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서쪽으로 말을 달리던 아드리안이 제가 쥐고 있던 마정석이 희미하게 빛난다는 걸 눈치챈 것은 황성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얇은 셔츠에 망토 하나 두른 차림으로 눈발 사이를 헤치면서도 추운 줄 모르고 내달릴 때, 아드리안의 마정석이 웅웅 기묘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의 얼굴이 눈발보다 더 새하얗게 질렸다.
마정석은 보석과 결이 비슷하나 보석 외의 마정석으로 달리 구별하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흙과 물, 동물의 사체과 열과 반응하며 만들어지는 보석은 아름답긴 하지만 다른 화학 유기물이 많이 섞여 있어 마력을 담기 어려웠다.
하지만 마정석은 신의 부산물이라 불리는 마물의 시체와 독특한 토양, 아주 깨끗한 물. 이렇게 세 가지의 조건이 맞아야 생겨났는데, 아주 소량의 마력이 담기면 거기에 새겨 놓은 수식을 그대로 반영하여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같은 종류의 마정석들은 서로 공명했다.
그 점에 착안해 다양한 효과를 내는 마도구를 만드는 것이 마법사가 주로 하는 일이었다.
칼 린드버그에게 준 마도구는 주인의 신체가 위기에 빠졌을 때 아드리안이 지니고 있는 마정석과 공명한다.
심장이 뛰거나 체온이 올라갈 때, 그 정도가 아드리안이 설정한 정상 범주 이상을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강하게 공명했다.
이 정도로 소리를 내며 떨릴 정도라는 건 신체적으로 대대적인 변화가 있을 때 정도였다.
극한의 공포를 느끼거나, 실제로 상해를 입었을 때.
아드리안의 심장이 공명하는 마도구만큼 뛰기 시작했다.
칼이 자신이 준 마도구를 어디 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그의 불행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아드리안이 곁에 없어 그를 지켜 주지도 못하는 이때에.
걱정과 분노로 달아오르는 아드리안의 몸에서 뜨거운 열이 찬 공기와 만나 김으로 뿜어져 나왔다.
칼은 그가 오메가라서, 아드리안이 알파라서, 그리고 애정 없는 결혼을 할 수 없어서 도망쳤지만, 그가 무서워하더라도 알파임을 숨길 순 없었다.
칼 린드버그가 오메가여서 좋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칼 린드버그가 오메가가 아니게 된다 해도 마음이 향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는 것도 확신했다.
단 한 달이었지만 충분히 괴로웠다.
어느 날 불쑥 자신을 찾아 칼이 왔던 것처럼 돌연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더 끔찍하게 싫었다.
만나면 결코 그를 탓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불안이 형질에서 온 거라면,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하고 충분히 설득한 후 완전히 제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려 볼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설득도 설명도 필요 없는 곳으로 가 버리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공포였다.
고삐를 쥔 아드리안의 손등에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전속력으로 나는 말은 숨이 차는 듯 연신 투레질을 했다.
아드리안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달래고 재갈에 붙어 있는 마정석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히이잉.
말이 크게 울부짖으며 쏜살같이 내달렸다.
서쪽의 비옥한 땅.
고작 평민 귀족인 토마스에게 그 땅을 준 것은 그곳이 평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땅이었기 때문이었다.
헤네켄의 귀족들은 소작을 하지 않았다.
모든 땅은 개인의 것이었고 제국법 테두리 안에서 자유로이 거래하며 소작을 놓았다.
영주는 영지를 지키는 성루이며 재판관, 그리고 국지적 마법사의 역할을 하며 그 대가로 존경과 세금을 받아 갔다.
자식 없이 생을 마감한 전 영주가 사망한 후 영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글렌 황제는 그것을 황태자에게 첫 과제로 내주었다.
몇 안 되는 평민 알파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내던 토마스 자작은 원래 제1 기사단의 기사였다.
그의 아비는 꽤 명망 있는 평민 제도 학교의 선생이었으며, 고향도 서쪽에 있어 아드리안은 그를 선택했다.
당시엔 꽤 파격적인 인사였다.
귀족 제후들 중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 형질자가 모두 사라진 세상을 위해 미리 대비해 두어야 한다는 아드리안의 말에는 모두 숙연히 경의를 표했다.
형질자가 사라진 세상.
그것은 마법의 소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매장된 마정석의 양도 한계가 있었고 알파와 오메가의 비율은 줄어들었으며 반대로 베타의 수는 늘어만 갔다.
글렌 황제의 최대 과업은, 어떻게 형질자를 유지하는 것인가가 아닌, 줄어드는 형질자. 그 이후의 삶은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였다.
아드리안은 그런 아버지의 속내를 금방 파악했고 나름의 혜안을 낸 것이었다.
토마스는 괜찮은 영주였다.
성품은 온화했고 공정했다.
알파이면서 동시에 평민이었기 때문에 평민의 노고를 금방 알아채고 적절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곤 했다.
평생 귀족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것들.
많은 제도의 평민들이 은퇴 후를 위해 이주하고 이제야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그곳에 문제가 있다면…….
‘베타의 비율이 높아, 많은 오메가가 이곳을 거쳐 도망을 시도했다고.’
아드리안은 침을 꼴깍 삼켰다.
저만치 성벽이 보였다.
망루에서 서성거리던 경비병들은 일렬로 정렬해 황태자에게 경례를 붙였다.
아드리안은 자신의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여기 어딘가에 칼이 있다.
당장 내려서 이주민의 명부를 뒤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무른 방법으로는 지금 위기에 처한 칼을 찾을 수 없었다.
영주인 토마스 자작은 아직 황성에 있다.
그 대신 업무를 보고 있던 부관이 급하게 뛰어나왔지만 아드리안은 눈길도 주지 않고 마정석의 공명이 커지는 쪽으로 향했다.
언덕 위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통나무 집 두 채. 내려온 이 없이 한 사람이 올라간 흔적은 미처 감춰지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칼의 향기가 진동했다.
수도 없이 맡고 각인한 향이라 잊을 수 없었다.
헨드릭 공작은 오메가가 알파를 피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품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 말했다.
먹고 먹히는 관계와 닮았다고.
우성 오메가로 나고 자라 글렌 하나만 보고 살았던 테레자도 혼인 직전 한 번은 도망쳤다고 하니.
그 무형의 공포는 오메가들만 알 수 있는 거라 탓하거나 채근하지 말라 조언했다.
아드리안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드리안은 칼 린드버그에게 상처 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게 마음이든 몸이든.
“……!”
작은 별채에서 칼이 무언가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은 그 언젠가 린드버그 성에 난입했던 것처럼, 안장 위에서 뛰어내려 닫힌 문을 걷어찼다.
* * *
칼 린드버그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분기탱천한 모양새의 아드리안이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환영인가?
꿈의 연장인가?
원작이 진행되는 바람에 갑자기 원작대로 칼 린드버그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와중에도 저를 구하러 왔다거나 찾으러 왔다는 생각은 못 했다.
페로몬으로 사람을 질식시킬 기세로 칼 린드버그를 노려보며 이를 뿌득 갈았기 때문이었다.
“여긴 어떻게…….”
황망한 표정으로 칼이 묻자 아드리안은 “당신을 구하러 왔는데.”라고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만 붙어 있어라, 나머지는 다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 설득을 하겠다, 어쩌고 했던 게 무색하게 아드리안의 머리는 질투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칼이 웬 덩치가 산만한 남자를 깔아뭉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온몸을 벌벌 떨며 숫제 침을 흘릴 것처럼 두려워하고 있었고, 칼 린드버그의 홍채는 새빨갛게 물들었다는 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지금 아드리안의 시야는 좁았다.
사랑이 사람을 이토록 바보처럼 만들 수 있다는 건 몰랐다.
아비인 글렌 황제가 테레자의 손짓 하나에 일희일비할 때마다 팔불출이라고 생각했는데.
요동치는 마음을 숨길 방법이 없어 씩씩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버선발로 달려와서 반길 필욘 없었지만 저렇게 말간 눈으로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물을 필요는 없지 않나?
게다가 왜 시선을 피하는 거야?
내게 널 주기로 해 놓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은 너였잖아.
조금씩 싹을 틔우려던 마음을 당치도 않다는 듯 밟아 버린 건 너였잖아.
그의 표정, 말, 행동 전부가 아드리안에게 상처가 되었다.
이것도 소유욕일 뿐인가.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았다.
왜 날 봐 주지 않느냐고 발을 쾅쾅 구르고 싶은 충동은 아직도 아드리안이 어린 탓인가.
노련하고 강인한 알파는 이곳에 없었다.
작고 연약한 그의 오메가 앞에서 더 연약해져 버린 속 좁은 남자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드리안이 아랫입술을 깨물자 이번에 놀란 것은 칼이었다.
백마 탄 왕자처럼 좋지 않은 상황에서 등장해 준 것은 고마웠지만.
난데없이 나타나서 사람 간을 떨어뜨려 놓고 저렇게 서러운 표정을 짓다니.
목숨을 구걸하는 악역이 되야 하는가.
서러운 아이를 달래는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멍해 있었다.
칼이 놀라거나 말거나 아드리안은 칼을 일으켰다.
그의 살에 저 자식의 살이 맞닿은 꼴은 조금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말레가 이때다 하고 몸을 일으켜 달아나려고 했지만, 아드리안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레이피어를 검집째 들어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쿵, 하고 육중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게거품을 문 말레가 쓰러지고 칼이 “앗” 소리를 내며 마정석을 떨궜다.
아드리안은 칼의 팔을 고쳐 쥐다 이내 손에 힘을 빼고 쓰러져 있는 남자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칼을 바라보았는데, 통이 넓어 펄럭이는 옷자락 사이로 검붉게 물든 등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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