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42화 (42/150)

42화

* * *

사방이 눈으로 하얗게 물들었다.

아이들이 신이 나서 뛰어다니고 동네 개들은 그런 아이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눈을 파먹었다.

“눈이 다 내리다니.”

빨간 지붕 위가 하얀 눈으로 덮인 모습은 기대 이상이라 나도 설레는 마음을 감추질 못했다.

초봄에 전우영이 칼 린드버그가 되고, 린드버그에서 헤네켄으로 넘어와 어영부영 첫 히트 사이클을 넘긴 게 가을의 끝자락, 옥새를 찾아 넘긴 시점은 초겨울이었다.

그렇게 겨울의 한가운데.

헤네켄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누가 한국형 소설 아니랄까 봐 계절도 딱 빼닮았냐.”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미세 먼지를 생략한 점은 정말 다행이다, 하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킁. 감기가 오려나.”

어깨에 걸친 망토를 여미며 땔감을 줍기 시작했다.

내가 헤네켄의 황도, 거리 한복판에서 조용히 말에서 내린 것도 벌써 한 달 전이었다.

내리자마자 망토를 뒤집어쓰고 사람들 사이를 걷고 또 걸었다.

원래 그런 식으로 도둑놈처럼 몰래 사라질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일단 황성에 가서 저번처럼 칩거를 할까 싶었다.

황태자가 찾아와도 무시하고 벨프리가 와도 무시하면서.

레아도 만나지 않고 그렇게 딱 하루의 시간만 흘려보내면 소설이 원래대로 흘러가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조금씩 황성이 가까워지고 첨탑이 눈에 훤히 들어올 때쯤이 되자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황성에 있으면서 황태자를 만나지 않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가 성안에 있으면 원작의 스토리는 아예 행방불명될지도 몰랐다.

저번처럼 서로의 향기를 탐하며 또 밤을 보내게 될지도 몰랐고, 만약 그러다 진짜 아기라도 갖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납작한 아랫배를 문질러 보았다.

여기에 아기가 들어선다고.

상상도 안 되고 무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기대도 되는 것이, 나는 오메가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 놓고는 누가 자기 행동을 봤을까 봐 주변을 살피고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웃기지도 않아.

어쨌든 황태자는 나쁘지 않은 상대니까 그렇게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 칼 린드버그는 어영부영 행복해질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남은 원작의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벨프리의 행복은?

장갑을 끼지 않은 한쪽 손이 시려 왼손에 끼워진 장갑을 다시 오른쪽에 바꿔 끼고 품 안 가득 들어찬 땔감을 추슬렀다.

“엥? 또 나무를 주워 왔소?”

반대편에서 걸어 나오던 남자가 칼을 향해 쯧, 소리를 냈다.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땔감을 주워다가 불을 피운다고.”

수염이 멋들어진 신사가 객식구를 보며 연신 혀를 찼다.

“예쁜 화목 난로가 있는데, 놀려 두기 아깝잖아요.”

내가 하는 말에 신사가 빙그레 웃었다.

“확실히 예쁘기야 하지만, 쓰고 나면 재도 치워야 하고 땔감도 날라야 하고 일이 많으니 그렇잖소.”

“제가 깨끗하게 치워 가면서 쓸게요.”

배시시 웃는 날 보며 웃음기를 거둔 신사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하다못해 시장에서 사 오면 되는 걸. 그것도 말리려면 한참 걸리지 않습니까.”

“산책도 할 겸 해서 일부러 주워 봤어요.”

이럴 때 아니면 제가 또 언제 나갑니까, 하고 말한 뒤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별채에 도착한 뒤에는 창문을 전부 열어서 안쪽의 텁텁한 공기를 빼고 나무를 엮어 한쪽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았다.

눈이 와서 바닥에 쌓아 두면 다시 습기가 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경치는 진짜 끝내준다니까.”

내가 임시로 자리 잡은 이곳은 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창밖으로 마을 아래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앙증맞은 집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장난감 같아 귀여웠다.

하루 종일 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간신히 시선을 돌리고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니까 매일매일 먼지가 쌓였다.

찬기가 훈훈한 안쪽 공기를 몰아낸 탓에 코끝이 시렸지만, 역시 청소를 할 땐 환기가 중요한 법이었다.

떠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쉽게 거주할 공간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헤네켄의 제도인 리덴은 좌우의 거리가 말로 꼬박 하루가 걸릴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것도 뒤늦게 안 사실이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라 왕래하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지.

가끔 수레를 모는 사람들을 마주치고 가게 문을 여는 사람들을 마주쳤지만 그들은 내가 왕자인지 뭔지 관심도 없었다.

정 중앙에서 서쪽으로, 골목골목을 돌다가 다리가 아파질 때쯤 한 카페를 찾았다.

금발에 예쁜 소녀가 혼자 의자를 정리하고 있길래 가서 도왔더니 얼굴을 붉히며 커피를 권했다.

거기 앉아서 우유 거품이 듬뿍 올라간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사람 구경도 하고 있으니. 내가 언제 린드버그의 왕자가 되었었는지 까마득해 질 정도였다.

아, 그건 좀 과장이지만.

한사코 거절하는 그녀에게 동전을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헤네켄 황성의 시녀들에게서 동전을 수집한 게 이렇게 쓸모가 있는 일이었다니, 하고 뿌듯해했다.

물론 강탈한 건 아니었고, 어린애가 부모님의 심부름을 하듯이 그녀들의 잡일을 돕다가 한 개씩 받아 둔 것이다.

〈왕자님께서 이런 일을 하시면 안 되요!〉

〈뭐가 안 됩니까? 나는 하는 일도 없이 뒹굴거리는 게 일인데.〉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에요!〉

그녀들은 참새처럼 짹짹 소리를 질렀다.

〈그럼 일을 도울 때마다 가장 작은 단위의 화폐 하나씩만 주세요.〉

그녀들은 농담도 지나치다며 웃다가 진지한 내 표정에 주머니를 열었다.

그땐 단순히 일을 돕지 못하게 하는 게 싫어 그런 건데.

하루 이틀 지나니까 시녀들은 자연스레 내게 동전을 주었다. 소문이 났는지 기사들도 만나기만 하면 ‘동전을 모으신다고요?’ 하며 웃고 그랬다.

카페에서 만난 소녀에게 물건을 맡기고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곳이 있냐 물었다.

그녀는 두 집 건너에 있는 전당포로 직접 안내해 주었다.

전당포 주인은 에메랄드를 맡기는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훑었다.

〈이런 고급품을 어디서 났소?〉

〈삼촌이 발베니 상단에서 일을 하십니다. 린드버그에서 물건값 대신 받은 걸 제게 주셨고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린드버그에서 가끔 어음과 더불어 귀금속류를 교환하긴 했으니까.

게다가 발베니 상단은 규모가 커서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전당포 주인은 대번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증서에 서명을 하라며 내밀었다.

나는 고민하다 ‘카르텐 비어’라고 썼다.

다른 건 아니고 예전에 자주 가던 맥줏집 이름이라 그냥 썼다.

칼 린드버그나, 카르텐 비어나.

〈비어? 비어가의 자제분이시오?〉

비어가가 뭔데, 유명한 집이냐. 그럼 곤란한데.

〈그건 아닌데요.〉

〈아아, 난 또. 비어 남작가와 관련이 있는 줄 알고. 그분들이 요 일대 밀밭은 꽉 쥐고 계시지 않소.〉

어색하게 웃었다.

여기서 자리를 잡는 건 피해야겠다.

전당포 주인이 꽤 많은 양의 종이를 가져왔다.

나는 왕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나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동전 이외의 화폐를 처음 본 것이다.

린드버그에서는 돈을 쓸 일이 없었고, 어쩌다가 사치품을 거래할 때조차 어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봤지 실제로 화폐를 거래한 건 처음이었다.

헤네켄에서는 놀랍게도 가벼운 동전과 종이 화폐를 사용했다.

공장에서 찍어 내는 정갈한 화폐는 아니었다.

다만 솜씨 좋은 기술자 수백 명이 매일매일 정교하게 그려 내는 화폐였다.

화폐에는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특별한 도장을 찍는다고 들었다.

전당포 주인은 단위가 큰돈이다 보니 웬만한 가게에서는 쓸 일이 없다고 하며 작은 단위의 동전도 몇 개 바꿔 주었다.

나는 그 돈으로 마차를 두 번 정도 갈아탄 뒤 지금 이 마을에 도착했다.

앞으로는 커다란 호수,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있고 인구 밀도는 적당히 높은 이곳에 사는 언덕 위의 노신사가, 아내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이 도심으로 독립하면서 혼자가 됐다는 소리를 들었다.

염치 불고하고 그 댁에 들어가 지낼 곳을 물으니 그는 순순히 아들이 살던 별채를 내주었다.

내가 내민 돈을 보고는 잠깐 놀라는 눈치였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이 언덕 위의 집에서 또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했다.

린드버그와 헤네켄은 쓰는 말도 똑같고 생김새도 비슷해서 딱히 외국인이라는 티도 나지 않았다.

외지긴 해도 같은 제도 안이라 그런가?

저기 어느 지방에서 올라왔다고 하니까 별로 신기해하지도 않았다.

가끔 요만한 애들이 올라와 들여다보고 가는 것 빼고는 여러모로 정착하기 좋은 동네였다.

나는 가끔 베이킹 재료를 사러 갈 때 빼고는 마을 중심부로 나가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어서였다.

매일 아침 마당을 쓸고, 집을 정리하고, 화덕에 불을 지펴 빵을 굽다 보면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오래 지난 일도 아니었고, 그렇게 오래 함께 지낸 것도 아닌데.

손톱 아래 거스러미처럼 마음을 긁었다.

황성은 난리가 났을까?

아무리 그래도 왕자가 없어졌으니 다들 놀라기도 하고 걱정도 하겠지?

마르코와 엘리자벳은 어쩌고 있을까.

레아는? 동생이 이제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벨프리는 오메가가 됐을까?

아드리안은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사라져 버린 왕자에게 정이 떨어졌겠지?

벨프리와 원작대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으려나.

무책임하다고 욕을 하며 다신 안 보겠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노릇이다.

방 안이 완전히 차가워졌다.

창을 닫고 마른 장작을 모아 난로에 던졌다.

이런 것 없이도 집 안에 비치된 〈타오르는 장작〉이 열심히 방을 훈훈하게 데워 주겠지만.

칙, 성냥 타는 냄새가 잠깐 머물렀다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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