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알파 황태자가 날 너무 좋아함-45화 (45/150)

45화

* * *

……빛나는 것은 오직 그의 눈동자뿐이었다. 벨프리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에서 그것을 움켜쥐려고 손을 허우적댔다. 곧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그의 손가락을 잡아챘다. 아, 하고 벨프리가 탄식하자 누군가 낮게 웃으며 손가락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네가 마침내 내 것이 되었구나.” 곧 목덜미에도 무수히 많은 입술이 내려앉았다. “좋은 냄새.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너는 모르겠지.” 눈꼬리에 눈물을 달고 벨프리는 웃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아드리안 전하.”

“허억.”

어렴풋이 동이 틀 때쯤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었다.

하다 하다 이제 읽지도 않은 소설의 내용이 꿈으로 나타나는구나.

어이가 없어서, 진짜.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머리를 감싸고 침대에 앉아 있다 비척대며 내려와서 밖으로 나갔다.

“읏, 추워.”

일부러 밖에 놓아두었던 나무 그릇에 꽝꽝 언 얼음이 담겼다.

거기에 화롯가에 올려 둔 따듯한 물을 콸콸 부어 세수를 했다.

그제야 정신이 바짝 들었다.

“밖이 이렇게 추운데 방 안은 한여름이라니. 마정석도 못 쓰겠구먼.”

괜히 툴툴거려 보았다.

한겨울에 이만큼 따듯하게 있을 수 있는 건 무척 축복받은 일이었지만 해도 해도 너무했다.

원래도 몸에 열이 많아 전기장판을 틀고서는 잠을 못 잤었다.

칼 린드버그가 된 후에는 마르고 비실대는 체력 때문인지 더위보다 추위를 훨씬 많이 타긴 했지만, 그런 몸으로도 견디기 힘들 만큼 〈타오르는 장작〉의 효과는 컸다.

건너다보면 집집마다 창을 조금씩 열어 두었다.

그 사이로 연신 찬 공기가 들락거리며 뽀얀 김을 만들어 냈다.

이게 마법이 아니라 전기였으면 에너지 효율이 터무니없이 나빴을 것이다.

달아오른 몸을 찬기로 식히고 다시 돌아왔다.

화목 난로가 꺼진 지 오래인데도 불구하고 집 안이 찜질방처럼 후끈했다.

〈타오르는 장작〉은 집 안 사방 귀퉁이에 놓여 있었다.

마법진처럼 각을 맞춰야 효과를 발휘하는 녀석이라 방마다 최소 네 개씩은 구비해 둔다고 했다.

뭣 모르고 두 개만 사 갔던 아가씨가 두 개를 더 사러 오는 걸 본 날도 있었다.

흐음.

어쩐지 마정석의 맹점을 알게 된 기분이다.

여기에 〈타오르는 장작〉 말고, 〈가을의 바람〉이나 〈초봄의 공기〉 같은 걸 새기면 어땠을까?

집을 찜통으로 해 두고 창을 열어 웃풍을 다 맞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거기에다 마정석마다 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한 필요 충분 요건이 다르니 마정석만 덜렁 판매하기보다는 요만한 상자에 염색한 종이를 깔아서, 사용 설명서 같은 걸 동봉해 보는 거다.

이왕 평민들이 사용하기 편한 마정석을 공급한다면, 그 정도는 해 줘도 되지 않나?

생각하다가 픽 웃었다.

내가 직접 수식을 입력하는 것도 아니고, 기전도 모르는데.

어설프게 실험하려 하다가 망한 과학 실험처럼 폭발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게다가 누구에게 건의를 하면 들어 주기나 하나?

순간 단 한 사람.

건의를 하면 들어줄 수 있는 사람.

마법도, 마정석도 잘 다루는 한 사람이 떠올랐지만 애써 밀어냈다.

나는 그에게 더 이상 부탁 같은 건 하면 안 되는 처지였으니까.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바람이 집 안까지 침범하려 하기에 덧창을 비스듬히 내리고 창문은 손가락 한 마디만큼 열었다.

다시 침대에 앉아서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이놈의 원작. 시작하기는 한 건지 궁금했다.

그때 예언자에게 좀 더 물어볼 것을 그랬다.

벨프리가 오메가가 되는 시점이 원작 초입인지, 중반인지, 혹은 결말 무렵인지.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으로는, 재영이가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 칼 린드버그가 죽었다는 것이다.

왕비가 페로몬 향을 바꾸는 약을 꾸준히 먹였으니 지금의 나보다 더 늦게 히트 사이클이 왔을 거고, 혹은 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까, 아드리안과 벨프리가 사랑을 하는 동안 칼 린드버그는 아드리안을 가질 수 없음에 실망해서 아드리안의 신경을 자꾸 건들다 사망. 정도의 스토리가 될 것 같다.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뭐냐면. 칼 린드버그가 패악을 떨 수 있는 것도 어디까지나 린드버그 왕성 안에서였다.

마음대로 성 안팎을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주제에 언제 아드리안을 만나서 어떻게 그를 괴롭혔겠냐고.

키치너가 퍽이나 그걸 놔뒀겠다.

아니면, 뭔가 접점이 있을 때 페로몬으로 아드리안을 유혹하려고 했나?

생각해 봐야 미궁이다.

재영이가 노래를 불렀던 꽁냥꽁냥이 어쨌든 벨프리와 아드리안의 일인 게 중요하지.

벨프리의 히트 사이클이 오면 아드리안은 내 꿈속에서처럼 그를 안겠지.

자꾸만 시무룩해지려는 마음을 달래려 방을 걷고 또 걸었다.

히트 사이클을 생각하니까 또 그날 밤이 떠올랐다.

격정적이고, 열렬하게.

세상 만물은 보이지 않아도 내 눈앞의 한 사람에게 목이 말라 매달리던 그때.

내가 나 같지 않아 두려운 건 여전했지만 동시에 그 사람의 체온이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곰곰이 돌이켜 생각해 보니.

육욕뿐만 아니라 뭔가 구멍 나 있던 가슴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내 가슴의 구멍은 작지만 깊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주 왕래한 적 없는, 그래서 남이나 마찬가지인 친척들에게 어쩔 수 없이 재영이를 맡겼다.

그리고 우는 재영이를 한 번 돌아볼 여유도 없이 달렸던 날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결핍된 청춘이, 가슴에 조금씩 생채기를 내다 못해 뻥 뚫 어버렸다.

어쨌든 소설 속으로 들어와서 좋은 점은 많았다.

꿈을 꿀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상상하고,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좋은 사람들에게 꿈을 나누고 또 조언을 듣는 것.

반은 계약 때문이긴 해도 의지할 사람이 있었다는 것.

누군가 나를 적극적으로 돕는다는 것.

그런 사람이 날 간절히 원했다는 거.

“주책이야 뭐야.”

눈물이 나려고 했다.

감추려고 이불을 뒤집어썼다가 숨이 막혀 걷어 내면서 마정석 하나를 제거할까 생각했다.

아니지, 잘못했다간 변사체로 발견될지도 몰랐다.

결국 창을 좀 더 열고 꾸물꾸물 이불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눈이 오면 마룻바닥에 얼룩이 지겠지만. 집주인은 그런 걸 따지는 깐깐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라는 거냐고.”

톡 까놓고 말해. 아드리안이 날 원한다고 했을 때 남자라서 싫었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남자라서 싫다기보다는 한 몸에 본능이 두 개라서 그랬다.

오메가로서의 본능은 그를 원한다 외치고 있는데 스물일곱 군필 전우영은 그에게 안기고 나면 남자로서 중요한 뭔가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게다가 그의 옆자리가 주는 무게감까지 장난 아니고.

하여간 부담이 컸다.

그리고 나 때문에 망해 버린 원작은, 이렇게라도 수습할 수 있으면 다행인데.

아, 잠깐.

“만약에, 벨프리가 오메가가 안 되면 아드리안은 어떻게 되는 거지?”

미치겠다. 이 생각을 왜 지금 했을까.

혹시 내가 헤네켄에 도움을 청했을 무렵에 이미 원작은 망해 버렸고, 그 인과관계로 벨프리가 오메가가 안 된다면, 아드리안은 평생 독수공방해야 되는 건가?

그, 괴로운 발정기와 싸우면서?

그거야말로 진짜 큰일이다.

원작도 모르는 내가 어설프게 건드는 바람에 죽을 때까지 짝을 못 찾으면 어떡하지?

내가 사라지고 짝도 잃은 그가 분노해서 갑자기 린드버그를 지도에서 없애버리려 할지도 모르겠다.

“아아아.”

어쩌지, 지금이라도 황성 근처로 가서 5분 대기조처럼, ‘벨프리가 오메가가 안 됐으면 내가 대신할게’ 하면서 기다려야 하나?

아, 그건 좀 자존심 상한다.

아니, 자존심이 문제야?

아드리안이 날 어떻게 도왔는데.

덕분에 레아는 그 끔찍한 부모 밑에서 탈출했고 칼 린드버그도 죽는 엔딩은 피했잖아.

그가 대가로 요구한 건 바로 나였지.

우성 오메가인 나.

똑똑.

누군가 노크를 했다.

내가 머리 싸매고 혼자 드라마를 찍어 대는 동안에 해가 벌써 이만큼이나 올라왔다.

똑똑.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혹시 집주인 어르신인가?

이 시간이면 주무시고 계실 텐데.

노인이 아침잠이 없다는 건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닌 듯, 집주인은 밤늦게까지 카드놀이를 하다 잠들고 점심께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저, 아랫마을의 말레입니다.”

아, 우유를 파는 청년이다.

반가운 마음에 벌컥 문을 열었더니 곰같이 순박한 청년이 들통 한가득 담긴 우유를 들고 서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집까지 다 찾아오시고. 일단 들어오시죠.”

청년은 내 권유에도 쉽게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냥, 저기. 원래 제일 먼저 우유를 사러 오셨잖아요. 근데 오늘은 해가 중천에 떠도 오질 않으셔서…….”

말꼬리를 흐리며 제 머리를 긁었다.

벌써 시간이 그만큼 지났단 말이냐. 아이고.

“죄송해요. 저기. 오늘 좀 늦잠을 자서.”

하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더니 총각이 따라 웃는다.

“걱정이 되어서 와 봤습니다. 혹시 어디 아프시진 않은지.”

“그런 건 아닙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괜찮은데…….”

“이렇게 와 주셨는데 빈손으로 내려가게 할 순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 그렇다면.

청년이 우유 통을 내려놓았다.

마룻바닥이 꺼질 것처럼 쿵 소리가 났다.

저 우유 통이 한 20리터쯤 되는데, 통 무게까지 합치면 꽤 묵직했다.

저걸 들고 이 언덕을 오르는 건 내 기준에 중노동이었다. 심지어 눈까지 쌓였으니 중노동이 아니라 극기 훈련이다.

“이왕 시간 내 주셨으니 실력 발휘 좀 해 보려고요.”

소매를 걷어붙이자 말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양 뺨을 아주 희미하게 붉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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