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왕자가 사라져 삭막해진 것은 아드리안의 마음 뿐만이 아니었다.
벨프리는 완전히 식음을 전폐한 빨간 머리 꼬마와 개 한 마리 앞에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왕자님이 절 버리신 걸까요?”
마르코는 허공을 보며 울음을 삼켰다.
다정하게 대해 주고 상처 난 등에 약을 발라 줬던 건, 마지막으로 베푼 호의였던 걸까.
안 그래도 나이에 비해 체구가 작은 녀석이 훌쩍훌쩍 울며 비틀거리자 결국 벨프리는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왕자님은 여행을 떠나겠다고 하셨어. 곧 돌아오실 테니 건강하게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렴.”
마르코가 도리질을 했다.
딱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엘리자벳과 함께 빈 왕자님의 방에 앉아 넋을 놓고 있노라면 그분과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왕자님은 빵집 아저씨가 되고 싶다고 하셨어요. 성이 답답하다고. 저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라고 대답하곤 했는데.”
벨프리도 한 번 듣긴 했다.
최고급의 것만 두르고 꽃처럼 자란 왕자님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늘 린드버그의 생활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에만 해도, 이 왕자가 유복한 생활에 질린 모양이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근데 그게 정말로 떠나겠다는 말이었다니.
마르코는 칼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뭐든 좋으니까 떠날 땐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마르코가 가슴을 치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엘리자벳이 어우우, 추임새를 넣었다.
벨프리만 어안이 벙벙해 넋 잃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왕자는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도 아니었고, 아무 데나 가서 빵집을 차릴 수 있는 평범한 남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미모의 오메가였고 린드버그의 왕자였으니까.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다 나왔지만 벨프리는 티 내지 않았다.
“빵집 아저씨 말고, 또 되고 싶은 게 뭐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어?”
벨프리는 자기 질문이 우스웠지만 어쩌면 그를 찾는 데 작은 실마리라도 될까 해서 물었다.
마르코는 고개를 저었다.
“수더분한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다고는 하셨는데, 본인이 오메가란 걸 아시고는 그 꿈은 접으셨어요.”
흐, 하고 벨프리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갈수록 태산이다.
남성형 오메가가 여자와 결혼하는 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에 가까웠으니까.
“잠깐만, 본인이 오메가란 걸 아셨다는 게 무슨 소리야?”
그럼 언제 아셨는데?
혼란스러운 와중에 벨프리는 문득 아드리안이 국혼 제의를 했던 무렵을 떠올렸다.
아드리안을 본인의 상대로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점이나, 오메가로서의 자각이 없는 듯한 베타 같은 행동들.
이상했었지만 그 후로 워낙 물 흐르듯 자연스레 아드리안과 밤까지 보냈기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왕자님께서는 낙마 후에 황태자 전하의 이름 빼고는 대부분의 것들을 잊어버리셨어요. 심지어 본인이 오메가인 것도 잊어버리시고.”
헤네켄에 와서, 아드리안에게 청혼 비슷한 것을 받은 후에는 충격도 받았었다고 했다.
벨프리는 그제야 마력과 형질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무지했던 왕자의 태도가 이해가 갔다.
왕자는 미쳤다가 정신을 차린 게 아니라, 아예 백지상태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벨프리는 서둘러 아드리안의 연구실로 향했다.
숨이 차는지도 모르게 달려서 도착한 곳에는 아드리안이 웬일로 정복을 갖춰 입고 앉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하! 왕자님께서는…… 어? 아버지?”
누군가는 다름 아닌 벨프리의 아버지, 헨드릭 공작이었다.
* * *
“방정맞게 뛰지 말거라, 전하가 계신 곳에 들어올 때는 문을 벌컥 열지도 말고.”
아무리 젖형제라도 그렇지 군주에 대한 경외심이 부족하다며 헨드릭이 막내아들을 나무랐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앞에서는 만년 어린아이가 되는 벨프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드리안은 신경도 안 쓴다는 얼굴을 하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는 질문을 똑같이 했다.
“왕자의 행방이라도 찾아냈나?”
그의 손에는 왕자에게 쥐여 준 것과 똑같은 모양의 마정석이 들려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겠지만 혹시 생겨서 그에게 올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불쌍해서 벨프리가 턱에 힘을 줬다.
“칼 왕자님이 기억을 아예 몽땅 잃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놀란 것은 헨드릭 공작이었다.
“기억을 잃다니?”
아드리안은 그냥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전하. 이건 중요한 문제예요. 왕자님은 본인이 오메가라는 걸 아예 모르고 계셨고, 심지어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하셨습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헨드릭이 제 아들과 황태자를 번갈아 보았지만 황태자는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고, 그게 왕자가 제 곁을 떠난 것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되물었다.
벨프리가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렸다.
이래서 형질자들이란!
“왕자님의 연애관이 베타와 똑같다고 보셔야 한다고요. 그분은 본인이 오메가라는 걸 잊은 후에 수더분한 처자와 결혼해서 평범히 사는 남자인 줄 알았다는 겁니다.”
아드리안의 눈이 그제야 홉떠졌다.
“왕자가,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하지만 그는 내, 오메가가 되어 주기로 했는데.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여자가 그의 곁을 꿰차고 있는 모습을 그리는 건,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는 그의 입술에 다른 사람이 입을 맞추다니?
구체적으로 엄습하는 상상에 아드리안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벨프리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상상 속 그 여자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 부분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왕자님은 두려우셨던 겁니다! 전하는 알파라 모를 감각이겠지만 평범한 베타 남성이 같은 남자의 아이를 낳는 것은 콧구멍에서 무를 뽑는 거랑 같은 느낌이라!”
“벨프리!”
벨프리의 비유에 헨드릭 공작이 소리쳤다.
“어디서 뭘 뽑는다고?”
아드리안의 철옹성 같은 표정이 무너졌다.
“이성을 배반한 자기 몸이 자꾸 전하를 원하는 것도 그렇고, 그 사이에 애정이 없었다는 점도요.”
“애정이 없었다니, 난.”
그 순간 아드리안은 주변의 공기가 멈추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첫 만남부터 되짚어갔다.
처음 만남은 어땠지. 칼의 기억에도 없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벨프리는 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어떠셨습니까?”
“아.”
헨드릭 공작이 뭔가 깨달은 것처럼 탄성을 질렀다. 자신의 아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헨드릭 공작은 드문 우성의 오메가로 계속 글렌 황제의 상대로 거론되어졌었다.
한때는 그가 황후가 되는 것이 너무 당연해서 아무렇지 않았던 적도 있지만 헨드릭이 마음에 들어 했던 건, 글렌의 이복동생이었던 발베니였다.
서거한 선황제는 첫 황후가 죽고 오랜 시간을 홀로 지내다가 두 번째 황후를 들였다.
두 번째 황후가 애 딸린 과부라는 점에서 한동안 헤네켄이 떠들썩했지만 그녀는 훌륭한 황후였고 선 황제와는 연인이라기보다 동료에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에 금방 사그라들었다.
발베니는 그때 황후가 데려온 자식으로, 황성을 답답해해서 일찌감치 영지를 따로 내려주고 정기적으로 들를 수 있게 했다.
글렌은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는 상대였지만 이상하게 그와 결혼한다는 생각만 하면 어딘가 허무했다.
어릴 때부터 이곳저곳을 다닌 덕에 경험이 풍부한 발베니의 옆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헨드릭에게는 가장 행복했다.
성년 이후 황태자가 된 글렌의 옆에서 그를 보좌하면서도 발베니가 황성에 들르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으니 말이다.
솔직히, 글렌이 싱글이었다면 대의를 위해서라도 헨드릭은 글렌과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남자이기 이전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하는 공작가의 장남이었고, 발베니를 애정하는 만큼 제 나라인 헤네켄을 아꼈으니까.
그러나 체념을 했을지언정 평생 발베니를 보며 가슴 아파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히트 사이클이 왔을 때도 발베니를 생각하며 울었던 그였으니…….
그래서 글렌에게 테레자가 있었던 건 헨드릭 공작에게도 천운이었다.
생각에 잠긴 헨드릭과 충격을 받은 듯 서서 멈춰 있는 아드리안을 보며 벨프리가 말했다.
“사람과 사람 간에 신뢰와 정을 쌓아야 관계가 유지된다는 걸 형질자들은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왕자님은 그 점을 마음에 걸려 했을지도 몰라요.”
신뢰와 정.
아드리안이 그것을 곱씹었다.
칼의 눈에 비친 자신은 어땠을까?
확실한 건 첫눈에 반한다는 허황된 느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가 말간 눈으로 자신을 봤을 때.
페로몬으로 압박을 줘도 동요하지 않았을 때.
아드리안은 기쁨과 희열을 느꼈다.
누군가를 두렵게 하지 않고도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벅찼다.
그가 생각보다 더 영리하고 자상하다는 걸 알아 가면서 이 사람이 내 것이라는 확신을 받고 싶었고, 때맞춰 히트 사이클이 터졌다.
그는 순순히 팔을 들어 아드리안의 목에 감았고 웃으며 키스를 했다.
거기에 정말 애정은 없었나?
그는 아닐지 몰라도 아드리안은 있었다.
“그래서.”
황태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기다려야 하나? 왕자가 인정하고 내게 돌아올 때까지. 아니면 그가 오메가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을 만날 때까지?”
그러라고 하면 벨프리의 목을 잡아챌 생각으로 이를 갈며 물었지만 벨프리는 눈을 흘겼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일단 데리고 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셔야죠.”
손도 잡고, 데이트도 하고, 근사한 곳에서 고백도 하고.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게 감정이잖아요. 고백부터 시작해 보시죠.”
하여간 형질자들이란.
페로몬을 만능 열쇠처럼 쓰는 버릇부터 고쳐야 한다고 벨프리가 중얼거렸다.
헨드릭 공작은 자신을 닮아서 건방진 아들의 고생길이 훤히 열린 건 아닌지 걱정했다.
아드리안은 여전히 말없이 다른 생각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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