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일일이 국제 사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폐하.”
외무대신을 겸하는 헨드릭이 황제를 연거푸 불렀으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원래도 테레자 외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는 법이 없는 황제이긴 했지만, 이건 잘못하다간 헤네켄이 국가 분쟁의 중심에 서게 될지도 모르는 일었다.
“헤네켄 제국의 국력은 대륙 최고이지, 넘치는 마력과 발달한 마정석 가공 기술. 그 외에도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곳에서 정점을 찍고 있지.”
레아 린드버그는 순간 주제도 잊고 글렌 황제가 부러워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한 번쯤 말해 보고 싶었다.
린드버그가 최고라고.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군주, 주변을 돌아봐도 누구 하나 껄끄러운 표정을 짓지 않으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충신들.
모든 게 부러웠다.
“그런 우리가 군사력이라고 다를까?”
레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글렌이 일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부분은 우리 군사력의 정점인 버번 백작께서 한번 말해 보시오. 우리가 약합니까?”
버번 백작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글렌을 따라 웃었다.
“이 대륙을 다 통솔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폐하.”
글렌이 ‘들었지?’ 하는 얼굴로 레아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우리가 잠잠히 있는 이유는, 힘으로 얻은 광영이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치 않아서야. 누구의 눈치를 봐서가 아니라네. 게다가 그대도, 그대의 동생도 필요 없는 싸움을 원치 않기 때문에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하지 않았는가?”
그제야 사람들이 글렌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꼭 해야 할 싸움이라면 피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반드시 이기고야 말 것이고.”
레아는 홀린 듯 글렌을 바라봤다.
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렌에게서는 압도적인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강한 마력을 지닌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 배움과 경험이 합쳐져 생긴 지혜.
더불어 불혹이 한참 지난 나이에도 매력적인 외모까지 더해지니 더욱 그를 알파의 장점만 모두 모아놓은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레아는 결국 반쯤 눈을 내리깔고 작게 웃었다.
“게다가 우리는 이제 남이 아니지.”
글렌은 그녀 대신 아드리안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아드리안은 아까부터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칼 린드버그의 페로몬이 담긴 구슬과 정체불명의 마정석을 손장난을 하듯 쥐었다가 코에 가져 댔다가 했다. 그러더니 마치 그리운 것을 떠올리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어릴 때부터 아드리안에게는 절제와 인내만 강요되었다.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 사이에서 태어나 극우성의 성질을 띠고 있는 페로몬 탓에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하는 법만 배우고 살았다.
누구건 그의 곁을 차지하려면 비등하게 강해야만 했다.
그런데 때마침 린드버그의 왕자가 제발로 찾아왔다.
아드리안이 양껏 페로몬을 발산해도 짓눌리지 않을 우성의 오메가가 말이다.
“우린 이제 가족이 될 사이잖나.”
레아의 얼굴이 웃던 그대로 새하얗게 탈색됐다.
글렌은 그것을 못 본 척했다.
“나는 칼 린드버그, 그 청년이 무척 마음에 들어.”
유약한 인상이었지만 글렌은 왕자의 내면에 물렁살만 찬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단 일주일 만에 성의 사용인들이 전부 왕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글렌도 들어 알았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왕자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왕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무언갈 같이 해 나가며 왕자는 그들의 삶에 조금씩 침투하는 중이었다.
좀 독특한 구석도 있긴 하다만.
글렌은 그 청년에게 물과 비료를 듬뿍 주어 강한 바람에 누울지언정 뿌리 뽑히지 않는 질경이로 키우고 싶었다.
흔히 꽃에 비유되곤 하는 오메가는 글렌이 바라는 황후의 상은 아니었다.
예전의 칼 린드버그가 꽃이었다면 지금의 칼 린드버그는 잡초에 가까웠다.
거칠고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면서도 자아를 잃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잡초.
린드버그에서의 왕자는 그다지 척박하게 살지 않았으니 그를 그렇게 만든 이유는 따로 있겠지.
그게 무엇일지 궁금했다.
헤네켄의 황실은 귀족적인 것을 원하지 않는다.
군림하는 제왕은 이제 필요치 않았다.
어쩔 수 없는 힘의 차이로 아드리안이 군림해야 한다면 칼 린드버그는 그 옆에서 포용하며 균형을 맞춰야만 했다.
그런 면에서 칼 린드버그는 아드리안에게 필요한 배우자였다.
게다가, 아들에게는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걸 들이밀 수 있는 상대이지 않나.
왕자의 페로몬에 섞인 마력은 희미하지만 점점 제자리를 잡고 있었다.
글렌이 작게 동요하며 눈을 깜빡이는 아들을 보았다.
“모자란 부분은 달리 채우면 되는 걸 감안하고 보건대 차기 황훗감으로 손색이 없다 생각되네.”
제후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제도에 거주하는 버번 백작과 헨드릭 공작, 그리고 평민에서 귀족으로 신분 상승을 해 특별히 참여하게 된 토마스를 제외하고, 주요 지방 소도시의 열 영주가 자리한 자리에서 황제는 물릴 수 없는 말을 했다.
“가족이 되면 린드버그의 모든 문제는 이제 헤네켄의 문제가 되기도 하지.”
모두 이것이 황제의 공표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모두가 황태자가 아닌 레아 공주의 낯빛을 살폈다.
원래도 하얀 그녀는 더 할 수 없게 질려 있었다.
황제는 그녀에게 은근한 압박을 넣고 있는 것이다.
다른 건 다 헤네켄에서 알아서 할 테니 왕자를 찾아내라고.
“하지만 왕자님은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는데요.”
아이고 아들아.
헨드릭 공작이 이마를 짚었다.
이 아이가 눈치가 없진 않았는데, 페로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며 황실의 일이라면 대쪽 같아지는 벨프리는 ‘국혼도 아직인데 우리 폐하가 너무 후한 거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
아드리안의 주변이 다시 어두 컴컴해졌다.
글렌이 벨프리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는 곧 돌아오게 되어 있어. 알파의 집념을 우습게 보지 말려무나.”
알파의 집념.
아드리안의 눈이 일순 샛노란빛을 띠었다.
글렌은 그제야 만족스레 웃었다.
그래, 저래 봬도 황성 안에서 떠받들어지며 살았으니. 거부당하는 게 어디 익숙하겠냐마는.
한 번쯤은 괜찮다.
테레자도 글렌을 한 번은 거부했었다.
그것도 못 잡을 것 같으면 알파 딱지를 떼야지, 암.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먼저 떠나는 무례를 용서하시길, 잠시 근방을 순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 그래. 가라.”
아드리안은 시종도 대동하지 않은 채로 날 듯 회장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벨프리가 입을 다물었고 레아의 얼굴은 제 색을 찾았다.
이 자리의 유일한 오메가인 헨드릭 공작만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문질렀다.
“제발 부탁이니까 회의 정도는 알파인 것 티 내지 말고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짝도 있으신 분들이, 뭐하러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내십니까.
구시렁거리는 헨드릭이 벨프리와 비슷해서 레아는 과연 그 아비에, 그 아들이구나 했다.
글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황후가 보고 싶어져서 이만 들어가 보겠네.”
아까부터 저놈 하는 짓을 보니 나도 저렇게 불타오를 때가 있었는데 싶어.
글렌이 웃으며 하는 말에 헨드릭 공작이 “이 이상 불타면 황성이 전부 잿더미가 될 지경이니 관두십시오.” 하고 톡 쏘아붙였다.
글렌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자자, 머리도 너무 쓰면 닳는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폐하!”
헨드릭 공작의 외침은 쿵 닫히는 문소리에 묻혔다.
* * *
아드리안은 회의장을 나온 그대로 성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아버지 말이 맞았다.
여기 앉아서 언제 오냐, 찾아라 어째라 하는 것은 성미에도 안 찼고 좋은 방법도 아니었다.
아드리안이 성안에 머물며 명령만 내리고 있었던 건 그가 황태자여서였다.
순백의 거대한 말이 재갈을 더듬는 황태자의 손길에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은근한 아버지의 허락을 등에 업고 아드리안은 칼을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성벽을 통과하려면 신분 패가 있어야만 했다.
위조하는 것도 쉽지 않고 위조된 신분 패를 못 알아볼 멍청이들은 제도 경비병 중에 없었다.
게다가 이미 왕자의 용모가 전 망루에 다 퍼졌다.
칼은 성벽을 넘을 수 없었다.
직접적으로 마력을 방출하여 마법을 쓰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다.
아니, 설사 그가 성벽을 넘었더라도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첨탑 끄트머리까지 솟구친 아드리안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서쪽으로 고삐를 틀었다.
그가 무엇을 숨기든지, 찾아서 물어볼 거다.
왜 떠났냐고. 떠나서 뭘 어찌하고 싶었느냐고.
그가 원하는 게 자신을 떠나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해 주며 붙잡아 볼 요량이다.
칼 린드버그 또한 아드리안 없이 살기 어려운 우성 오메가의 몸이다.
마정석으로 다스리는 것도 한계가 있는 데다, 첫 히트 사이클에 아드리안의 페로몬을 흠뻑 뒤집어쓴 몸이었다.
그게 흐려지기 시작할 때쯤에는 칼도 아드리안을 찾을 거라 믿고 싶었다.
아드리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자신도 사랑은 처음이라 잘 몰랐지만 단 몇 번의 만남으로 매료당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다, 잃고 난 후의 커다란 상실감을 사랑이 아닌 다른 단어로 정의하는 법은 더욱 모르겠다.
칼이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더라도, 체념해주었으면.
아니, 우리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사랑할 수 있으면 더없이 좋을 텐데.
아드리안을 태운 말이 서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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