒤로 밀렸다.
다만 이번 일은 황태자의 짝으로 암암리 내정되어 있던 사람의 실종이어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의 무사를 빌었다.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침착한 황태자 때문에 레아는 더 미칠 지경이 됐다.
그가 왕자를 찾으면, 칼은 자유를 빼앗길지도 몰랐다.
찾을 수 없어도 문제고 찾아도 문제라 레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또 찾아뵙겠습니다.”
아드리안이 정중하게 가슴에 손을 올렸다 내리며 레아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아드리안 전하.”
어둡고 칙칙한 기운이 공허한 아드리안의 눈에 드리워져 불안했던 레아가 그를 잡아 보았지만 황태자는 지금 시점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했다.
“아, 나중에 정식으로 공표하겠지만 린드버그는 헤네켄에 합병되는 게 아니라 공국으로 독립할 예정입니다.”
레아의 눈이 둥글게 떠졌다.
“칼이, 왕자가 원했던 일이기도 하고. 헤네켄에도 우호적인 동맹국이 생기는 일이라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공주님은 공왕의 자리에 올라야 하니 마음의 준비를 해 주십시오.”
좀처럼 동요하는 법이 없는 레아의 심장이 쿵, 쿵 뛰기 시작했다.
레아가 그토록 바랐던 순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정당히 왕좌에 올라 백성을 구제하고 예전의 광영을 찾는 것.
그것이 공주로서 스물 하고도 두 해를 살아온 레아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는 것은 그녀에게 기회를 쥐여 준 동생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안은 문밖으로 나갔고, 레아는 코끝이 시리다는 것을 느꼈다.
본격적인 겨울에 진입했다.
* * *
사라진 왕자의 행방을 찾기 위해 여러 사람이 동원되었다.
거기다 황태자의 스물한 번째 탄신연이 취소되자 라시다 루루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제 입술을 쥐어뜯었다.
나타샤가 기겁하며 그녀를 말렸다.
“왜 이러세요! 입술에 피가 나잖아요.”
루루가 나타샤에게 매달렸다.
“황태자 전하께선 지금 뭘 하고 계신다니? 헨드릭 소공자는?”
“그 질문 오늘만 세 번째여요. 황태자 전하께선 연무장에 나가 계시고 소공자께서는 헨드릭 공작저에 계시겠죠.”
나타샤의 말에 루루가 펄쩍 뛰면서 안 돼, 안 돼, 하고 소리쳤다.
“오늘이 그날인데! 황태자 전하의 특별한 날인데 두 분이 함께 안 계시고 왜 떨어져 있는 거야!”
탄신연은 취소돼도 둘은 함께 있어야 하는데!
루루가 이번에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또 시작이네.
나타샤가 혀를 차며 구겨진 제 치마를 툭툭 털었다.
멀쩡한 소파를 놔두고 바닥에서 뒹구는 루루 때문에 나타샤는 하루에도 수십 번 바닥을 닦아야 했다.
“지금 황성 분위기도 뒤숭숭한데, 루루 님만이라도 가만히 계시면 안 될까요?”
평소에도 얌전한 편은 아니지만 황태자와 헨드릭 소공자의 일만 되면 유난히 나사 빠진 사람처럼 구는 통에 나타샤도 성가셨다.
“뒤숭숭할 이유가 뭔데? 칼 린드버그가 떠난 것 때문에? 내가 몇 번을 말해.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황태자 전하의 짝이 아니라니까!”
바닥을 정리하며 러그를 새로 깔던 나타샤가 멈칫했다.
그녀는 린드버그의 왕자를 좋아했다.
수려한 용모와 따듯한 말투, 그리고 존경하는 황태자 전하를 보듬을 분이라서다.
그런 왕자님을 예언자가 매일 음해하고 있다.
처음에 귀엽게 여겼던 마녀의 존재는 점점 못마땅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세요.”
정색을 하면 무섭도록 돌변하는 인상의 나타샤가 루루를 노려보자 그녀가 억울한 듯 울상이 됐다.
“진짜라고! 칼 린드버그는 악당이었고, 매번 전하가 하시는 일에 훼방만 놓는 역할이라고.”
나타샤는 바닥을 발로 쾅 짓이겼다.
“경을 칠 소리 좀 그만하세요! 왕자님이 루루 님께 뭘 어쨌다고 자꾸 그러시는 거예요?”
선을 자꾸만 넘어 버리는 루루의 말에 신경질이 난 나타샤가 결국 소리를 질렀다.
“왕자님이 언제부터 황태자 전하의 앞을 가로막았다고 그러세요? 칼 왕자님 덕에 모추 산맥의 마정석이 전부 헤네켄의 것이 된 것 모르세요?”
어깨를 움츠린 루루가 입술을 내밀었다.
퍽 사랑스러운 모습이긴 했지만 나타샤는 꼼작도 하지 않았다.
“린드버그의 폭정을 멈추는데도 그분께서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도 모르시죠?”
루루는 그래도, 그래도 하며 중얼거렸다.
“그게 전부 황태자 전하를 물어뜯으려는 수작일지 네가 어떻게 알아?”
나타샤가 콧방귀를 뀌었다.
“수작이요? 물어뜯긴다고요? 죄송하지만 마녀님이 평민이라 잘 모르는 모양인데, 물어뜯기는 건 오메가인 왕자님이지 전하가 아니에요.”
말꼬리를 잡으며 비웃는 나타샤 때문에 화가 난 루루가 끙끙거리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오늘 전하는 무조건 벨프리 공자와 함께 있어야 해. 그러면 알게 돼. 내 말이 맞아!”
싫다는 황태자 전하를 어떻게 벨프리 공자와 붙일 건지는 몰라도, 벨프리가 성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되니까 루루는 예언을 들먹일 예정이었다.
“벨프리 공자께서는 전하께 요만큼의 연정도 없으시고 황태자 전하도 마찬가지세요. 무슨 근거로 두 분이 사랑한다고 믿는 거예요?”
나타샤는 루루의 철없음을 개탄했다.
본관의 수석 시녀, 그 바로 아래였던 그녀는 황태자와 벨프리를 아주 자주 만났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그들은 주종관계를 낀 친구일 뿐이었다.
한심하다는 나타샤의 눈빛에 루루가 억울해서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놨다.
“원래부터 두 사람은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이었어! 지난달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특별한 감정이 싹틀 예정이었고. 그리고 마침내 오늘 헨드릭 소공자와…….”
말미에는 울먹이다 언성을 높인다.
“이게 다 그 망할 왕자 때문이야! 갑자기 린드버그를 구제하겠다고 나타나서 다 망쳐 버렸어! 내가 진작 떠나라고 했는데 왜 떠나고 나서도 방해하는 거야!”
루루의 말에 나타샤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이 마녀는 생각보다 더 제정신이 아니었다.
침대로 달려가 얼굴을 묻고 우는 루루를 내버려 두고 나타샤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 피곤을 다 끌어안은 것 같은 황태자가 루루의 방에 등장했다.
“아, 아드리안.”
“네가 황족인가.”
차가운 아드리안의 말투에 루루의 눈에 또 눈물이 한가득 고였다.
“아드리안 황태자 전하.”
루루가 침대에서 내려와 황태자 앞에 손을 모으고 섰다.
황태자는 그녀의 앞에 조각상처럼 서서 그저 내려다볼 뿐이었다.
오늘의 아드리안은 참 많이 낯설었다.
루루와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가끔 마주칠 때면 기본적으로 따듯했는데.
“그래, 칼에게 성을 떠나라 했다고.”
여상한 말투였지만 마치 날카로운 창처럼 루루의 가슴을 찔렀다.
“……충고가 아니라 예언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순순히 떠난다 하던가. 어디로 간다고 했지? 혹은 네가 어디로 가라고 했지?”
무슨 예언이냐 물으면 소상히 대답할 자신이 있었던 루루는 그가 전혀 관심을 주지 않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말해 봐, 혹시 칼의 여행을 네가 돕고 있지는 않아?”
아드리안의 기세에 눌린 루루가 고개를 저었다.
떠나는 게 맞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는 루루도 몰랐다.
“그럼, 됐어.”
아드리안은 미련 한 톨 없는 자세로 뒤돌았다.
루루가 급하게 뛰어와 황태자의 옷을 잡아당겼지만 아드리안은 탁, 하고 쳐 냈다.
“예언이에요, 황태자 전하. 전하의 상대는 그분이 아니에요.”
“상관없어.”
누가 보면 황태자가 루루의 목이라도 조른 줄 알았을 거다.
무감각한 황태자의 눈빛과 목소리에 충격을 받은 루루가 입을 벌리고 모자란 산소를 보충하듯 헐떡거렸다.
“왜, 왜 상관이 없어요? 전하의 진정한 사랑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데.”
나타샤는 소름이 돋아 루루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아드리안이 빙그레 웃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혹시 신인가?”
“네?”
루루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혹시 신이냐고.”
“……시, 신은 아니지만. 미래를 볼 수 있어요.”
아드리안이 허리를 굽히며 루루의 얼굴 가까이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댔다.
루루의 황금색 눈동자에 아드리안이 선명히 비쳤다.
“자, 이제 읽어 봐. 내 옆에 있는 게 누구지?”
“……베, 벨프리.”
“쯧.”
못 들을 것을 들은 사람처럼 귀를 후빈 아드리안이 다시 물었다.
“내 옆에 있는 게 누구지? 다시 봐.”
루루는 이번에 대답하지 못했다.
제멋대로인 그녀라도 다시 한번 벨프리의 이름을 거론했다간 뭔가 일을 치를 거라는 것을 알아서였다.
심지어 황태자의 한쪽 손이 허리춤에 달린 레이피어를 만지작거리고 있어서 더 그랬다.
사색이 된 루루가 눈을 질끈 감자 아드리안은 뒤로 몸을 물렸다.
“네가 이 성에 머무르는 건 네가 하는 예언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신세를 갚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루루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객으로서의 예의를 갖추고 선을 넘지 말아.”
아드리안은 문밖으로 나서다 말고 돌아섰다.
“아, 혹시 칼에 행방에 대한 예지가 나타나면 알려라. 그 외의 예언은 불허한다.”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는 루루를 나타샤는 일으켜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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