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 *
급하게 손님용 방을 정리하고 가장 좋은 침구를 깐 부관은 아드리안의 냉정한 축객령에 궁금한 것을 더 묻지 못한 채 물러나야만 했다.
요란한 반나절이 지나 마침내 둘만 남았다.
아드리안이 푹신한 침대에 칼을 내려놓자, 칼은 욱신거리는 등에 쓸리는 침대 시트가 거슬려서 엎드렸다.
아드리안은 묻고 싶은 것도 많았고 듣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뒤로 미루고 칼의 등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 찬기를 흘려보내고 천천히 마력을 조절하며 불어 넣었다.
“아구구, 아구구.”
칼이 정체불명의 소리를 내며 앓자 아드리안이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이상해? 직접 마법을 쓴 건 오랜만이라.”
환자보다 더 아파 보이는 얼굴로 쩔쩔매는 아드리안의 손을 잡으며 칼은 싱긋 웃어 보였다.
“아니, 시원해서. 더 해 주라.”
시원하다니, 좋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표현인가?
아드리안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다시 신중히 마력을 불어 넣었다.
“아흐으, 좋아.”
중간중간 셔츠를 들어 멍이 빠지는지를 확인하며 치료를 마무리한 아드리안은 엎드려 있는 칼을 덜렁 뒤집었다.
“내가 싫어서 도망까지 갈 정도였으면서, 왜 이렇게 순순하지? 무슨 작전의 일종인가?”
아드리안이 결국 참지 못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칼은 잠깐 침묵했다가 운을 뗐다.
“도망이라기보다, 음, 아니. 도망은 맞는데.”
손등에서 손가락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발갛고 오동통하게 부어올랐다.
“도망은 아닌데 도망이고?”
그게 뭐냐고 되물으며 아드리안이 양손으로 천천히 칼의 손등을 쥐었다.
윽,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칼이 천천히 말했다.
“혼란스러워서.”
내 마음이, 내 몸이, 또 네 마음이, 네 몸이.
우리가 서로를 원하는 게 이상하지 않지만, 이 세상의 이치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칼의 시선은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아드리안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 엉뚱한 곳을 보면서 말하는 게 못마땅해 얼굴을 가까이하고 칼의 턱을 쥐어 시선을 맞췄다.
가벼운 행동이었지만 칼은 또 순순히 따라주었다.
아드리안은 이제 은근한 비유를 사용하거나, 돌려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마녀가 네게 무슨 이야길 했지?”
칼의 동공이 살짝 떨리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낸 아드리안은 황성에 돌아가면 마녀부터 쫒아내야겠다 생각했다.
“마, 마녀? 아. 예언자 말하는 거야?”
“그래. 그녀가 자신의 과대망상을 네게도 강요하던가?”
아드리안은 처음엔 그녀에게 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연고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주제에 제국에 대해 아는 것도 많은 데다 꽤 맞는 예언을 하곤 했으니까.
그러나 가끔 그녀가 자신을 선망이 줄줄 흘러넘치는 얼굴로 보거나 엉뚱한 소리로 황성을 들쑤셔 놓는 것은 정말 싫었다.
그녀가 하는 예언에 의지해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할 정도로 글렌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호의와 보답으로 잠시 머무르게 해 줬을 뿐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녀가 황성에 해를 입히지 않았기 때문에 방관했을 뿐이었다.
“과대망상이라니? 너도 그녀가 하는 이야길 들었어?”
“내 질문에 먼저 답해 줘. 그녀가 네게 뭐라고 말을 했어? 너와 내가 맺어지면 제국이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가.”
칼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잡아떼지 않으면 아드리안은 분명히 그녀를 어떻게 할 셈이었다.
“아니, 아니야.”
“두둔할 필요 없어.”
아드리안의 시선은 더욱 매서워졌다.
쓸데없이 잔정을 흘리고 다닌다던 기사의 말이 왜 이제야 사무치는가.
칼 린드버그는 왜 자신이랑 상관도 없는 사람을 자꾸 감싸려 드는지 모르겠다.
“아직 어린 소녀야. 그리고 제국에 도움이 되는 아이고.”
“그녀의 예언은 어쩌다 가끔 맞았어. 그마저도 최근에는 심신의 미약으로 아무런 예언도 할 수 없는 상태다.”
“왜?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어?”
“별일 아니야, 얼마 전부터 식음을 전폐했을 뿐.”
“뭐? 야, 그건 별일이 아닌 게 아니지.”
놀란 칼 린드버그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아드리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입맛이 떨어졌다고 징징 울고, 제 고집을 관철시키려 시위하는 것뿐이니 그냥 내버려 둬.”
그제야 칼은 그녀가 왜 식음을 전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네 생일에 벨프리와 함께 있지 않았어?”
칼 린드버그는 왜 이따위 것을 묻는 거지?
꾹꾹 눌러 왔던 서운함과 화를 참지 못한 아드리안이 쯧, 혀를 찼다.
“왜 내가 내 생일에 벨프리와 함께 있어야 하는데? 그는 내 신하지, 친구가 아니야.”
생일.
네가 내 생일을 신경 쓰기나 했어?
왈칵 올라오는 서러움을 어쩔 줄 모르고 아드리안은 칼의 몸에서 물러섰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칼 린드버그가 뒤늦게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아드리안은 잡혀 주지 않았다.
진짜 생일을 보내고 싶었던 상대는 왜 다른 남자와 함께 있지 않았냐고 탓하는 것처럼 물었다.
“네게 나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 한두 가지 정도 있다는 건 나도 알아. 평생 숨기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해.”
아드리안의 진심이었다.
“그런데, 네가 내게 말을 안 해 주면 이렇게 갑자기 네가 떠난다고 할 때 강제로 붙드는 것 외에 뭘 할 수가 있어?”
아드리안은 물었다.
이유도 알려 주지 않고 덜컥 떠나겠다는 사람은 무슨 수로 잡아야 하냐고.
“나는, 그게…….”
“국혼을 요구한 건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널 떠보려 했던 이야기야. 네가 만약 내가 싫어서 죽어도 나와 혼인할 수 없다고 하면 억지로 진행시킬 생각은 없어.”
정말 내가 싫어서 그런 거라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긴 했지만 아드리안은 납득해야 했다.
움켜쥐고 흔드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린드버그를 들먹이고 약속했으니 지키라 억지를 부리면 칼은 어쩔 수 없이 승낙할 테니까.
“네가 싫어하는 내 옆에 붙어서 행복하지 못하면 그건 내게도 불행이니까.”
결국 양팔을 늘어뜨리고 웃는 듯 우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지은 아드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우리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어? 아직도 아무것도 없어?”
칼은 숨을 몰아쉬었다.
제 말에 상처받는 아드리안을 보는 것은 칼에게 상당히 큰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네가 떠나서 아프고 우울했다고 아드리안은 대놓고 말하고 있었다.
네가 싫다면 놓아줄 순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게 페로몬의 영향인지, 감정의 영향인지, 하며 자신이 쓸데없는 걸 고민하며 우유부단하게 굴 때, 아드리안은 서로 감정을 주고받았던 날들을 곱씹고 있었다.
주인공은 더 이상 악역이 아니게 된 칼 린드버그를 위해서 선뜻 나타나 주었다.
비록 오고 가는 조건이 있었지만 칼 린드버그에게 나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원작을 생각하며 누구도 불행하게 하지 않으려면 자신이 떠나는 게 맞다는 예언자의 말에 힘을 입고 행동하긴 했지만, 그 순간에 분명히 망설이는 자신이 있었다.
벨프리가 오메가가 되지 못하면 대신 자신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오만이었다.
그냥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 헤네켄 곁에 있고 싶었을 뿐인데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진짜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던 주인공을 불행하게 만들려 하고 있었다.
“아드리안.”
칼은 작게 아드리안, 아드리안, 하고 연거푸 불렀다.
고개를 든 아드리안의 눈이 숨길 수 없는 기대로 반짝였다.
왜 몰랐지?
설정에 얽매여 있던 건 아드리안이 아니라 나였는데.
눈앞의 남자는 더 이상 주인공도, 여동생의 최애도 아니었고 칼 린드버그의 알파로만 보였다.
아니지.
한때 여동생의 최애였으며 칼 린드버그를 처단할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던, 그러나 이제는 나의 알파가 될 남자다.
칼은 침대에서 내려와 아드리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떠난 후에도 계속 아드리안 생각만 했다.
신경 쓰이고 보고 싶은 걸 사랑의 시작이라 정의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런 걸로 하고 마음껏 걸어 보면 안 되나.
아드리안은 붙박이처럼 서서 칼이 제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미안해.”
담담한 칼의 사과에 아드리안은 눈을 감았다.
거절인가?
아드리안의 몸에 닿으려던 건 그저 칼의 본능일 뿐이었고, 그가 자유롭고 싶다며 다시 등을 돌리면…….
그의 옷자락을 잡으려는 손을 잘라 내면서 그만둬야 하는 건가.
그러나 이어지는 행동은 전혀 다른 의미의 것이었다.
칼 린드버그가 아드리안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칼 린드버그의 첫 히트 사이클, 그날보다 더 설레고 아득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예언자와는 상관없이 내가 고민이 많았어. 네 곁에 나 말고 더 괜찮은 사람이 나타날 것 같았고. 그러면 설 자리가 없을 것 같았거든.”
아드리안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칼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런 아드리안이 사랑스러워 칼이 더 세게 아드리안을 안았다.
“너는 누누이 내가 너의 유일한 오메가라 말했지만, 그건 너의 착각이고 어딘가에 네 진짜 짝이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계속했어.”
아드리안도 천천히 칼을 마주 안았다.
아까도 붙들고 있었던 몸이었는데, 마치 오늘 처음으로 만져보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진짜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침을 꼴깍 삼킨 칼이 말했다.
이 얘기를 하면 아드리안은 무슨 생각을 할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할까. 나를 정신병자로 볼까?
“나는 내가 남자의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 해 봤거든.”
거세게 뛰던 아드리안의 심장 박동이 조금씩 제 속도를 찾아가는 걸 생생히 느끼며, 칼 린드버그는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경건히 아드리안의 반응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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